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주부 구운몽
강선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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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를 전공하면서 로스쿨을 준비하던 운몽의 책가방엔 전공 교과서나 리트 기출문제집 대신 연극 대본이 들어 있었다. 운몽의 교통카드는 서울대입구 역이 아닌 혜화역에서 찍혔다. 어머님 몰래 대학로의 가난한 연극쟁이의 길을 선택한 운몽은 방황했고 고뇌했다. 운몽의 밤은 길었고 아침은 더뎠다.

 

운몽은 강서가 초록 대문집 현관 도어락에 지문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손님을 집에 들이는 안주인이 흔히 하는 겸손한 인사말인 줄만 알았다. ------- 강서와 재영은 발부리에 차이는 것들을 능숙하게 걸러내며 직진했다. 그녀들이 터준 길을 따라만 가면 될 것을, 운몽은 저도 모르게 정리정돈을 하고야 말았다.

 

저 구두보다는 든든할 거 같아.” 그저 저 자리에 놓여 있던 것만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주인 없는 구두처럼 운몽도 존재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집에서.

 

아홉 개의 구름과 함께 온 구씨네 장손이라 하여 구운몽이라 이름 지었다. 얼굴을 옥을 깎아놓은 듯하고 눈은 새벽별 같았으며 도량이 크고 지혜가 남달랐다고 장금이 여사는 회상한다. 92년 겨울이었다.

 

새 식구라고 했다? 서랍에서 와인 따개를 꺼내던 운몽은 놀랐다. ‘집에 가자가 아니었다. ‘집에 가라도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의 섬세하고 촘촘한 노동 끝에 초록 대문집의 새 식구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은 건가, 운몽은 얼떨떨했다.

 

운몽이 기껏 밥상을 차려봤자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 없고, 힘들게 쓸고 닦고 해봤자 빈 공간에는 먼지만 쉬었다 갈 뿐이었다. 그런 어수선한 시간들 틈으로 먼지만 쉬었다 갈 뿐이었다. 그런 어수선한 시간들 틈으로 파고든 질문이 있었으니 바로, 존재의 이유였다.

 

운몽은 바닥을 구석구석 쓸고 닦았다. 창문의 방충망을 떼어내 물로 먼지를 씻어내고 다시 달고 문의 유리도 개운하게 닦아냈다. 창고 같던 옥탑방이 아늑한 카페로 변신했다. 운몽은 기쁘고 또 기뻤다. 집안일을 통해 구원받은 느낌이랄까, 이런!

 

반딧불 맘들이 바쁜 엄마 강서 대신, 연우의 등 하원과 일상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운몽 삼촌을 자신들의 단톡방에 초대했다. ---- 그런데 오늘로 벌써 일곱 번째 모임에 참여한 운몽, 시작이 어렵지 한번 발을 디디고 나니, 두 번 째 모임에서는 일이 열리고, 세 번째 모임에서는 마음이 열렸다.

 

닦아도 닦아도 운몽의 부글거리는 속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운몽은 수세미를 던졌다. 순간, 떠오른 문장하나 수세미 함부로 던지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깨끗한 사람이었느냐

 

주부 생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육아 영역에서 운몽은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자란다는 말도 있지 않나. 운몽은 어제보다 한 뼘 자라고 오늘보다 한 뼘 더 자랄 내일이 기다려졌다. 연우도 잘고 자신도 성장할 내일이.

 

나도 명함이 갖고 싶다! 운몽은 명함 제작 업체를 검색했다. 누구에게도 건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역시나 그냥 만들어보기로 했다. ------- 머리를 쥐어뜯다가 운몽은 이렇게 적었다. ‘청년 주부

 

글이 너무 좋아요. 최근 읽어본 글들 중에 단연 최고였습니다.” “그냥 끄적거린 건데요, 브런치 작가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운몽은 그간 써 놓았던 글들을 차곡차곡 업로드 했다.

 

장금이 여사는 맨발이었다. 버선을 안 신고도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효과를 발휘하며 아들을 맞이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모르겠어. 여태 그걸 모른다는 게 창피해. 확실한 건, 법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 장금이 여사의 3단 고성과 함께 다시 절규가 시작됐다. 운몽의 눈에 장금이 여사가 베고 누웠던 편백나무 목침이 들어왔다. 단단해 보이는 것이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했다.

 

초록 대문집은 아늑했다. 지붕이, 현관이, 벽이, 방문이 한 목소리로 운몽에게 웰컴 합창을 해주었다. 이곳이 원래부터 내 집이었던 것만 같은 안정감이 세포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와 운몽은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다 꺼져! 아무도 내 부엌에 들어오지 마!”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운몽에 다소 당황스러움을 느낀 강서와 재영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두 여자가 없는 부엌에서 운몽은 비로소 평정을 되찾고 가볍게 손을 놀려 달팽이 김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연우는 삼촌 짱!’을 외쳐주고 아쿠리움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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