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기
호시노 도모유키 지음, 김석희 옮김 / 그물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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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도모유키의 식물기를 읽었습니다.

지구생태계 전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방사선 폐기물을 거침없이 바다로 방류하는 시기이다 보니 소설이 더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지구의 나이테에 인간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구의 자정 능력을 뛰어넘는 파국이 곧 닥칠 것이라 우려하기도 합니다. 김석희 선생님이 옮긴 일본 작가 호시노 도모유키의 '식물기'의 얘기도 지구에 새겨지고 있는 인간의 나이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낮은 톤으로 식물로 귀의하고 싶은(식물이 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작가는 왜 소설의 소재로 식물을 택했고, 식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식물의 무해함과 치유력 때문일까? 궁금증을 뒤로 하고 호시노 도모유키가 안내하는 문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작가는 차분한 목소리로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얘기합니다. 첫 단편 '피서하는 나무'에 등장하는 개 '오노농'과 '오노나무' 그리고 유리오 가족은 에너지의 순환과 순환을 돕는 매개체로 등장합니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가는 아름다운 에너지 공동체를 말하려 식물을 소환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작가의 의도를 좀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호시노 도모유키는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탐욕, 파괴에 환멸을 느낍니다. 그리고 결국엔 '인간이길 그만두고 싶다'란 표현까지 꺼냅니다. 얼마나 참담하고 부끄러우면 '인간이길 그만두고 싶다'란 말을 할까요. 작가는 곧 이어진 문장에서 질문 같기도, 독백 같기도 한 말을 합니다. '다른 생명체를 먹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란 정말 매력적이지 않습니까?'라고요.

아마도 작가는 모든 존재에게 '무해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치유와 회복의 거름이 되어주는 존재로 식물을 택했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11편의 작품과 에필로그 중에 몇 작품을 꺼내봅니다. '기억하는 밀림'에 등장하는 소라히코는 주변 사람이 삶을 마감할 때마다 화분을 하나씩 키웁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친구, 회사동료... 그렇게 상처를 가진 채 세상을 등진 이를 위해 소라히코는 화분을 만들어 그들을 기억하고 위로합니다. 결국 마지막 10번째 화분은 안타깝게 소라히코 자신의 화분이 됩니다. '너도 남들처럼' 평범함 속으로 들어오라는 의견충돌이 있은 후 평범하다는 폭력에 결국 소라히코는 화분이 되고 맙니다. 다수에게 카타르시스가 되고 소수에겐 가혹한 폭력이 될 수도 있는 우리 주변의 모습이지요...

'스킨플랜트'에서 작가의 상상력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인간과 식물의 대결일 수도 있고 타협일 수도 있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놀라운 상상력을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독자 또한 책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합니다. 타투를 식물로 새긴다는 상상도 놀라웠고, 식물 타투가 점점 발전해 모자처럼 햇빛을 가리는 토란 타투가 만들어지고, 식물 패션이 산업이 된다는 상상까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타투의 식물이 꽃을 피우면 그 댓가로 인간은 성욕을 잃게 된다는 설정은 작가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대목이었습니다.

- 머리에 꽃이 피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 완전 좋았어
- 섹스보다 좋아?
- 아아, 그런 거랑 차원이 다르지. 절절히 행복하다고 할까, 살아 있길 잘했다는 기분이라고 할까.
- 만족감?
- 응,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감정. 뭐야, 내가 여기 있잖아! 하는 느낌.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안정된다고 할까?"

표지 그림이 연상되었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시기를 학자들은 인류세로 정의합니다. 학문적 정의가 필요할 만큼 지구의 일부인 인간이 끼치는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의미겠지요. 첫 개념이 나온 후 대략 산업혁명 전후로 인류세를 정의했다고 하는데, 최근엔 산업혁명이 아닌 1950년 이후로 인류세를 정의하는 학자들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지구에 대한 공격적 영향력이 비례해서 증가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인류세의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로 기록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성악설을 믿습니다. 에고를 갖고 태어난 이상 이타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존재 자체가 공격이고 파괴자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호시노 도모유키는 말합니다. 지구 순환의 싸이클 속에서 지구와 함께 공존하고 싶다면,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무해한 '종'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지구의 나이테에 선명하게 새겨진 플라스틱, 방사능, 오염 물질도 있지만 나이테에 그려지지 않은 차별, 비난, 소외, 편견은 주홍글씨처럼 인간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호시노 도모유키는 인간에게 절망하고, 식물에게 희망을 얻고, 다시 인간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기 위해 자신의 소설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호시노 도모유키의 '식물기'와 함께 우리가 기록하고 있는 인간의 선명한 나이테를 외면하지 않고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혼자 하는 짧은 기차여행 열차 안에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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