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 먹는 슬픔 문학과지성 시인선 256
유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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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다치지 않을 만큼 철망을 씌우고
그는 감옥에서 쳇바퀴를 돌고 있다

보이잖는 푸른 불꽃을 먹고
제가 생각하는 꽃으로 달려가고 있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제자리인 곳,
그는 끝내 뜨거운 한숨을 토하고 있다

멍들지 않는 바람을 만드는
그의 등 뒤엔 무섭도록 고요한 공기가
그를 다스리고 있다

내가 진 온몸의 더위로 그의 감옥을 껴안아줄 때
내 얼굴의 땀 한 방울이
그의 쳇바퀴 속으로 떨어졌다

평생을 털어내도 몸에 쌓이는 먼지들,
겨울에도 그 먼지는
반투명 비닐 덮개에 곱게 싸여서
늦봄에 깨어나곤 하였다

#오래 기다리던 시집이 나왔다. 유종인 시인은 96년 등단 이후 시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이번 시집 「아껴 먹는 슬픔」(문학과지성)은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시집이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이고 내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것은 어떤 고통과 바닥에 다다른 자의 소리 없는 비명 같은 것이다. 마치,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처럼.

<선풍기>라는 시는 시집 전반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유종인 시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치지 않을 만큼'만 철망을 쓰고 '감옥에서 쳇바퀴를 돌고 있'는 선풍기, 그것은 일상 속에 함몰된 현대의 개개인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제자리인 곳' 그것이 바로 선풍기가 존재하는 공간, 선풍기의 일상이다. 그는 그곳에서 '멍들지 않는 공기'를 만들어야 하고 '그의 등 뒤엔 무섭도록 고요한 공기가/ 그를 다스리고 있다.

'무섭도록 고요한 공기라는 것은 선풍기를 선풍기이게끔 만드는 여름의 뜨거운 공기일 것이고 그것은 일상을 짓누르는 중압감과 같은 것이다. 그 중압감 속에서 선풍기는 '평생을 털어 내도 몸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 낸다. 이것은 선풍기가 계속 돌아가기 위한 동력이고 동시에 그 동력이 작용하는 모습이다.

제 몸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면서 쉼 없이 돌아가던 선풍기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반투명 비닐 덮개에 곱게 싸여서' 어느 곳엔가로 유폐된다. 이 유폐는 재생과 재작동을 전제로 하는 유폐이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잠'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시인이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겨우내 선풍기에 쌓였을 먼지일 듯 싶은데, 선풍기는 이 먼지를 '곱게' 뒤집어쓰고, '늦봄'이면 다시 깨어나'곤'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고 일상의 작동원리이다. 이 시는 그러니까 이러한 일상성에 관한, 그 일상성의 '부드러운 폭력'에 관한 알레고리이다. 선풍기라는 말을 '나'로 바꾸고, '먼지'를 '잠' 혹은 '휴식'으로 바꾸어보라. 나는 잠에서 깨어나서 아침(늦봄)으로 간다. 아니 가야만 한다. 그것이 선풍기의 운명이고 나의 운명이다. 그것이 일상이라는 것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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