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루몽 1~3 세트 - 전3권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름답게 부서지던 벽성의 달이여

자옥하 강물에서 솟아났구나

인간 세상에 귀양을 가니

인간의 봄은 어떠하신가








19세기 전반에 쓰인 남영로의 소설 『옥루몽』은 『구운몽』이래 '몽자소설'의 계보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속세의 인연을 매듭짓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난 신선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약 1500쪽 분량이고 총 3권으로 나눠서 표지를 새로 단장하고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1권 〈낙화의 연〉

선계의 문창성군이 인간 양창곡으로 태어난다. 양창곡이 벼슬길에 올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다섯 여인들과의 만남과 관계를 중심으로 그린다. 설레는 만남과 절절한 사연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책이다.





2권 〈혼탁의 장〉

오랑캐를 토벌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아 또다시 전쟁터에 나가게 된 양창곡과 강남홍, 일지련 등장수들의 활약상을 크게 그린다. 양창곡이 집을 비운 사이, 세 부인 사이의 갈등도 동시에 그려진다. 천자를 등에 업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탁당과 그에 맞서는 양창곡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당 사이의 당파 갈등도 나온다. 남북으로 말을 달려 이름 그대로 혼탁한 세상에 각자의 수완으로 맞서는 주인공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책이다.





3권 〈춘몽의 결〉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들이 먹고 마시며 교류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는 모습을 한 폭 아름다운 그림 같은 묘사로 그려낸다. 주연 조연할 것 없이 행복한 결말을 매듭지어 주어서 결말 만족도가 높다. 한바탕 꿈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구나. "물속의 달이요 거울 속의 꽃이라 할 만했다(1권 48쪽)" 눈을 뜨니 홀로 현실에 남겨진 독자로서는 시원섭섭하다.




1840년대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옥루몽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이었고 1910년대 이후에도 활자본 등 상업적으로 출판되어 대중성을 증명했다. 독자들은 강남홍과 벽성선의 이야기를 따로 떼어 『강남홍전』과 『벽성선전』으로 만들기도 했다.



작품에는 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중국 소설, 유명한 시와 노래, 역사 속 인물과 전설은 물론 불교, 유교, 도교, 음양오행과 주역 같은 당시 독자들에게 익숙했고 재미있는 요소가 총망라되어 들어가 있다. 부패한 과거 제도에 환멸을 느껴 은거하며 살았던 작가 남영로지만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배우고 알고 있는 모든 요소를 소설에 녹여내어 감질나고 흥미진진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강남홍이 적진에 잠입하기 전에 양창곡이 건넨 뜨거운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는 소설 삼국지에서 관우가 적장 화웅을 치러가면서 "이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라고 말했던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뮬란〉의 주인공 '화목련'이 언급되는 장면도 있다.




"군중에서는 자고로 여인을 꺼립니다. 제 부친께서 이미 군중에 계시니, 첩은 마땅히 본국으로 돌아가야 여자로서 행동거지에 마음을 놓을 듯 싶습니다."

홍혼탈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말이 지나치군요. 옛날 목란은 아버지 대신 출전하여 만리 밖에서 종군했지만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낭자는 어때서 그 문제에 얽매입니까?"

1권 436쪽






옥루몽의 주인공들이 욕망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으나 그들은 유교 사회의 엄격한 울타리 안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양창곡은 가부장제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주인공이지만 때로 자기 목숨을 내바치면서 천자에게 따끔한 진언을 한다. 여기서 조선의 붕당 정치와 과거 제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이 드러난다. 작품의 배경은 명나라지만 판타지 소설이 으레 그렇게 쓰이듯이 그것은 그저 탈에 불과하다. 조선의 정신과 문화의식이 곳곳에 드러난다.



간관諫官은 조정의 귀와 눈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간관을 엄하게 견책하시어 귀와 눈을 막으시니,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폐하의 문제점을 들으시겠습니까?

2권 159쪽



남자 주인공 양창곡이 만나게 되는 여러 인재들 중에 강남홍, 벽성선, 일지련, 황소저, 윤소저는 양창곡과 부부 관계가 된다. 윤소저와 벽성선 은 가부장제 아래 여자의 됨됨이에 따라 행동하다가도 때로 지략과 용기로 위기를 헤쳐나가고 주인공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강남홍이나 일지련은 일견 가부장제 제약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남홍은 남장으로 쌍검을 차고 전쟁에서 명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남만 축융왕의 딸로 처음 적으로 등장한 일지련은 쌍창을 쓰며 양창곡의 주요 조력자 중 하나다.



"명나라 최고의 장수이자 양창곡 원수가 평생 총애하는 여인(2권 400쪽)" 강남홍을 빼놓고는 《옥루몽》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이런 뛰어난 활약에 감복한 천자가 3군 통제사의 지위를 하사하려고 했을 때 강남홍은 남편 양창곡이 줄곧 주장했던 가부장제 관습을 대면서 극구 사양한다. 자신을 낮추다 못해 비하로까지 들리는 이런 태도가 당대엔 겸손과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신첩은 아녀자라, 변복을 하고 운남을 간 것도 남편을 위해서였고, 바람 먼지 가득한 전쟁터를 누빈 것도 남편을 따른 것입니다. 시대의 운수가 불행하고 나라에 일이 많아 여자의 행실로 규방을 지키지 못하고 폐하 안전을 지척에서 이처럼 자주 배알하니 진실로 부끄럽고 당돌한 일입니다. (…)

지금은 비록 남장을 했지만 일개 아녀자인 것을 폐하께서 환히 아시는 바이고, 세상 사람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러운 조정에 어찌 어진 신하가 없겠으며, 중국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필이면 일개 아녀자를 장수 자리에 올려 삼군을 호령케 하시겠습니까? 이는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북쪽 오랑캐에게 적잖게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2권 265쪽



강남홍의 뛰어난 능력은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쓰이며 남편을 향한 사랑과 복종 아래에 수렴된다. 이 부분에서만큼은《옥루몽》이 21세기 독자와 멀어지는 느낌이다.



만약 강남홍을 비롯한 여자 주인공들의 운명이 가부장제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옥루몽은 시대를 앞서간 명작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21세기의 독자의 눈에는 울타리와 한계점으로 보이는 그것이 당대의 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으로 환상 소설에 개연성을 부여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신양명하여 평생을 함께할 지기와 배우자를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적적한 시골마을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안으로 자식의 도리, 배우자의 도리를 다하고, 밖으로 신하 된 도리를 행하는 것이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로망이자 판타지였고, 그것을 모두 이룬 주인공이 나오는 《옥루몽》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판타지 소설이다. 그러나 《옥루몽》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는 순간 《옥루몽》이 아니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신선놀음을 하는 꿈을 꾸고 깨어난 듯한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조선 시대에 쓰인 원조 웹소설 같은 부분이 많은데 항상 절묘한 부분에서 끊어서 다음 화가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의 절단 신공만 봐도 그렇다. 연인이 사랑의 결실을 맺고 결혼 이후에 행복한 삶을 세세하게 그려내는 여성향 로맨스 웹소설의 모습도 보이고, 남자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며 돈과 명예와 사랑 등 욕망하는 대상을 모두 얻는 점에선 남성향 웹소설의 모습도 보인다.



평생의 원수가 생명의 은인 되는가 하면, 악행을 행한 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고, 한때 적으로 싸웠던 자들이 훗날 든든한 아군이 되는 점 등 조연들도 헛되이 쓰이지 않고 각자 역할을 다하며 주인공들과 인연을 맺으며 서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주인공들이 모두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오래오래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암시하는 결말을 보면 몽자 계열 소설이 주는 모든 게 한낱 꿈이었다는 허무감 보다는 인간 세계에서 충실하게 살았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신선이 어찌 특별한 사람이겠습니까? 명예와 이익 가득한 속세에서 득실을 근심하고, 바람 물결 사나운 괴로운 바다에서 안위를 무릅쓰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만약 우리의 오늘 모습을 본다면 또한 신선처럼 느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상일에 마음을 쏟는 사람은 범인일 것이고 고상한 사람은 신선일 것이며, 분주한 사람은 속인일 것이고 편안하고 한가한 사람은 신선이겠지요. 화형과 나는 오늘 관직을 버리고 산속에서 마음껏 노닐고 있으니, 어찌 오늘 자개봉의 신선이 아니겠습니까?"

3권 241쪽



당대 조선인뿐만 아니라 20세기 독자에게 사랑을 받으며 구운몽의 뒤를 이어 몽자 계열 소설의 완성도를 끌어올려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다는 걸 보여주었던 옥루몽. 21세기 독자들에게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과연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소설의 진가를 또다시 보여줄 것인가. 한 가지 진실은 ​옥루몽의 작가 남영로를 다시 무덤에서 되살려 동양 판타지 소설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점이다.


다 같은 청춘의 젊은 나이에 풀잎 끝의 이슬 같은 인생이 서로 시기 질투하다가, 날아드는 나방이 등불에 부딪침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한바탕 꿈인 것이지요.

2권 526쪽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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