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망매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의 글을 읽는 건 나에게 있어 하나의 쾌락이다. 내게 '읽음의 희열'이 무엇인지 알려준 이는 바로 이 사람이고, 내가 닮고 싶은 글쓰기의 전범(典範)이란 게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고종석의 몫이다. 세계시민주의와 개인주의를 꿈꾸는 이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글을 통해 자신의 지향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가 가진 '압도적' 지식과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문체는, 한국의 진정한 우파를 고르는 데 날 주저케 하지 않는다. 한국의 우파는, 그리고 자유주의는 고종석에 의해 지탱된다.

때때로 그의 지향과 나의 지향이 충돌하는 건, 기본적으로 나라는 인간이 그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그릇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가 '자유주의'라는 넓디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나보다 얼마간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사실도 또다른 원인이 될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위치의 차이'가 때때로 그와 나의 충돌을 일으키며, 그 충돌에 날 당혹케 만든다.

이를테면 복거일을 자신의 사상적 스승으로 삼는 그가, 그 스승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부여잡은 나머지, 스승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조절하는 듯한 인상을 줄 때, 난 곤혹스럽다. 또 그가 롤즈와 포퍼를 이야기하며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을 경계하면서도, 때때로 시장에 대한 평가에서 앞의 두 사람보다 뒤의 두 사람에 보다 친근한 모습을 보일 때, 난 당혹스럽다.

게다가 그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며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할 때, 그 주창 속엔 세계 정치 지형 속의 권력 관계가 세심히 배려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나의 이런 '당혹감'들은, 결국 그를 닮고 싶으면서도 닮을 수 없는 내 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제망매>는 그의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이다. 고종석의 산문보다는 울림이 좀 덜한 것 같지만, 어찌됐건 이 소설집 역시 잘 읽혀지는 편이다.'제망매'라는 제목은 '고종석'이라는 세 음절이 주는 울림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전자가 '옛스러운' 이미지를 풍긴다면, '고종석'은 내게 있어 '세련됨'과 '근대','자유주의'의 상징이다.

책 속의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찬기파랑'과 '사십세'인데, '찬기파랑'이 현대사에 대한 고종석의 치밀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단편이라면,'사십세'는 사십세에 진입하는 한 남성 화자가 아버지와 관련한 자신의 내면의식을 세심히 드러내고 있다. 이 남성 화자가 이른바 '첩의 아들'이라는 것.

이것은 소외된 '개인'에 대한 개인주의자 고종석의 관심과 연민을 나타낸다. 고종석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전라도인, 혼혈아, 서자 등과 같이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살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과 일정부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의 다음과 같은 문구는,어찌보면 고종석 자신의 체험적 고백에 가깝다.

'사실 광주 사건 이후에,너무나 불공평하게도,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딴 지역 사람들의 편견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관찰일 것이다. 그게 세상이다. 누군가가 당한 불행은, 누군가가 당한 참화는, 그 불행과 참화를 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대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대체로 어떤 운명의 징표로서,어떤 낙인으로서 작용하기 쉽다. 인간의 진화는,아직,고작,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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