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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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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 교수님께선 나에게 말했다.

 좋든 싫든 넌 이제 지식인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받아들여야한다라고..

 같은 글을 읽고도 그에 반응하는 과정을 사람마다 살펴보면 재미있게도 무척이나 다르다.

 과연 나는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보는 것을 보고자 하는가?

 요즘 들어 부쩍 느낀다.

 쓸 데 없이 대안으로서 무엇인가를 제시하지 못할 바에야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명저들은 받아

들여야겠다고.

 그들의 평생애의 연구와 지식의 집약체로서의 그 책 한 권에 무척이나 인간에 대한 감동을 느낀다.

 아, 이런 글들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축복이다.

 패러다임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놓자면, 이는 한 기존의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한 과학자 사회가

 공통으로 갖는 이론이자, 학설이자, 이해의 토대이자, 세상을 보는 관점이자, 언젠가 이를 대체할

신패러다임으로의 발전과정의 산물이자, 그 시대를 규정짓는 한 잣대이다.

 난 그가 '과학, 너도 별 거 아니야 결국엔' 이라는 의도에서 썼다고 생각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이 저술

후의 논쟁을 통해 두 문화의 다른 한 편이 칼날을 세울 수 있는 한 도구로서 이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난 어디까지나 패러다임이란 과학에 특수한 이론이지만 그 파장은 사회 각 분야에까지 차용될

정도로 파급효과가 컸고 그 때문에 논쟁거리를 준다고 생각한다. 포퍼와의 논쟁,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비판..다 일단 제쳐두고 패러다임은 이미 패러다임으로서 자리잡았다. 다윈이 그의 종의 기원을

펴내며 자연사학자들이 이걸 이해해서 받아들여줄거라고는 기대도 안한다고 말했듯이 엄연한 비판을

 위한 비판은 항상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헤드 말대로 어쨌든 인류는 진보하고

 있는 것일테니까. 그것이 어떤 방향성과 목적을 지닌 것이든 말든. 난 세상의 변혁기에 있다. 

그 중심에 서있다. 그것만으로도 난 역사의 증언자이고 되도록 공평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단지 그것뿐, 내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다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비판을 안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선구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받아들이며 묵묵히 쌓아 올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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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심플리시티 - 카오스, 복잡성 그리고 생명체의 출현
존 그리빈 지음, 김영태 옮김 / 한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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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한 복판에 카오스가 있지만 카오스의 한 복판에도 질서가 있다.”

 아마도 이 문구만큼 카오스를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카오스란 고전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완전히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회자되어 왔다. 하지만 여기서의 카오스란 반복과 자기 유사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인과관계를 가진 연결된 네트워크 고리 안에서 질서를 갖는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단순한 그 무엇이다. 단순한 법칙, 비선형성,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과 피드백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빈은 이 책을 통해 물리학, 천문학, 수학, 기상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진화를 넘어서 하나의 계로서의 지구, 그리고 은하에까지 이를 적용하는데 성공한다. 이의 흐름을 간단히 도식화시켜 나타내어보면 다음과 같다.

 케플러, 갈릴레오 – 뉴턴, 라이프니쯔 – 맥스웰 – 아인슈타인 – 푸앵카레 – 리처드슨 – 로렌츠 – 튜링 – 벨루소프 – 박 – 카우프먼 – 러브록

이 흐름을 통해 어떻게 저자가 기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각계의 학자들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카오스란 의미를 재정립해나가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얼마 전, 경제학을 공부하는 와중에 Kremer의 O-ring 모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 모델도 결국에는 카오스 이론이 적용에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모델에서 설정하고 있는 생산함수는 다음과 같다.

B*F(qi, qj) = qi*qj

이는 곧, 한 기업의 생산성은 기술수준 q를 갖는 노동자 I와 J로 결정되는데 이 때의 각기 다른 기술수준 q를 지닌 노동자들 간의 곱으로 생산함수는 결정지어진다. 이는 아담 스미스의 분업의 효율성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노동자 한 명의 기술수준의 결함은 곧 전체 생산 능력에의 결함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마치 챌린저 호 대참사에서처럼 작은 기대하지 못한 결함 하나가 불러일으키게 될 시스템적인 카오스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은 채, 조금 더 확장시켜볼 수 있었다. 경제학에는 참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는데 이는 시카고 대학의 Gary Becker의 ‘marriage market’ 가설이다. 이 가설 또한 O-ring에 대한 논의의 연장 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시 O-ring으로 돌아가 좀 더 논의해보면, qi와 qj에서 이들의 생산능력은 이들이 지닌 기술수준q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데 만일 시장이 완전경쟁 상태에 놓여있다면 생산성은 임금과 비선형관계이지만 정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생산함수가 B*F(qi,qj) = g(qi) + h(qj) 였다면 한 노동자의 기술 수준과 다른 노동자의 기술 수준 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으므로 임금과 생산성은 선형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둘 간의 complementarity가 존재할 경우에는 둘의 기술 수준이 서로의 생산성에 영향을 주므로 이는 임금과 생산성의 경우에도 선형관계를 갖게 한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기업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 기업이 노동자 두 명에 의해 생산되어지고 있으며 이들의 기술 수준이 0.2라고 하면 생산함수는 0.2*0.2=0.04가 되며 이 때의 임금 수준을 4라고 하면 또 다른 기업의 노동자의 기술 수준이 0.4라고 하면 생산함수는 0.4*0.4=0.16이 된다. 기술 수준에서는 두 배 차이가 났으나 생산능력에서는 4배 차이가 나며 이는 그대로 임금 수준을 4배 차이가 나도록 만든다. 마찬가지로 기술수준이 0.9인 기업이라면 0.81의 생산능력을 갖게 되고 이 노동자는 81의 임금 수준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느 높은 기술 수준을 지닌 노동자라도 (아니 낮은 기술 수준을 가졌더라도 적어도 시도만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 높은 기술 수준을 지닌 노동자를 동료로 구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문제를 가지고 marriage market에 적용시켜보면 결국 가장 높은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남자가 마찬가지인 여자를 배우자로 맞이하는데 성공하며 두 번째의 매력을 지닌 남자는 완전경쟁 시장에서 두 번째로 매력 있는 여자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는 가장 매력 없는 남자가 가장 비매력적인 여자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게 되는 market clear상황까지 계속된다. 이 가설은 물론 비논리적인 측면과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가설의 전반적인 논리가 다윈의 가장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선택된다는 적자생존의 원칙의 그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시장도 결국에는 이 논리 어디엔가 1/f 잡음과 지수함수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즉,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키가 50년 전에 비추어볼 때 20센티나 커졌다는 것은 단순히 건강상태의 호전을 벗어나 (키가 매력을 높게 판단하는 척도 중 하나라 가정한다면) 키가 더 큰 사람들이 환경에 더 적합하게 적응하는 것으로 보아 유전자에 카오스적인 메커니즘이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을 전개시켜보았으나 책을 읽는 과정에 있어서도 프렉탈과 같은 수학적 부분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기에 도저히 더 이상 전개시키기에는 무리가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명절의 교통 대란 때, 고속도로에서 10시간이 넘는 정체를 보면서 항상 생각했던 것은 모든 차들이 동일하게 10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면 정체가 있을 수 없을 텐데, 마치 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해답이 이 책을 통해서 확실히 해소되는 듯 하여 기쁘다. 단순히 차들이 더 빨리 달리거나 혹은 인터체인지나 톨게이트로 빠져나가려는 반복들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통지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카오스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수학적인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사실은 노드의 뜻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십만 개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면 이에 따른 형질은 10의 3만 제곱승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사람의 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283,824,000,000,000명을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인구 수 60억의 평균 인구증가율이 1.5%이므로 매년 9000만 명이 새로 태어난다. 이는 매 초 3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계산하여 60*60*24*365*300만 년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280조 명에 불과하고 이를 백 조 단위에서 올림을 하여 천 조 명이라고 하더라도 겨우 10의 15 제곱승에 불과한데 사람이 그 형질을 다 나타내려면 적어도 10의 3만 승에 해당하는 사람이 태어나야 한 번은 순환될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으며 계속 읽어나가는 과정에 호기심이 생기고 가끔은 해결하는 모습도 보이고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가기도 하지만 이 와중에 발견하는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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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그늘에서 - 제인 구달의 침팬지 이야기
제인 구달 지음, 최재천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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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그녀의 모든 연구의 성과와 생애, 그리고  그녀의 침팬지에 대한 애정과 공존의 메시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고도로 발달된 지성을 갖게 된 우리 인간의 특권에는, 우리의 생각

없는 행동에 의해 존속의 위협을 받고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라고 말한다.

 인류의 뿌리, 그리고 그 안을 자세히 들여보자 해답이 열렸던 것이 아닐까?

우리 인간만이 장난에 웃을 수 있고, 가족과 친구의 죽음에 비통해하고, 서로 애정을 나눌 수 있고, 사회적

인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 땅의 존재하는 모든 소중한 생명의 존귀함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을 희생으로 삼아 환경을 바꾸는 방식으로 새롭게 '진화'해왔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

는 그럴 힘이 있었다. 다른 생명체들이 '아직' 환경에 자신이 적응할 뿐, 개선개조할 능력이 없을 때에 인

간은 가장 먼저 이 '힘'을 갖게 되었고 '교육'을 통해 자손 대대로 물려주거나 혹은 발전시켜왔다. 삼라만상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갖게 된 이 'Gift'야말로 우리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닐터, '가이아'로서의 지구를 더

좋은 공간으로 가꿔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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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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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실로 신이 적어도 종의 기원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인정함으로써 인간 자신들에 대한 커다란 이해의 기회를 얻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온다. 물론 이 명제는 거짓일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다윈 이후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하는 모든 과학적 노고를 헛수고와 거짓으로 만들며, 그들이 쌓아 올린 사실과 합리적 논거들에 비추어 볼 때 일어날 확률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이 명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 조건에 대한 모든 진지한 고찰의 본질적인 기저를 부정하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두 가지 딜레마가 생긴다고 윌슨은 이야기하고 있다. 어떠한 종도 유전적 의무를 초월하는 목적을 갖지 않으므로 인간에게 유전적으로 내재된 가능성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그 첫째이다. 다음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한 윤리적 전제들을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이란 유전적 요소와 후천적 요소를 통해 습득되는 것이고 실은 문화와 같은 후천적인 요소로 인한 것들도 인간의 유전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유전적 가능성들을 고찰하도록 규정지으며 이의 결과물로서 도래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충되는 가치들 가운데 선택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그 누구도 윌슨만큼 합리적이고 타당한 논증 과정을 통해 과학적 탐구의 중요성과 그 영향력을 완벽하게 설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앞의 전제와 딜레마를 통한 앞으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문제들의 제시는 강한 연결고리를 지닌다. 이 강력한 기본 전제를 토대로 인간의 진화는 증명이 가능한 사실임으로 이를 통해 공격성, 성(姓), 이타적 행동, 종교와 같은 종래 사회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인간 본성의 모습들 역시 실은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기재임을 깨우친다. 결국 과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인간 본성이 윌슨이 말하고자 하는 바임은 자명해 보인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탐구는 어떠한가?
 인간 본성도 자연과학의 한 부분으로서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의 통합일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인간 자신과 자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열쇠는 과학이 쥐고 있는 것임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은 결국 근본적인 답안을 제시할 수 없고 단지 과학자들이 더 세련되게 그들의 논조를 풀어내어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신학은 이미 학문적으로 설 토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경제학이나 정치학 등의 사회과학은 더 현실적인 문제들을 탐구한다고 자위하지만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과학이다. 아마도 윌슨에게 있어서 학문적으로 의의가 있고 과학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학문은 심리학, 방법론적 의미에서의 역사학, 매우 과학적인 인류학 정도일 것이다. 이는 많은 학자들을 아노미 상태로 몰아갈 만큼이나 편중된 의식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아마도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의 통섭이란 과학이 주(主)가 되어 이끄는 통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아직 통섭 책을 펼쳐보지 않았기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더 큰 호기심과 관심이 생겨난다). 2007년 현재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도 이 사실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데 30여 년 전, 당시에는 학계에 대단한 폭풍을 일으켰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실로 많은 반감을 샀으리라 기대되지만 그들 또한 딱히 여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 행동이나 의식, 뇌에 대한 모든 이해도 현재는 단편적인 지식과 아마도 이러한 유전자가 존재하여 이렇게 인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귀납적 사실들에 근거한 유추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 인간의 과학기술이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발전하여 인간 유전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구현해낸다면 어떤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어 어떤 행동과 정신을 유발시키는지 온전히 알게 된다면 현재의 모든 논란을 종식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순수하게도 과학과 그 기술의 발전에 해답이 걸려 있다.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할을 윌슨은 당시에 제시한 것이다.           
물론 그의 논리성에 일말의 생채기조차 없어 보이지는 않다. 과학의 거시적 관점의 우월성에 대한 근거로 들며 명쾌하다고 지적한 로버트 노직의 채식주의 옹호의 글과 외계인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 볼 필요가 있다. 노직은 인간이 자신이 죽인 동물이 감수성과 지능 면에서 감히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급하다는 생각 하에 육식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단다.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에서 채식은 어떻게 정당화가 되는가? 과학과 반대편 선상에 서 있는 다른 문화의 자아도취적 인간중심주의는 지능적인 악이라고 하지만 과학 역시 이를 비판하지만 그 역시 온건한 생물에의 평등한 관점의 찬탈에는 실패하는 듯 하다. 외계인만 해도 그렇다. 인간에 대해 인간이 다른 생물을 대하는 시각과 똑같이 인간을 대하여 인간을 먹을 것이라는 근거를 들어 가까이는 채식의 논리, 멀리는 만물평등사상과 같은 논리를 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 이 같은 자연적인 약육강식, 자연선택 앞에서 인간은 그렇게 먹혀서는 옳지 않다라는 숨은 전제의 발견은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다. 단순히 다른 생물을 해할 수 없다는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그와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생물을 옹호해야’만’ 한다는 식이다. 인간의 생존을 영구히 합리화시키기 위한 자구책이자 자기 변명을 합리화, 정당화, 논리적 일관화를 위해 만들어낸 억측에 불과해 보인다. 인간은 단순한 평등의 논리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험하고도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그것이 인간보다 고등한 존재와의 조우 시,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발상에 전혀 반박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최근까지도 생물 간의 절대적인 가치의 경중을 잴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두 가지 연이은 사건을 통해 어느 정도 수정이 되었다. 하나는 길을 걷다 기저귀를 찬 흰 색 말티스를 본 후, 귀엽다, 조그만데 새끼 강아지 날 준비도 다 됐네 등의 언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혹은 일방적으로 내 자신은 그 말티스와 관계를 맺었다. 15초도 지나지 않아 그 강아지가 차에 치어 죽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몇 일 동안이나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물론 그것이 범죄를 자행했을 때만큼의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강아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고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3일 정도 지나서 햇빛이 쨍쨍한 날, 학교 풀밭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데 벌 한 마리가 내 발 앞으로 낙하하듯이 내려오더니 몇 초 간 꿈틀댄 후, 죽었는지 움직이질 않았다. 전부터 바닥에서 뭐가 그리 분주한지 바삐 돌아다니던 개미 중 한 마리가 벌의 시체를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벌이 날라오는 모습부터 꿈틀대는 모습까지 강아지의 경우에서처럼 벌과도 간접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어떤 심적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강아지가 인간의 손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특별히 내가 인간의 대표로서 고통을 느낀 것이라기보다는 강아지의 죽음 자체를 안타까워했다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모든 생물은 그 가치가 동일하다던 내 생각 자체에 자기 모순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인간은 자신과의 친숙함(여기에는 좀 더 고등한 지능을 갖출수록 인간과 친숙할 수 있다는 정의 관계가 성립할 것이다)을 가치 판단의 근거로 삼아 생물 간의 기본권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논리적인 연관 상, 인간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고등한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고 이를 만물평등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윌슨의 너무나도 합당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전체 논리 중,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 인간 본성, 그 중에서도 공격성, 성, 이타성, 종교 등에 대한 그의 해석은 명쾌하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내내 그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동성애에 대한 그의 해석을 경청하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의미에서 동성애가 이타적이라 말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러면 바로 다음 문장에 동성애의 이타성에 대한 설명이 제공된다. 또한 목적성 이타주의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그렇다면 친족위주의 맹목적 이타주의가 아닌 인간 성인(聖人)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바로 같은 물음이 등장하고 이에 대한 해석이 여지없이 등장했다. 여태까지의 과학적 책들은 나의 무지로 인하여 그들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급급했다면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조금 더 발전하여 작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이다. 물론 여전히 그의 논리성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논거가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기에 비판적인 사고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요약하자면 그의 기본적 전제와 문제 의식에 대하여 통감했고 그의 이어지는 설명에 완전히 감복하였기에 그 이해를 바탕으로 감상을 정리해 보았다. 그 중,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웠던 한 가지 작은 부분에 치우쳐서 비판을 해보았지만 결국 결론은 그의 명쾌한 해석에 여태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상당 부분 해소되어 무척 기뻤다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는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동성애 또한 유전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 민족주의와 정치적 논리는 결국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의 발로일 수 있다는 것 등등 열거하자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도 부족할 것이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큰 비판점을 제공해보자면 이것이다. 인간의 내재된 유전자가 인간 본성의 매우 강력한 근원이 되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유전자 조작의 정당화로 이어질 수 있다거나 아니면 효율성을 떠나서 적어도 그런 사회가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음으로 왜곡될 가능성은 없나 하는 것이다. 수많은 인간사의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그런 것들을 통해 완벽해질 수 있지만 실은 우리는 그런 삶의 완벽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인위적인 조작으로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 와 같은 위대한 업적이 오용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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