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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나 - 개혁가 프란치스코와 한국
김근수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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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저자 김근수는 엘살바도르의 존소브리노에게서 수학한 해방신학자이다. 그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에 대해 적은 책이다. 저자가 밝히기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두가지이다. 첫째, 개혁교황의 탄생이 가능하게 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1-3). 둘째, 한국가톨릭교회의 위기에 대한 관심이다 (4).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소개로 시작해서, 20세기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소개하며, 해방신학으로의 방향을 전하며 이 책을 마친다.

 


2013년 새로운 교황선출이 전세계적 뉴스가 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나는 보스톤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어서, 예수회 출신, 게다가 남미출신 교황의 선출로 인한 흥분을 제대로 경험했다. 선출전까지 수업시간에 교수님들은 누가 선출될것인지, 콘클라베Conclave (교황선출을 위한 추기경들의 비밀회의)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소개했으며, 그가 선출되고나자 방송국에서 예수회 신학교수들과 인터뷰하려고 전화들이 쇄도해서 연구를 못하겠다는 말씀도 들었다. 그 중 그가 남미 출신이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다는 데에서 그가 가난한 자들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내보일 것이라고 예상하시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리고 작년 여름 <찬미 받으소서>로 환경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내 놓으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사역을 해나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1장에서 김근수는 해방신학자로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 일생을 소개한다. 그가 선택한 세 열쇠말은 성 프란치스코’ ‘예수회’ ‘아르헨티나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노동자의 아들은 베르골리오 (프란치스코교황의 본명) 2차대전 이후 아르헨티나 및 남미에 만연했던 빈부격차를 보며 자랐으리라. 또한 교황이 이름을 빌려온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화에 대한 강조,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에 주목한다. 그가 속한 예수회는 이제는 유명해졌다시피 가톨릭교회안에서 개혁적 분파에 속하며, 선교와 교육에 지대한 관심으로 특징지워진다.


 

*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환경의 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자연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자였다. 베르골리오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쓴 것은 평화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공동의 집인 지구환경에 대한 보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되고 나서 나온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환경위기에 대한 가톨릭적 대답인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Laudato Si이다.


 

프란치스코 자신은 해방신학자가 아니지만, 그의 출생이나 신학적 영향, 강조, 관심은 그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제, 군사독재에 맞선 사제로 불리기에 충분할것이다. 그는 교황으로서 기록한 문헌들 <찬미받으소서> <복음의 기쁨>에서 계속해서 가난한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해방신학의 핵심 가치를 강조했으며, 신자유주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2장과 3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타나게 된 직접 (2), 역사적 (3)인 배경을 다룬다.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베네딕토 16세의 자진사임과 그에 이어진 교황선거과정을 살펴본다. 그 자신은 보수적인 인물로 알려졌지만, 베네딕토 16세 역시 종교간 대화라는 측면에서는 개혁적인 노력을 기울인 사람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김근수는 이 사임 사건과 베네딕토 16세의 말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라는 통찰을 끌어낸다. 다시 말해, 교황자리라는 것도 결국 사임가능한 인간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이 사건이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콘클라베과정에서 주도적인 관심사는 개혁, 그리고 복음 선포의 강화이었고 그 분위기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었다고 말한다. 2장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 선거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라면 주의깊게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베네딕토 16세의 선출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 그리고 그 간의 로마 가톨릭의 분위기 변화 등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잘 기술해 놓았다.

 


3장에서는 좀 더 범위를 넓혀서 가톨릭교회안에서의 개혁적 전통을 (그리고 보수화의 움직임도 함께) – 레오 13, 요한 23세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어 프란치스코까지 역사적으로 소개한다. 지난 근 백년넘는 시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담은 이 장은 외부자의 입장에서 가톨릭교회와 가톨릭사회교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개신교 개혁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열린 트렌트 공의회 이후로 가톨릭 교회는 계속해서 보수화, 전통화 되어 왔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891년 레오 13세가 공포한 <새로운 사태>로부터 시작된 개혁적 흐름이다. 이 문서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태동하던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적 반응이 처음 등장하게 된다.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이런 개혁적인 움직임은 요한 23세의 선출과 그가 주도해 1964년부터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이어진다. 지금 시대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이들에게서, 2차 바티칸공의회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을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상당한 분량을 들여 공의회를 소개한 것에 감사하다.

 


안타깝게 그 이후 가톨릭교회는 내부적으로 다시 보수화됨으로써 개혁의 동력이 실종된 (오히려 후퇴한) 시기가 이어졌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바오로 6, 베네딕트 16세 아래에서의 35년이다. 해방신학자인 김근수는 이시기 교황청이 해방신학을 억압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해방신학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해주고 있다 (김근수는 교황은 온건 해방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아파레시다 문헌>에 대한 분석도 해주고 있다.

 


1-3장까지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를 낳은 가톨릭교회의 개혁적 전통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었다면, 4장에서는 이제 한국의 해방신학자 김근수의 고유한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고고히 개혁적으로 흘러온 세계 가톨릭교회의 흐름에 동떨어져 마치 갈라파고스 섬과 같이 되어버린 한국 가톨릭교회에, 프란치스코 현상은 어떠한 질문을 던질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불평등의 증대, 가난한자들에 대한 무관심 같은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성직자중심주의, 여성사제, 종교간 대화 등 교회내부의 문제도 검토하고 있다. 해방신학자로서의 고유한 목소리는, ‘가난한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라는 표현들에서 잘 드러난다. 어정쩡한 중간의 포지션이 아니라 편드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이들이 신과 독대할수 있다고 교회내의 민주화를 강조할 때는, 기존의 경직된 가톨릭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오히려 더 경직화되고 위계화 되어버린 개신교교회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톨릭의 자기 혁신 노력으로 김근수가 제안하는 것은 신자와 함께 하는 제3차 공의회의 개막이다. 교황이나 주교, 신학자들만의 공의회가 아닌 사제와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공의회를 말이다. 저자는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교회, 민주화된 교회가 될 것이라 짐작한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천주교회의 과제를 검토하며 글을 마치고 있다.  

 


엘살바도르의 해방신학자 존 소브리노에게서 배운 제자가 쓴 글 답게 책 전체에 해방신학적 관점이 선명하다. 그리고 그런 관점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를 이해하는데 아주 적절한 렌즈를 제공한다. 그의 말대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을 해방신학자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이나 설교, 문건, 그리고 행보들을 보면 온건해방신학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나역시 생각한다.

 


한가지 아쉬운 (그러나 이해할만한) 것은,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는 렌즈로 환경을 추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이름을 차용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연의 성인이다. ,,별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그의 찬송시 Laudato Si는 작년에 나온 교황 회칙의 제목이기도 하다. 물론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는 이 책이 나오고 일년 뒤에 나온 것이다. 다만, 그의 이름 선택에서 환경이라는 힌트를 얻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따른다. 해방신학과 환경보전은 따로 떨어진 이유가 아닐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가난한자들이 가장 먼저 경험한다는 것은 가톨릭사회교리에서 꾸준히 언급되어온 가르침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한다는 것은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프란치스코 성인식으로 사고하자면, 자연과 기후, 그안에서 멸종되는 동식물 종들은 우리의 가장 약한 형제들이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해야 한다. 해방신학과 환경윤리는 만날수 있을까? 일단 프란치스코교황은 그의 회직에서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해방신학자 김근수가 이 작업을 이어서 둘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책을 한권 내주었으면 좋겠다.  

 

*http://news.kyobobook.co.kr/people/writerView.ink?sntn_id=9198 교보문고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내포하는 세번째 의미로 "피조물의 보호"를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쉬운 점과는 별개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소개와,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적 전통에 대한 아주 좋은 소개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제2차 바티칸의 개혁적 가르침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도들에게 충분히 가르쳐지고 있는지 의심되는 상황이라면, 이책의 적실성은 한층 더할 것이다. 또한 외부자에게도 가톨릭사회교리와 해방신학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된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대해서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애매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저자는 표현도 선명하고 입장도 유보적이지 않다. 가톨릭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쉽사리 판단하기 일쑤인 개신교도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나역시도 개신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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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엄마만 느끼는 육아감정 - 나도 몰랐던 감정 때문에 상처받은 엄마들을 위한 치유 심리서
정우열 지음 / 팬덤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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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말에 아기가 나온다. 준비하면서 하루하루 읽어나가고 있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라 술술 읽힌다. 육아를 담당하는 아빠도 느끼는 감정일것이다. 사실 저자도 남성이다. 1독 한 후에라도 계속해서 집어들만한 책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게 아니야˝라는 깨달음이 얼마나 큰것일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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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고통
스티븐 체리 지음, 송연수 옮김 / 황소자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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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특이 하다. <용서라는 고통> 이라니. 용서는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 않나? 특히 기독교에서는 신적 용서가 우리에게 먼저 주어졌기에, 그에 대한 반응적인 의무로서 내게 가해진 잘못 역시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의 특권이며, 성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고통이라니. 물론 이해할 만하다. 가해자는 뉘우치지 않는데 용서하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설령 뉘우친다고 해도, 피해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상실에 대한 슬픔과, 가해자에 대한 증오라는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 한다. 고통이 맞다. 그럼 고통이기에 용서를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는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걸어가야 할 길이다. 다만, 손쉽게 의무처럼, 기계적으로 용서를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엄청난 고통이기에, 누구나 마땅히 해야하는 것처럼 피해자에게 요구할 수 없다. 장별로 요약을 하면서, 용서가 얼마나 고통인지를 함께 살펴보자.

1손바닥 뒤집듯 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표현으로 저자는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긴 시간의 투쟁과 싸움을 통해서 겨우, 그때에도 완전한 보장은 할 수 없는,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용서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나서 저자는 용서의 여러 차원들을 구분한다. 신적 용서, 인간의 용서, 자기 용서, 그리고 용서와 사면의 구분. 다음으로 저자는 자신이 용서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사례연구가 아니라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용서라는 것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사의 형태를 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야기가 그러하듯 용서는 불가사의하며,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고 예측불가하기 때문이다. 용서 과정은 기계적인 공식이 아니다.

2 “상처의 황무지.” 사람 사이의 신뢰를 파괴하는 상처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한 사람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파괴적인 상처까지. 저자는 이것을 4가지로 구분한다: 사소한 상처, 실제적 상처, 심각한 상처, 그리고 파괴적 상처.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상처에 대해서는 이렇게 다양한 묘사를 하면서 용서는 단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한다. 따라서 용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에 따라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번째 단계의 상처 같은 경우에는 용서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하지만, 파괴적인 극심한 상처의 경우에는 용서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분량에 있어서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저자는 이 장에서 용서와 의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3 "고문 그후" 에서 저자는 두가지 글 - "철도원이야기" "해바라기"를 통해서 고문과 억압당한 상황에 있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다룬다. 간략히 말하면 "철도원이야기"는 제2차 대전 중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철길노동자로 일하며 고문을 당했던 미국인의 이야기이다. 그가 얼마나 긴 시간과 또 수많은 우연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용서의 길로 결국에 가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해바라기"는 나치포로수용서에서 잡혀 있던 한 유태인이 죽어가던 독일군 장교의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요청에 침묵으로 거절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 침묵이 그 유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존하는, 또 정당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장에서 저자의 주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다음의 문장이다: "중요한 것은 용서가 무턱대고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특히 신앙인들에게 용서는 의무처럼 되어버렸다. 시간적인, 감정적인 고려 없이 무조건 해야 하는 차가운 객관적인 명령으로 다가온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전도연 분)이 신앙의 힘으로 자식을 잃은 아픔을 극복하며 내린 큰 결단이 바로 살인자를 용서하겠다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종교적 신앙 체계안에서 명령처럼 다가오는지 볼 수 있다.

이런 의무로서의 용서라는 부담 외에도, 피해자는 한가지 짐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용서가 개인적인 덕목도 아니며,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저자가 "철도원이야기"를 분석하며 보여주듯이 용서에는 수많은 외부적 요인들이 작동한다. 작동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적 덕목보다도 훨씬 더 결정적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다시 인용하지만, "용서가 무턱대고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해지는 것이다.

4 "용서할 의무?"는 성경이 용서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지 검토한다. 성경의 많은 절들이 마치 우리가 신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당위나 시험처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지 못하는 처벌을 받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의 견해를 빌어서 저자는 우리의 사고가 용서의 윤리에서 용서의 정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에베소 4:33)은 그의 용서를 받기 위해 (의무) 가 아니라 그가 용서하셨기에 (정신), 용서해야 한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용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용서할 수 없을 때에도 무조건 용서하라가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사랑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저자는 용서의 의무에서 용서의 정신, 성향, 마음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5분노, 분개, 원한에서는 이 각각의 감정들에 대한 양면적인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우선 분노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노는 동시에 위험한 감정일 수도 있기에 용기를 가지고 이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분노가 끓어오르는 일상적인 화라면,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지는 감정이라면, 분개는 그 분노가 마음속에 자리잡은 감정이다. 이 감정 역시, 정의라는 기준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제공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결국에는 분개의 주체와 그 주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분개가 더 정착되고 사람 안에 뿌리내리게 되면 그것을 원한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한 사람의 생존기제로 작동한다는 면에서 어쩔 수 없는 기능을 하지만, 결국에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면에서 그 작용이 이중적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이 세가지 긍정적이며 또 부정적인 감정들이 용서라는 것과 궁극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원한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원한이 제 할 일을 다하고 나면 가만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6살인 그 후에서는 살인을 경험한 두가지 다른 이야기를 다룬다. 하나는 북아일랜드에서 있었던 한 폭파사건의 생존자의 말과 그로 인해 촉발된 논쟁이다. 윌슨이라는 이름의 생존자는 폭발로 자신의 딸을 잃고 그 자신도 테러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건 직후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들에 대한 어떠한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함으로서 성급한 용서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당시 북아일랜드의 개신교들에게 일반적인 개념은, 뉘우침이 있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윌슨의 말은, 가해자의 뉘우침도 없는 맥락에서, 성급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용서라는 것이 뉘우침에 대한 반응 이라고만, 즉 무언가 선행되어야만 진행되는 거래로서 본다면, 피해자들에게서 선택권/자율성이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윌슨의 말 중에서 그가 용서가 아니라 원한이 없다” “분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윌슨은 적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아파한 것을 우선시 했으며, 성급히 최종적인 용서를 선포하는 대신에 신중한 방식으로 용서의 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또한 여동생을 연쇄살인범에게 잃고서 용서 해야겠다는 초기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살의적 분노를 경험했던, 그러나 긴 여정의 결국에는 그 슬픔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가해자의 마음에 공감하게 되는 메리언이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이야기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는데서 드러난 시적poetic 특성 때문이다. 시에 드러나는 창조성과 상상력은 우리가 규범과 규칙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이는 앞장들에서부터 계속반복되는 저자의 강조와 맥을 같이 한다. 용서라는 것은 수많은 우연적이며 외부적인 요인들과, 개인의 성격 등 여러 요인들의 합동 작용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과정 같은 것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강조한다. 다른 말로 신비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한 사람의 영웅적인 용서 행위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의무나 규범, 도덕적 모델이 될 수가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7영성으로서의 용서.” 이 장에서 저자는 용서라는 관점에서 예수사역의 클라이막스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십자가 죽음, 부활, 최후의 만찬을 살펴본다.  특히 저자는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끝없는 뉘우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인간적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간의 갈등과 그에 대한 끝없는 뉘우침으로 말이다. 용서의 정신은 자신을 포기하고 남을 향하는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그에 이르는 길은 예수가 경험했듯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용서라는 것이 절대로 가벼울 수 없다는 것이며, 반복해서 그것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인지를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지향성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8용서자 신드롬에서는 용서를 대하는 사람들의 두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반응을 살펴본다. 첫째는 용서 부추기기이다. 예를 들자면, 피해자들이 심리적으로 피해사건을 극복하려면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됨으로써, 마치 신처럼 용서를 베풂으로서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고 말이다. 용서부추기기가 특별히 위험한 상황은 가해행위가 현재 진행형인경우이다. 그럴 때 용서는 미덕도 아니며, 피해자에게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둘째 반응은 용서자 신드롬이다. 첫째 반응이 피해자 주변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둘째 반응은 피해자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에게, 때로는 타인들에게 훌륭한 용서자로 비취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우리가 용서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두 극단적인 반응과는 구분되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복되어서 나타나지만, 용서는 느리고 깊고 예측불가하며 수수께끼와도 같은 예민한 것이다.”   

9악마와의 대면에서는 남아공 진실화해 추진과정을 기록한 책인 <그날 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를 통해서 가해자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부담스러운 정서적 상태를 고찰해본다. 이 책의 저자인 품라 고보도-마디키젤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악행의 총책임자격인 유진 드 콕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다. 문제는 대화가 진행되면서 저자가 드콕에 대해서 공감이라는 정서를 느끼게 되면서 발생한다. 뉘우친 사람이라지만, 어떻게 악마와 공감할 수 있는가? 나도 잔악한 가해자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이것을 그녀는 달갑지 않은 공감이라고 말한다. 용서과정에서 필수적일 가해자와의 공감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시간을 들여 묘사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공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선물로서 건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강조하지만 치유로 가기까지의 여정은 고통이다.”

10다시 상상하는 용서.” 8장에서 그가 용서를 예측불가한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정형화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장에서는 질 스코트를 인용해서 라고 말했고, 자크 데리다를 인용해 미친짓이라고 말한다. 용서가 시적이며 심지어 미친 행동과도 같다면, 그것은 창조성을 지닌 개인이 할 수 있는 관대한 신뢰의 모험이지, 모두에게 짜 맞춘듯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용서가 과정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통제가 가능하며, 끝이 명확하게 상정되는 과정일수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용서의 메타포는 전형이 아닌 지도이다. 과정이나 모델처럼 정형화된 것이 아닌, 어렴풋한 틀로서 지도로, 그리고 그 위에서 용서라는 공감의 강을 건너는 모험으로 말이다.

11용서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저자가 계속해서 용서 그 자체와 구분하는 단어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용서는 너무 빠르며, 힘들다. 그래서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마음을 위해서는 네가지 자질이 있어야 한다: 공감, 미래 지향성, 믿음, 정의감이다. 정의감이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과연 용서할만한 부당한 일인가 하는 기본적인 판단을 한다. 또한 용서자는 선은 악보다 강하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다. 저자는 가장 기본적인 자질로서 공감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가해자의 뉘우침보다 우선된다고 본다. 공감을 통해서만 가해자의 현실을 바로보고 자신의 분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장인 현자의 선물은 예수탄생이야기에 세가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 동방박사의 이야기에서, 황금 몰약 유향이라는 메타포를 빌려 용서에 필요한 자질로 제시한다. 앞 장에서 제시된 네가지 자질은 피해자쪽에서의 자질이라면, 이 세가지는 피해자를 보살피고 돌보는데 필수적인 자질이다.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황금은 공감의지, 몰약은 고통을 다스리는 연고, 유향은 기도이다.

우리주변에서는 끊이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미디어나 주변인들은 그럴 때마다 용서 하는 피해자들을 모델로 삼으면서, 마치 그들을 따라야할 모범으로서 삼는다. 즉각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용서라는 의무가 피해자들에게 있는양, 암묵적인 눈치를 주는 것도 미디어를 통해서 경험한다. 이 책은 이런 사고방식이 어떤 역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설명해주었다. 게다가 용서란 것을 개인의 덕성이나 품성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얼마나 피해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지우는지 지적한 점은 훌륭했다. 트라우마와 회복과정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 회복과정에서 개인의 도덕적 성품보다는 개인 외적인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작동한다고 한다.

용서라는 고통이라고 한글 제목을 붙였지만 (그리고 나는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Healing Agony이다. 직역하자면 "치유하는 고통"정도가 되려나? 용서란 것은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그 상처를 치료해나가는, 그렇기에 걸어가야 하지만, 너무나 힘든 여정이다. 이 책이 끝까지 놓치지 않고 가져가는 긴장은 용서의 고통과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너무 쉽게 당위로 기울지 않고, 동시에 포기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용서라는 여정의 신비를 잘 설명해 나간다. 종교인 뿐 아니라 누구라도, 용서라는 가치를 보존하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그 고통스런 여정에 눈을 돌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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