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야곱 DNA - 축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이중적 욕망
김기현 지음 / 죠이선교회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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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에서 기존의 신을 위한 종교를 비판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기존의 종교에는 인간은 사라지고 오직 신의 대리자인 성직자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드 보통은 이러한 악습의 해결책을 인간을 위한 종교에서 찾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사라져버린 기존의 종교에 기대지 말고 인간을 위한 종교 만들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통은 지금까지 종교와 모든 것이 동일하지만, 신만이 사라져버린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 그것이 바로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단호히 기독교가 신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이 책의 저자도 동일하게 우리에게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서 안에 사람이 존재한고 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야곱을 통해 우리는 타자화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비록 이 책의 주인공인 야곱이 찌질하기도 구리기도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야곱은 솔찬히도 매력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야곱의 삶이 성서의 결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과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서의 결론이자 세계관입니다. 성서는 은혜와 구원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서가 말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마커스 보그는 “십자가 죽음은 예수의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살아낸 결과가 십자가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그의 이 주장은 한편으로는 발칙하지만, 일면 타당합니다. 조금만 신약성서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우리는 은혜, 구원만을 위한 삶이 성서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은혜와 구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잃어버린 드라크마, 즉 삶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방법을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이라는 터에 놓여 살아가라는 명을 받았지만, 이내 살아가는 방법을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야곱이 등장하는 창세기에 멀리 떨어져있는 욥의 인생도 그랬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기도 했지만, 욥기 서사의 대부분에서 그는 하나님께 답을 내놓으라며 항변합니다. 의로운 본인이 왜 부당한 태도를 당해야 하냐며 하나님께 울분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욥과 야곱을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이들이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하나님의 부르심 사이의 간극을 매우기 위해 부단히도 살아갔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간극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던 에서와는 다른 야곱의 삶을 만들지는 않았을까요? 스탠리 하우워스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간극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 간극 자체가 우리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야망을, 한편으로는 축복을 원했던” 야곱의 삶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에서처럼 장자라는 답에 안주하지도,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야곱처럼 굳건히 살아가야 합니다. 답이 없는 삶의 이정표는 ‘포기’가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답이 아닐까요? 야곱처럼 각자의 향기를 남기며 말입니다.
완주군 동상면 들어가는 입구에/ 저 밤나무숲이 무성하게 풀어 놓은/ 밤꽃냄새/ 퍽징하네
살아보려고 기를 쓰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남의 코를 찌르는가 보네/ 인간도/ 가장 오래 헤맨 자의 발바닥이/ 가장 독한 냄새를 풍기는 법
안도현 – 이 세상 소풍와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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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 개정판
김기현 지음 / 복있는사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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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라. 그리고 선함을 증명하라”
김태헌
현 시대는 우리에게 예언자를 요구한다. 미래를 예언할 예언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시대의 불의와 악함에 반응할 예언자를 찾고 있다. 그러한 시대에 요구 앞에 이 책은 우리를 한 예언자에게로 인도한다. 그 예언자는 바로 하박국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한 구절로만 이해되어 왔다. 그가 뱉어낸 분노와 정의에 대한 갈망은 무시 되었고, 맥락 없는 ‘믿음’만이 난무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다채로운 하박국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특히나 저자가 소개하는 회의, 저항, 정의와 같은 하박국서의 메시지는 2016년 11월을 살아가는 우리가 치열하게도 곰삭여야 할 개념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상태는 여전히 분노없음, 착한사람 콤플렉스에 빠져있다. 분을 내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의 척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꼭 분노를 참는 것이 건강한 신앙임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무관심의 반증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분노란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무신론자는 하나님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동일한 이유로 안토니오 그람시도 분노하지 않고 무관심한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기생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도 애정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떻겠는가. 그러니 우리 좀 회의하고 분노하자.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다. “악이 있어서 신이 없다면, 선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지지한다”라는 C.S 루이스의 말이다. 다시 말해 선만이 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열하게 선을 보여야 한다. 세월호, 백남기 농민 사태를 향해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할 때 우리는 그들과 연대하고 연합하며 선의 존재를 증명해 내야 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란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들을 대신하여 사소한 문제에도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언자는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헤셀에 따르면 “예언자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은 하느님의 느낌을 함께 나누는 것, 하늘의 정념을 동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언자는 기계적으로 말씀을 되새겨 주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또한 비판하는 사람이다. 불의한 체제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자다. 물론 대안 없는 비판은 공허하다. 파괴만을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적 비판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예언자란 자신의 말만이 아니라 불의한 체제에서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에서 멈추지 않고 연대로 나아갈 때 그것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대에 아픔 속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받은 이들이여 자기 의지에만 빠져있지 말자. 예언이란 공허한 말을 뱉는 것도, 비판적 사고만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발 끈을 동여 매고, 지하철에 오르어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느낌을 나눌 수 있는 곳. 그것이 하늘의 정념에 동조하는 행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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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김기현 외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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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지름길이 아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신앙이란 “사물의 불가사의함에 언제나 예민한 사람에게, 익히 알고 경험하는 구체적인 것들 속의 믿을 수 없는 알짬에 눈을 떼지 않는 사람에게 온다”고 했다. 이는 신앙이라는 것이 단순히 명제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네 신앙이란 우리 삶 저변에 놓인 문제를 씨름하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내야 한다. 덮지 말고 열자는 말은 성경책을 덮지 말고 열자는 소리가 아니다. 주어진 질문과 고민에 정직하게 답하라는 것이다. 여기 두 명의 저자는 그렇게 마치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저자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라는 도발적인 제목과 함께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 우리로 하여금 남몰래 고민하던 문제들을 꺼내 놓도록 만든다. 예컨대 기적, 천국과 같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궁금하지만, 교회 안에서 금기시 되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던 문제들이다. 뿐만이랴. 소통이 사라져버린 부자(父子)관계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가족관계의 대안을 발견하기도 한다. 양희송 대표의 추천 말처럼 이 책은 반칙, 아니 사기다.
더욱이 이들의 대화가 흥미로운 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질문과 대답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부자간의 대화가 아니라 사실과 진실의 대화랄까. 고딩 아들과 목사 아빠는 사실적으로 묻고 진실적으로 답한다. 기적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는 질문엔 그 기적이 담고 있는 의미를, 기도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냐는 질문엔 기도가 하나의 행위이자 신비라고 말이다. 사실이 아닌 것은 진실이 아닌가? 과학적으로 밝혀질 수 없는 것은 허구인가? 이 책은 우리에게 사실 너머 존재하는 진실을 보여준다. 목사 아버지의 대답을 통해 드러나는 기독교의 진실성은 근대적 사고에 함몰되어 있는 우리에게 신앙이란, 기독교를 믿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립시킨다. 철저히 사고하라 그러나 그 너머의 진실을 보아라. 이것이 목사 아버지와 고딩 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어지러운 비판적 사변을 가로질러 하나님의 신비로 직행하는 편리한 지름길”로 여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여준 것처럼 신앙이란 단순히 명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지러운 비판적 사변의 길도, 사실을 넘어 진실을 볼 수 있는 끈기도, 이것들을 실천하는 몸의 행위들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신앙이란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는 것이다. 진리와 진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지 않는가. 사실적인 관계 보다 진실적인 관계가 오래간다. 사실적 관계는 사실이라 불리우던 것이 사라지면 시들어 간다. 오해가 일어나 사실적인 것에 문제가 발생하면 관계가 무뎌진다. 그러나 진실적인 관계란 다르다. 표면적인 대상이 아니라 표면 넘어 존재하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사랑, 우정이 그런 것들이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말이다.
관계, 사고, 신앙은 우리를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가는 이 길은 언제나 경험을 수반한다. 기독교인이 명제적인 답변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도 그렇다. 실천을 통한 경험 없는 믿음, 사고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을 감지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진실이란 대상을 곰삭혀 보고, 경험하고, 그 옹글함을 느껴 보아라!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껴보기도 전에 꽃이 아름답다는 말을 먼저 배웠다. 그 말이 꽃의 아름다움을 꺽었다. 나는 꽃을 잃어 버렸다. <최초의 습격> - 고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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