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풍경 너머 풍경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를 놓는 모습 보입니다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
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다 휘둘립니다
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神)은 자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
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 옵니다
다녀왔습니다
-32쪽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
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
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
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