별거 아닌 운명
김제이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6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는 나 때문에 한쪽 청력을 잃었다.
요즘 들어 자주 화내고 자주 의심하고 가끔 돈을 달라고 한다.
취한 남자를 바래다줬더니 50만 원을 차비라고 찔러줬다.
떨어뜨린 핸드폰을 전해 주려 회사로 불렀는데 다들 그 남자에게 인사를 한다.
사례라며 건넨 수표에 홧김에 대들고 며칠을 해고의 두려움에 떨었다.
상사로 다시 만난 그 남자, 회사 오너의 아들이라는 그 남자.

 

“그래서 말인데. 나, 잘하던가요?”

 

저기요. 전 그냥 취한 당신을 데려다준 것뿐인데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절 좀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제발.

 

나는 여자가 싫다.
여섯 살 그 사고 이후 여자가 끔찍하다.
2년 전 스토커에게 칼을 맞은 뒤론 더 끔찍해졌다.
그런데 내가 어떤 여자랑 잔 것 같다.
그 여자가 궁금해 죽기보다 싫은 회사에 내 발로 들어왔다.
호기심에 키스했더니 날 벌레 보듯 하는 그 여자.
남자 친구도 있다는 그 여자.
그럼 나랑 대체 왜 잔 거야?
취해서? 돈 때문에? 아님 내 얼굴?

 

“재밌습니까? 그러다 칼 맞습니다.”

 

그때는 몰랐다. 그깟 칼보다 당신이 더 아팠던 이유.

 

당신이 좋아. 우리, 연애할까?

 

 

 

미안함에, 그동안의 정때문에 항상 '을'이기만 했던 그녀, 주상은.
6년을 만난 남자친구에겐 언제나 을이였고 미안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항상 미안했다.
탄탄한 직장에 다녀서, 업무때문에 기다리게 해서, 회식을 해서, 돈을 벌어서,
자의는 아니였지만 대신 다쳐 청력을 잃게 해서 항상 미안했다.
미안해,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모든게 미안한 그녀였다.

 

여자 기피증으로 인해 여자라면 끔찍하기만 했는데 왜인지 상은만은 괜찮은 그, 허견.
여섯 살에 사고가 났고, 그 사고 후엔 여자라는 존재는 끔찍했다.
오랜 시간 상담을 받아도 봤지만 여전히 여자엔 무감각했고 싫은 존재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후 술에 취해 귀가를 한 다음 날,
얌전히 귀가하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되고 사고(?)의 당사자 상은을 만나게 된다.

 

평범한 직장인의 평범한 나날들의 그런 하루였다.
오렌지를 사고 나온 편의점 앞, 술취한 누군가 상은의 차에 타더니 행선지로 가달란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남자를 버리고 갈 수 없어 민증의 주소지까지 배달하게 되고
차비라며 50만원을 떡하니 건네는 그 남자 허견.
인사불성인 견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입술도 빼앗겼다.
다음날 술에서 깬 견은 술에 취했지만 어떤 사고가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상은의 차에 휴대폰을 두고 내린 견은 전화를 걸어 상은과 만나기로 한다.
상은의 직장은 자신이 2년 전 잠시 일하던, 아버지가 회장으로 계신 회사.
견은 부친의 회사로 향하고 상은은 견이 회장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얼마 후 견은 상은의 부서 팀장으로 온다.
회식을 하고 난 후 견이 술에 취해 상은이 귀가를 맡게 되는데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고 가려는 상은에게 견은 기습키스를 날린다.
뻔뻔하기만 한 견의 행태들에 상은은 화를 내지만 이내 후회모드.
회장 아들인 '갑' 허견에 맞섰으니 평범한 직장인 '을' 주상은은 비굴할 수 밖에 없었다.
사표까지 준비해 견에게 건네지만 견은 안 받겠다며 이내 사표를 찢는다.
왜 상은에게만 괜찮은 건지 자꾸 눈길이 가고, 신경을 건드리고, 장난을 걸고,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상은이 남자친구와 이별하는 걸 목격하게 된 견.
상은의 남자친구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난감해하는 상은을 도와준다.
견은 상은을 향한 제 마음은 숨긴 채
자신에게 붙은 스토커도 처리하고 상은의 남자친구까지 떨구자며 연인행세를 하자고 한다.
견도 자신도 새로운 사람이 생겼음을 보여야 하는 상황인 걸 인지한 상은은 동의한다.
그렇게 둘의 연인 아닌 연인관계가 시작되고
견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상은도 어느새 견을 마음에 품게 된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자면 개그적인 요소까지 갖춰 재밌고 가볍게 읽기 좋은 로코예요.
그렇지만 정작 그들의 이야긴 가볍지 않죠.
견이 여성 기피증이 생긴 여섯 살의 사고와 기피증을 최고조로 올린 2년 전 스토커의 피습 사건.
바람둥이 재벌 2세의 막장 연애 스캔들로 알려졌지만
견에겐 목숨을 위태롭게 한 사고였고 그로인해 해외로 떠나있게 됐었죠.
좋은 직장에 다니는 능력있는 바쁜 여자친구.
그래서 항상 미안했던 상은이였어요.
상은이 데이트에 늦어서 기다리다가 야구공에 맞아 청력을 잃은 남자친구.
상은의 잘못이라 원망을 하고 세뇌하듯 오랫동안 상은에게 비난을 퍼붓죠.
짧은 직장생활을 하고 재취업을 준비하지만 취업이 어려워지며 자격지심까지 겹쳐
업무로 바쁜 상은에게 화를 내고 의심하고 금전적인 의지까지 하면서 상은을 힘겹게 하지만
상은은 그런 남자친구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죠.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늘 '을'인 상은.
연애에 지친 상은은 결국 헤어지자는 남자친구의 말에 그러자며 손을 놓으려 하고
막상 상은이 떨어지려하자 그제서야 남자친구는 상은에게 사과를 하지만 이미 늦었죠.
여자 기피증이지만 나만 괜찮다던 남자는 남자친구와는 또 다른 남자였죠.
날 먼저 생각하고, 나만 바라보고, 날 위해 아낌없이 귀하게 여겨주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어떻게 안 반할 수 있겠어요.
툭툭 내맽는 말로 염장도 지르고 바짝바짝 화도 나게 하지만
외롭고 힘들고 아픈 순간에 항상 옆에서 날 지켜주는 남잔데 좋아할 수밖에요.
견을 스토킹하고 같이 자자 졸라대고 견이와 상은의 회사로 이직까지 해 쫓아다니는 주희.
첨엔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는데 참 귀여운 캐릭터였어요.
견과 상은이 사귄다는 말에 방해도 하려하고 진짜인지 뒤쫓아 다니기도 하지만
견의 상은을 향한 웃음과 마음과 행동들을 엿보며 견의 행복을 빌어주고
둘의 은밀한 스킨쉽에 혹여 누가 방해할까 차단까지 해주는 모습들.
악조임에도 악하기보단 허당끼 가득한 귀여운 아가씨였어요.
견의 가족들과 상은이의 할머니.
아들과 손녀를 아끼는, 그래서 혹 상처 받을까 걱정하고 마음 졸이지만
혹여나 그런 마음들에 부담이 될까 과장되게 웃음으로 넘기려 애쓰죠.

 

어둡고 축축 처질법한 이야기임에도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로 잘 이끌어 갔어요.
과거의 맞물림으로 인한 죄책감과 트라우마.
이들의 가볍고 밝은 겉모습과는 또 다른 아픈 이야기들은 참 묵직했는데요.
일부러 무겁게 분위기 잡으며 눈물을 뽑으려 애쓰지 않고
가볍게 표현하지만 그 속까지 가볍진 않고
가벼우면서도 묵직하게, 음울하면서도 재밌게 아주 잘 표현이 됐어요.
그래서 조금은 담담하게, 조금은 아리게 공감하게 되더라구요.

 

작가 후기에 단 두 줄의 글이 있었는데요.
항상 작가 후기를 먼저 읽는데 본문을 읽기 전엔
그저 어느 연인의 지난 이별과 새로운 사랑의 인연을 의미하는구나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본 그 글을 참 먹먹하게 긴 여운을 남기네요.

 

별거 아닌 운명으로 만난 당신.
내가 별 볼 일 없는 과거를 압도하는 현재를 살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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