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독자는 소설가의 상상력에 대하여 어디까지 관대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늘 새로운 걸 원한다. 새로 나온 옷, 신발, 음식, 가전제품 등 모두 마찬가지다. 창작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 주목을 받는다. 모든 작가들이 매번 같은 시점, 같은 배경(시간적, 공간적)을 설정하고 같은 나이, 성격의 주인공을 만들어 글을 쓴다면 과연 재미있을까? 또 아주 친숙한 사건(여주인공의 시한부 인생, 삼각관계, 권선징악, 출생의 비밀 등)들만 묶어서 갈등을 만들고 증폭시키면 독자들은 가만있을까? 물론 엔딩도 매번 해피엔딩이라고 한다면? 그건 죄악이다.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지만 드라마와 영화, 연극 같은 허구를 본다. 왜 그럴까?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고 감정이입을 해서 울고, 웃고 안타까워하며 또 답답해하며 욕까지 하기도 한다. 가장 악랄하게 나쁜 짓을 한 놈이 결말에서 능지처참 같은 극형으로 죽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바로 문학과 삶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학은 인간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다. 또 동시에 허구라는 아주 강력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허구가 실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주 논리적으로 만들어 독자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허구의 범위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소설이론에 따르면 <개연성>이 가장 기본이 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번에 읽은 하루키의 소설<어둠의 저편>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과연 이런 일이 소설이지만 가능할까? 허구와 상상력의 세계라는 걸 감안해도 문제의 부분을 수용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의 언급한 문장들을 보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인 작가에게 무슨 실례냐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또 이 필자는 문학적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내 친구들에게 그리 권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다. 물론 재미는 있다. 곳곳에서 하루키의 장점이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시간은 단 이틀. 더 정확히 말하면 오후 11시 56분에서 시작해서 다음날 오전 6시 52분까지의 기록이다. 아니다, 틀렸다. 6시 52분 후에 일어난 행동들도 서술하고 있으니 그 이후의 기록까지라고 해야 맞겠다. 대충 계산하면 불과 7시간에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문제는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시점이다. 물론 시점도 소설 안의 한 부분이지만 그 시점이 특이하다. 소설을 이루는 개연성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아사이 에리의 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렇다. 현실과 가상이 같이 존재하는 곳. 그 안에 있는 텔레비전이 연결통로가 되고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과연 작가 하루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답은 쉽게 나올 수 없기에 일단 넘어가겠다.

 

마리는 미운 오리새끼가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바로 아사이 에리와 그녀의 동생 아사이 마리의 이야기이다. 탁구공이 랠리하는 것처럼 마리와 에리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이어지고 있다.

먼저 동생이야기를 해보자. 마리는 가을의 끝자락 늦은 밤 혼자 도시의 유흥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겨우 대학 1학년인 열아홉이다. <데니스>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꺼운 책을 읽고 있다. 마리는 책을 읽고 있지만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장소에 다카하시가 우연히 들어온다. 이 다카하시는 바로 마리의 언니인 아사이 에리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하지만 고교 동창인 둘은 그리 친하지 않다. 다카하시는 그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 반면 에리는 중학교 시절부터 잡지표지 모델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2년 전 어느 수영장에서 에리와 에리의 남자친구 또 다카하시와 마리(당시 고등학교 2학년), 이렇게 넷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언니도 예쁘지만 동생 마리의 외모도 그리 나쁘지 않다.(카오루와 다카하시 등 모두 마리에게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예쁜 얼굴을 몰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워낙 언니가 뛰어난 미인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난 둘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다카하시는 대학생 3학년(이건 필자의 추측)이며 근처 빌딩 지하 연습실에서 악기를 연주한다. 밴드의 한 맴버인 그는 트롬본을 연주한다. 아쉽게도 오늘밤이 그의 마지막 연주가 될 것이라고 한다. 다카하시는 밥을 먹고 둘은 그 동안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다카하시는 식사를 끝내고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고 자리를 뜬다. 이후에 알파빌 러브호텔 지배인이 마리를 찾아온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 그녀는 바로 <카오루>, 전직 여자 프로레슬러였다. 카오루는 중국어 통역을 부탁하고 마리는 승낙한다. 둘은 레스토랑을 나가고 나이 어린 중국인을 도와준다. 한 남자가 일파빌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기 위해 여자를 불렀는데 뜻하지 않게 생리가 시작되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시와가라>이며 혼자 사무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손보고 있었다. 시와가라는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자 <궈돈리(중국인 피해 여성)>를 폭행하고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빼앗는다. 속옷까지 전부 가져갔다. 이 남자는 샐러리맨이고 집에 부인도 있는 남자다. 아이가 있는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카오루의 노력으로 카메라에 찍힌 시와가라의 얼굴을 알아냈고 그 지역에서 매춘을 관리하는 중국인 조직원에게 넘겼다.

 

 

   마리는 카오루와 헤어지고 <스카이락>이란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점장은 카오루와 친분이 있다. 다시 다카하시가 마리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온다. 카오루가 다카하시에게 지금 마리는 그곳에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이 없는 마리이기에 다카하시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음악은 그만두고 법률에 관련된 일을 공부하겠다고 한다. 음악은 좋아하지만 밥을 먹고 살 수 없기에, 또 이번 4월과 6월에 재판소에 가서 무언가를 느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죄인이라고 해도 법이나 제도에 따른 공권력의 힘은 엄청나게 대단하다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깊은 해저에 사는 문어를 가지고 예를 들었다. 또한 자신도 언제든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은 스카이락을 나오고 산책을 한다. 마리는 카오루에게 듣지 못한 대답을 다카하시에게 요구했다. 다카하시는 과거에 알파빌에서 한 여성과 관계를 가졌고 나중에 계산할 때 돈이 모자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학생증을 맡겼고 다음날 돈을 가지고 학생증을 찾으러 갈 때 카오루에게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고 그렇게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이 소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호감을 느낀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같이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교환학생 자격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주 긴 편지를 쓰겠다고 하며 헤어진다. 마리의 이야기는 큰 문제점이 없다. 그냥 소설이다. 그것도 하루키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소설이다.

 

 

완벽한 백설공주가 되는 과정

 

 

   그렇다면 이제 다른 이야기 아사이 에리의 부분을 살펴보자. 이 부분은 여러 번 읽어야 했다. 쉽게 읽을 수도 없고 이론 책을 펼쳐가며 읽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 어렵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대충 넘길 수는 없다. 물론 전체를 다 분석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접근했다.

 

 

    언니 에리는 이제 앞으로 잠을 자겠다고 가족들에게 통보하고 두 달이 넘도록 잠을 자고 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우선 잡지나 방송출연 및 광고 일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약을 너무 많이 먹어 정신의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만사가 귀찮아서 그냥 휴식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무게를 두고 살펴봐야 하는 것은 에리의 방에 있는 시선이다. 이 방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하고 그 연결점이 바로 텔레비전이다. 분명 텔레비전의 코드는 빠져있다. 그렇다면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하루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텔레비전이 현실과 가상을 연결해주는 도구로 설정했다. 잠든 에리를 살펴보는 다른 존재가 존재한다. 바로 <얼굴 없는 남자>다. 이 남자가 누군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잠든 에리를 가만히 바라만 본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 혹은 가면. 독자들은 이 남자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또 이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에리는 자신의 방에 있는 텔레비전 안에서도 잠들어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소설에는 그렇게 보여진다. 그리고 뒤에 가면 에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움직인다. 또 자신의 방이 아닌 걸 알고 소리도 지르고 유리를 주먹으로 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에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잠들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 원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되돌아 갈 수 없었다. 텔레비전 안에는 그 가상의 세계가 무너지고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 무질서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에리는 어디로 갔을까? 알 수 없지만 소설 후반에 다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리이야기를 하루키가 어떤 의도로 서술했는지 알 수 없다. <어둠의 저편>을 발행한 출판사에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하루키에게 전화를 걸어 또는 메일을 보내 물어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책을 읽고 살펴보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계속 잠만 자겠다고 한 것은 에리 자신이라는 점과 약을 너무 많이, 그것도 지나치게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텔레비전은 왜 현실에 존재하면서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그 가상의 세계는 아사이에리의 <무의식의 세계>가 아닐까? 에리의 꿈을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것일까? 이렇게 본다면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자세히 파고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몇 번이나 읽고 이 글을 완성하고 싶지는 않다. 인과관계를 떠나 작가 하루키의 새로운 시도라고만 정의내리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도가 과연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이 소설에서 그렇게 비중이 있었는지? 또 소설의 전개방식에서 꼭 필요했는지? 이런 질문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마지막 문장을 다 읽어도 남는 것이 의문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굳이 왜? 이런 방식으로 에리 사건의 축을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시간이 더 지나 이 소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지만 일단은 여기서 펜을 멈추기로 하겠다.

 

살짝살짝 스치고, 검은 천막에 보이는 실루엣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도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각 사건의 연결을 이어주는 하나의 가능성을 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필이다. 에리가 가상세계에서 주운 <veritech>라고 써 있는 지우개 달린 연필이다. 어쩌면 그 얼굴 없는 남자는 <시와가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작업한 사무실에서 시와가라가 그 연필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카하시와 시라가와는 같은 편의점에 있다가 나온다. 저지방의 우유 그 도구의 역할을 한다. 또 휴대폰도 그 편의점에서 각 인물들을 이어주는 비중 있는 도구로 보여진다. 알파빌의 텔레비전과 시와가라의 집에서 같이 방영된 <심해의 동물들>이란 프로도 그것이다. 같은 시간에 공간은 다르지만 같은 프로를 보며 묘하게 이어진다. 하루키는 이러한 점을 의도적을 곳곳에 배치한 것 같다. 소설 <어둠의 저편>은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소설이고 여기저기서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소설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전히 궁금한 점이 많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꽤 오랫동안 지나 이 소설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때라도 많은 부분들이 풀어지면 좋겠다. 물론 공짜는 없다. 다양한 글들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는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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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서 2017-08-2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도 별로야.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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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그 이후에 오는 것들

하루키에 대한 모독인지? 거장에 대한 심술과 반항인지?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 2017년 여름에. 푹염주의보가 여러 번 발령된 여름이고 마음과 몸이 불편한 시기에. 하지만 몸이 불편했기에 이 소설을 읽는 것이 가능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제재는 죽음과 사랑이다. 바로 주인공과 가까이 있는 인물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이와 관련 있는 존재이면서 같은 상처를 간직하면서 서로 사랑에 빠진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다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인물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먼저 죽음을 본다면 사고가 아닌 자살이다. 어쩌면 죽음은 간단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떠난 자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렇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간단하지도 않고, 쉽게 벗어 던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기즈키의 자살 원인을 알 수 없다. 남겨진 연인과 친구는 기즈키를 빼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둘의 재회는 우연이었지만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와타나베는 아픈 나오코를 걱정하고 기다리면 희망적인 미래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나오코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의 곁에 미도리가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후배인 미도리라도 없었으면 그의 방황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만나며 사랑을 하고 때론 상처를 남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지나도 아픈 상처는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고 치료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뒤에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한 발씩 나아간다. 시간에 흐림에 역행할 수 없는 존재들. 바로 그 안에 모든 걸 담으며 살아간다.

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바로 와타나베이다. 이 남자주인공은 명석하고 다정하다. 음악(고전)을 듣는 걸 좋아하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밝히고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고 솔직하게 말을 한다. 물론 상대방이 귀찮게 나올 것 같으면 미리 상황을 파악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같은 대학의 동성 친구들과 선후배들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유지시키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나가사와의 관계는 예외다. 이 와타나베는 선배 나가사와를 만나면서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고등학교 동창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처럼 주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도 있고 리더쉽도 있으며 유머도 있다. 또한 똑똑하고 화술도 뛰어나지만 나가사와가 더 많은 부분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한다. 나가사와는 강하고 독단적이며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좋은 집안 출신이며 졸업 후 아무런 탈 없이 자신이 설계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갈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닮은 부분도 있지만 여성을 대하는 부분에서는 다르다. 그것이 바로 나가사와의 연인 하쓰미를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 와타나베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나오코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감싸 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많은 시간 동안을 기다리기도 한다. 또한 자신을 좋아해주는 미도리에게도 많은 부분을 배려해준다. 하지만 나가사와에게는 그런 부분을 찾기 힘들다. 먼 훗날 나가사와는 독일에서 와타나베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바로 그 내용은 하쓰미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가사와는 후회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와타나베는 바로 그 편지를 찢고 던져버린다. 그리고 나가사와에게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너무 늦게 깨달은 나가사아에게 분노를 느끼고 자살한 하쓰미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석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와타나베의 묘한 매력, 그것은 대나무 숲

작가 하루키가 이 소설을 전개시키는 방법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주인공 와타나베의 열일곱에서 스무 살이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다보니 실제 인물들이 서로 대화하고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상처, 혹은 악몽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와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끌어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구원의 첫걸음일 것이다. 물론 치유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오코는 결국 와타나베의 꿈처럼 같이 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낸 편지의 내용처럼 그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 초반에 나는 나오코가 잠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와타나베와 교제를 이어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혼자만의 동굴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안에서 죽은 언니와 과거 연인이었던 가즈키가 부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그녀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다. 모르겠다. 난 와타나베도 레이코도 아니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 나오코도 아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자신에게 남긴 꽃다운 삶을 날카롭고 서늘했던 줄에 자신의 목을 메달아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와타나베가 아미료를 나가 같이 살자고 했던 그 제안이 죽음만큼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불완전한 한 인간이라고 했다. 사실 왼전한 인간은 없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그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나오코는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와타나베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 것 같다. 하지만 환청이 들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편지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이 아픈 그녀를 더 힘들게 하고 끝내 자살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와타나베이다. 그가 주인공이기에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와타나베는 타인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알고 그 또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연인인 나오코가 요양 중에 만난 레이코 여사는 바로 첫 만남에서 그걸 느낀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공통점은 곁에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 연인의 죽음, 친한 친구의 죽음. 아니면 자살을 시도하거나 과거에 죽을 만큼 큰 고통에 빠져 아직도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은 레이코 여사의 과거다. 이런 경험은 절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성 정체성은 물론 한 여인의 자존감과 가정을 파괴하려고 했었던 행위다. 하지만 천사의 가면을 쓴 열세살 악녀(레이코 여사의 제자)의 입술과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던 레이코 여사의 몸. 그 몸 안에 자신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고 또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본능이었다. 물론 레이코 여사는 부정했고 그걸 증명해 보였다. 나오코와 관계에서도 또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만나 정을 나누고 서로의 모습이 조금씩 닮아가고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을 나누고 위로받고 하는 행위가 꼭 필요한 모습일 것이다. 그게 동성과 이성으로 꼭 나눌 수 없고 나누는 것도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그럼 그러한 관계에서 육체적인 관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소설에서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의 절정 혹은 종착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다.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후 인물의 심리상태는 변한다. 가즈키가 죽고 여자와 처음으로 관계를 나눈 와타나베는 무책임하게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일반적인 이별을 통보한다. 아니 그녀에게서 도망가고 더 나아가 고향에서 달아난다. 친한 친구의 죽음에서 죄책감이나 그 보다 더 무거운 감정을 느낀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와타나베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은 그녀, 바로 나오코를 만나게 한다. 어쩌면 둘은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오코는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 소설은 달라졌을 것이다. 와타나베에게 상실의 의미를 가장 크고 알게 해주는 인물은 바로 나오코밖에 없다. 단순히 나오코가 아닌 가즈키의 죽음도 상기시킬 것이다. 친구과 연인을 둘 다 잃어버린 스무살의 청년에게 더 큰 시련이 또 있을까?

소설 중반으로 들어가면 와타나베에게는 나오코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감정을 모르고 부정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상실, 그리고 결핍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상대의 부재를 통해 누구보다 절실히 상대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는 바로 미도리다. 그리고 나오코와 관계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기다려 달라고 한다. 와타나베는 갑자스럽게 나오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와타나베는 기숙사를 나와 자신이 지낼 수 있는 안식처를 구하게 된다. 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던 중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오코의 죽음 그 후에 떠나는 여행. 아니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 길을 나서는 도피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탈출인 것이다. 더 자세히 와타나베의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안에는 이 주인공이 짧은 인생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기억이 아닌 것이다. 즉 평범한 기억이 아닌 것이다. 혼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다시 누군가와 이뤄야 하는 사랑이 있었고 같은 상처를 나누고 같은 온도의 눈물을 흘려주었던 사람이 있기에 와타나베는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죽은 자들이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나눈 관계는 바로 레이코다 이 문단에서는 여사라는 호칭은 쓰지 않을 것이다. 매력이 넘치는 그녀에게 여사라는 호칭은 실례일 수도 있다. 레이코는 나이를 떠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그녀는 모성애가 강하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껴준다는 걸 이 소설책을 덮고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충분히. 레이코는 죽은 나오코의 옷을 입고 와타나베에게 왔다. 쓸쓸한 장레식을 위로하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많은 곡을 연주한다. 그리고 연주해준다. 나오코에게. 두 사람만의 방식으로 다른 세상으로 멀리 떠난 나오코를 다시 떠나보낸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고 둘은 같은 육체를 나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히 쾌락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하루키가 마지막에 어떤 의미로 둘의 관계를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소설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다. 다양한 독자들이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수학공식으로 답을 찾아낼 수도 없고 독자들의 상상력이 더 다양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은 와타나베의 탓이 아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희망을 나누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단순히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편지에 쓴 것도 아니다. 나를 대신해 아픈 나오코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것과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에게 진심어린 충고와 걱정을 해줘서 고맙다는 등 여러 가지 속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와타나베와 레이코. 레이코와 와타나베 이 둘은 단순히 친구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편히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까지 공유했다. 그것은 평범한 신뢰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두 사람이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1989년에 소개된 이 소설은 분명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을 가진 소설이다. 각 인물이 가진 경험. 때로는 흥미로웠고 의아하기도 했으면 아쉽기도 했다. 속으로 와타나베 당장 나오코에게 달려가.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깊게 빠져들어 안타까움도 느끼게 했다. 전체적으로 충분히 공감을 이끌어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이가 있다면 당장 내 가방에 있는 책을 꺼내 빌려줄 용의가 있다. 물론 돌려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대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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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서 2017-08-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엉망이군요. 맞춤법도 틀리고 띄어스기도 엉망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