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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종수.강희용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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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탄생>  한종수 강희영 저


내가 기억하는 한 강남은 늘 한국의 중심이었고, 권력이었다. 자라면서는 8학군이라는 말로, 노량진에서 재수할 시절에는 대치동 학원가를 통해서, 대학에 가서는 강남에서 온 아이들을 보면서, 또 더 나이가 들어서는 강남이란 단어 뒤에 있는 금융, 부동산, 정치 권력을 뉴스를 통해서 보게 되면서 이 특정한 지역이 한국의 현실적인 중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원순시장이 처음 서울시장후보로 나왔을 때 강남 아주머니들의 네이버밴드를 통해서 전해지는 흑색선전을 보면서 이 지역의 선명한 정치적 색깔을 보게 된 기억이 있다. 또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강남 1970” 그리고 최근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를 보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서울의 개발 시대를 일부나마 보게 된다.


이 책은 강남이 영동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지금의 강남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도시개발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두 저자의 정확한 배경은 모르겠지만, 추천사에 언급된 말들과, 책 안에 있는 상당히 자세한 자료들을 미루어 이 분야의 상당한 전문가인듯 하다.


1강남 개발이 시작되다에서는 개발 이전의 강남부터 개발초기까지의 강남의 역사를 살핀다. 이 책이 밝히는 바 강남의 본격적인 개발은 제 3한강교인 한남대교의 건설(1969)로부터 시작된다. 이 다리의 건설을 통해서 강북에서 본격적으로 강남으로의 이동이 손쉬워지고, 강남은 1970년 전구간이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강북과 지방을 연결하는 지점이 된다. 정부시책으로 시행된 수방 산업을 통해서 강남의 대규모 토지에 아파트들이 자리잡을 기반이 마련된다. 또한 정부의 지원과 강요로 강북의 명문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되는 것도, 그리고 후에 8학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교육 권력이 형성 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2, 더 커지는 강남에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강남이 폭발적인 성장 뿐 아니라 명실상부 서울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는 과정을 그려준다. 이 시기에 잠실도 강남으로 편입되는 등 강남은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이때 이미 강북의 종로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과, 영등포 도심에 이어 강남을 서울의 세번째 핵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안이 나오게 된다. 흔히 강남이라고 생각할 때 머리에 떠오르지 않던, 잠실, 코엑스, 남부순환로쪽까지 확장되어 포함되는 것이 바로 이 시기인 것이다. 저자들은 이시기에 분당까지 사실상 강남이 확대되어 나간다고 본다. 2부에서는 또한 강남의 얼굴인 소위 부촌들 압구정, 서초동, 청담동 - 을 살핀다. 폭탄주나 룸살롱 문화를 다루는 장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핀트에서 벗어났다는 느낌도 받는다.


역사적인 고찰은 2부에서 마무리하고 3강남들에서는 이제 서울 안에 있는 다른 강남들을 살핀다. 강남의 개발 역사와 여러모로 비슷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또다른 강남인 여의도, 단순 주거지역으로만 개발되어 강북의 실패한 강남노원, 강서의 성공한 강남인 목동들 말이다. 이 책의 결론격인 짧은 마지막 장인 15장에서는 강남의 영향을 살피며 이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먼저, 흥미로운 정보로 가득 찬 책이다. 서울에 이십년 가까이 살면서 그냥 지나치던 지역들과 지명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왜 강남에 영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은지, 또 왜 노량진에 강남 교회가 있는지.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왜 북쪽으로 창을 그렇게 정신없이 만들어 놨는지,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도로는 왜 그렇게 넓고 휑한지 등등. 서울에 처음 이사 와서 왜 남대문이 내가 살던 곳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지 의아했던 걸 떠올리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서울에 대한, 특히 강남에 대한 아주 좋은 설명서가 될 것 같다.


둘째, 좋은 근현대사 책이다. 물론, 한국의, 서울의, 전체를 개괄한 역사책이라는 뜻은 아니다. 특정 지역인 강남, 게다가 개발 역사에 집중한 책이다. 하지만, 강남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핵심적인 위치와, 근현대사에서 개발이란 단어의 무게감을 생각해보자. 강남을, 개발에만 집중해서 보려고 했지만, 군데군데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조망이 빠질 수가 없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고, 아파트, 도심, 도로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저자들의 말마따나 강남은 늘 확장해왔고, 비 강남은 늘 강남을 동경하거나 거기에 편입되기를 희망해왔지 않은가.


강남스타일에 대한 다소 피상적인 분석과 강남을 둘러싼 여러 문화현상에 대한 다소 뜬금없는 소희같은 몇 부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그리고 저자들이 인정하듯이 강남의 미래에 대한 고찰은 생략되어 있지만, 위에 언급한 두가지와 또 다른 여러가지 장점들이 작은 아쉬움들을 훨씬 더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뉴욕, 엘에이, , 런던, 도쿄의 역사며 건물들의 이야기들을 더 잘 알고, 그 이야기들이 더 풍부하고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이 책이 내 사고의 방향을 조금 바꿔놓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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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
스콧 라이트 지음, 옥타비오 듀란 사진, 김근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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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스카 로메로_스캇라이트저 김근수역


2013년 봄 엘살바도르에 열흘간 방문했었다. 다니던 대학원에서 가톨릭 사회교리와 중미의 맥락에서 교회의 사회참여등에 관해서 현장학습으로 다녀왔던 것이다. 주로 방문했던 곳들이, 1989년 중앙아메리카대학에서 군부에 의해서 6명의 예수회 신부들이 살해당한 현장, 농민들이 학살당했던 지역,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사역했고, 1980년 살해당한 성당등이었다


중미의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의 현대사는 많은 부분 남한과 유사한 점들이 있다. 식민지시절과 군부독재를 경험한 어느 나라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정치적 억압들. 그렇게 어렵게 획득한 민주화이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구습과 해결되지 않은 계층들간의 갈등. 기독교사회윤리를 공부하는 내게 가장 관심있게 다가왔던 것은 이런 복잡하고 격변하는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위치였다.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신앙을 고백하는 엘살바도르에서 교회는 군부에 대해서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 오스카 로메로와 순교한 여러 사제들처럼 정의의 편에서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어준 경우도 있겠으나, 교회의 전반적인 묵인과 동조없이 군부는 그렇게 오래 또 광범위하게 힘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 <<오스카 로메로>>는 한국기독교에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인생과 그의 회개과정을 소개한 전기이다. 역자는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신학의 대가이자 6인의 예수회 사제 살해사건의 생존자 혼 소브리노에게서 배운 김근수 교수다. ‘가톨릭 프레스의 편집인이기도 한 그는 최근 여러 책들, 기사, 인터뷰등으로 해방신학, 혼 소브리노,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를 한국에 활발히 소개하고 있다. 해당 내용에 정통한지라 전문적인 내용 전달에 충실한 것은 당연하고 문체도 매끄러워 가독성이 높다. 첨언하자면, 원서의 제목은 "Oscar Romero and the Communion of the Saints" 우리 말로 옮기면 "오스카 로메로와 성인의 통공." 개신교적으로 바꾸자면, "오스카 로메로와 성도의 교통" 정도가 될 것이다. 성인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통이라는 신학적 주제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가톨릭신학자인 엘리자베스 존슨의 설명을 참고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43개 정도의 짤막짤막한 (e-book으로 읽은 것이라 지면으로 몇 페이지씩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장들로 이뤄졌다. 각 장들도 그렇고 개별 문장들도 짧은 호흡의 글이라 다른 일들을 하는 중간중간에 편히 읽을 수 있었다. 각 장의 제목들은 다 읽고 나면 아주 선명하고 간략하게 각 장의 내용을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정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용을 읽기 전에 목차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 따라 그의 삶을 크게 구분해 보자면 1) 가난했던 어린시절, 2) 모국과 로마에서의 신학 공부, 3) 해방신학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초기 사역, 4) 산살바도르 대주교가 된 직후 한 친구의 죽음을 통한 그의 회개, 5) 회개후 그의 사역, 6) 1980년 순교로 구분될 수 있겠다.


이 책이 강조하고 있으며, 또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은 바로 오스카 로메로의 "회개"라는 부분이다. 군부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과 또 죽기직전 3년간 정부에 강력하게 비판적이었던 그의 메시지를 고려해 볼 때 그의 평생의 삶 역시 가난한자들에 대한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 바쳐졌다고 쉽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제로서의 그의 삶의 대부분은 해방신학에 비판적이었으며,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유보적이었다. 그와 마주쳤던, 또 싸웠던, 여러 사제들은 그가 주교 시절에 보였던 보수적인 입장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로메로는 군부에 무비판적이었으며, 해방신학자들의 마그나카르타와 같은 메데인 문헌을 인용하기를 꺼렸었다. 또 제 2차 바티칸의 개혁적인 의미란 사목적인 부분에 국한되었다고 보았다. 사실 그가 산살바도르 (엘살바도르의 수도)의 대주교가 된 것도 농민들이나 가난한자들의 지지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보수적 성향이 부자들과 군부의 입맛에 맞아서였다. 물론, 그가 자란 가정과 마을은 아주 가난한, 전형적인 엘살바도르인들과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신학교육과, 로마에서의 성공적인 유학, 귀국 후에도 이어진 교회내에서의 상승가도가 그로 하여금 나머지 엘살바도르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의 삶의 궤적이 이대로만 이어졌다면 로메로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이유가 없다. 성공적이고, 보수적이고, 엘리트적인 그의 삶에서 무언가 큰 격변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이 전기는 로메로가 산티아고 데 마리아 교구 주교로 일할 때가 계기였다고 본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직접 마주하게 된 것이 그에게 회개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이다. "회개의 씨앗"이라는 장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국가 방위대에 의해서 살해당한 자기 교구의 농민들, 노동자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서서히 삶의 방향전환을 시작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얼마나 깊었던지간에 이때까지 로메로는 여전히 표면적으로는 교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며, 부자나 권력가들의 마음에 호소함으로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어쨋든, 이때 시작된 회개의 씨앗은 2년뒤 자신의 친구이자 농민들의 해방투쟁에 깊이 관여했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그의 사역에 대해서는 "사목실험"장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의 죽음을 통해서 꽃을 피우게 된다. "회개의 씨앗," "사목실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순교," "문턱을 넘어," "집으로 가는 길" 등에서 이 과정을 소개한다.


로메로 자신은 회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는 변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그가 이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던지 간에, 이 사건 이후의 로메로의 메시지나 정부에 대한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이 한때 의심을 품고 바라보던 메데인 문헌을 적극적으로 대주교로서 자신의 교서와 매주 행해지던 강론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강론을 통해 가난한 자들의 투쟁에 대한 정부의 폭압적인 조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그의 회개는 구체적인 헌신이 있었으며, 그 헌신의 급진성과 강력함 때문에 그는 대주교가 된지 3년만에 자신이 미사를 집전하던 성당에서 군부가 보낸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된다


로메로의 삶을 차근차근 소개한 것에 더해 이 책의 또 한가지 장점은 후반부에서 로메로의 교서들과 강론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 신자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요 신학자로서 세상 정치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고민한 부분이 소개된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대주교로서 발행한 그의 두번째 교서를 (그는 총 4편의 교서를 발행했다) 소개 했으며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새로운 구원의 빛"은 그의 강론 내용을 옮겨놓았다.


이 책이 던지고 또 답하고자 하는 질문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실천적, 이론적). 먼저는 그의 회개와 관련된 것이다. 무엇이 부자들과 군부의 입맛에 맞던 대주교를 그들의 손에 죽게 만들었는가? 다시 말해,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정답은 선명하다. 가난한 자들과의 직접적인 만남, 그리고 친구의 죽음과의 직면이다. 정답은 간단할 수 있지만, 그 적용은 쉽지도 가볍지도 않다. 현장과는 동떨어져 말로만 교회의 중립이니 양극단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이니 하는 소리만 하는, 그리고는 자신의 삶은 던지지 않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다. 가난한자들과의 만남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두번째는 이론적인 것인데, 이 책의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그리고 그의 마지막 교서의 제목이기도한) "국가 위기에서 교회의 역할"이었다. 그를 단순히 순교자로,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던 한 개인으로서만 묘사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오스카 로메로의 회개는 단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국가의 교회를 이끄는 대표로서였다. 그의 고민은 언제나 교회론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독자로서일뿐 아니라 한 집단의 대표로서 고민했기에 사회에서 교회의 위치에 대한 그의 고민은 보다 더 깊고 무거운, 따라서 신중한 것이었을테다 (이게 그의 초기 보수적인 입장에 대한 변명이 된다면). 그는 경험을 통해서 배운 통찰을 자신의 신학적,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가톨릭 사회 교리의 프레임 안에서,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깊은 고민에 대한 단초들이 그의 교서 내용에 자주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상당히 큰 인상을 받았던, 그러나 잘 알지 못했던 한 인물에 대한 아주 좋은 소개였다. 그리고 단순한 연대기적 기술이 아니라, 선명한 두가지 촛점 (가난한 자들과의 만남을 통한 그의 회개, 그리고 교회를 두고 했던 그의 신학적 사목적 고민)으로 잘 정돈된 기술이라 더 의미가 깊다. 저자 스콧라이트는 미국인이다. 마지막 장 살아있는 말씀에서 엘살바도르인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가 중미를 넘어 미국 사회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러나 근대사에서 비슷한 역사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 오스카 로메로의 삶이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보며 읽으면 좋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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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양장본
김중미 지음, 송진헌 그림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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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고 리뷰를 남긴 <<나는 이렇게 쓴다>>를 통해 저자 김중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를 쓴 작가라고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글쓰기는 기술보다는 삶이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저자 자신이 인천 만석동의 괭이부리말에서 공부방을 하며 경험한 것을 기초로 해서 창작한 것이라고 소개가 되어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책에 대해서 수년전 많이 들어봤다. TV에서도 소개를 한적이 있고 베스트셀러라고 하여 여기저기서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게 동화였는지도 인천의 실제 어느 동네 이름을 딴 제목이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소설, 시, 동화같은 문학에는 관심이 없어서 읽어볼 생각도 못했다. 


여튼 이러한 기회로 이 책을 소개받고 난 후에 관심이 생겨 직접 읽어보게 되었다. 저자 김중미는 스스로는 글쓰기에 대해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겸손을 부렸지만, 글쓰는 솜씨가 여간이 아니다. 몰입도도 높고, 표현들이라던가, 내용의 전개가 아주 좋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경험에서 나온 글이라 생생하고 실제같은 느낌을 더 주었겠지만, 기술적인 부분도 상당하다고 느꼈다. 


동화의 배경은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이라는 판자촌이다. 내용은 동수 동준 형제, 숙자 숙희 자매, 숙자네 엄마, 명환이, 영호삼촌, 명희 선생님, 호용이와 숙자네 막내까지 한 가족같은 공동체가 형성되는 이야기이다.   

주된 인물은 숙자인듯 보이나, 두드러진 주인공은 없고 저자가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는 형식이다. 괭이부리말에서 공부방은 운영했었다는 저자의 이력을 듣고 나니 작가의 페르소나는 명희 선생님과 영호 삼촌 인듯 보인다.


엄마가 도망가고 술꾼 아빠와 함께 사는 숙자 숙희 자매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빠가 빌고빌어 엄마는 다시 돌아왔지만 이 가정이 행복해지려는 찰나 빚을 갚으려 일에 매진하던 아빠는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만다. 두 자매의 단짝 친구인 동준이는 엄마 아빠도 없이 형 동수와 함께 사는데, 이 형은 만날 본드만 하는 사고뭉치다. 어리숙해 보이는 명호라는 친구와 함께.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영호 삼촌이 동수 동준이 형제와 명호까지 거두어 살게 되면서 희한한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의 마음을 사고, 친한 숙자 숙희는 매일 이 집에 와서 밥을 같이 먹으며 공부하고, 그렇게 아이들이 쉴 지붕이 하나 만들어진다. 숙자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 영호삼촌은 초등학교 동창인 명희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동수 상담을 부탁한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명희 선생님은 이 만남을 통해서 이 마을 아이들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알게 되고,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동수를 따라서 본드를 빨던 어리숙한 명환이는 제빵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동수는 공고에 들어가고 공장에 취직한다. 이런 이상한 공동체 소문을 듣고 여기에 '맡겨진' 호용이와 새로 태어난 숙자네 막내까지 이 공동체에 합류한다. 


이 동화의 맥락과 삶의 수준은 좀 다르지만 최근에 본 JTBC 드라마 "유나의 거리"가 떠올랐다.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따뜻했던 드라마로 기억이 남아 있다. 무언가 하나씩 문제가 있고, 상처로 가득한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계기로 한 "가족"을 이루어 살게 되는 이야기.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사람들의 마음에 계속해서 공명하는 공동체라는 단어때문일 것이다. 개발이라는, IMF라는 국가의 이야기 뒷편에서 부서지고 상처 받은 아이들이 서로 엉겨 이뤄낸 공동체 이야기이다. 


가난한 마을이라고, 그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라고 저자가 그려내듯 다 이렇게 애틋하고, 순수하고, 낭만적이지 않을 것을 안다. 책으로 읽을때와 달리 내가 실제로 마을의 입구에 들어선다면 현실의 냄새는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그려낸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야기는 희망의 이야기로 읽기로 하자. 문학은 삶을 그려내는 그림일 수도 있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도구이기도 하지 않은가. 겨울 토양을 깨고 싹을 틔운 봄의 꽃들처럼, 어려운 현실이라는 삶을 비집고 일어서는 명희 선생님, 영호삼촌같은 어름들, 동수 명호 같은 형누나들, 숙자 숙희 동수 같은 아이들, 그리고 호용이와 숙자네 막내 같은 다음 세대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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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2 - 중세 철학의 전문가 박승찬 교수가 들려주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2
박승찬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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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서문을 보니 가톨릭 대학교에서 중세철학을 가르치는 박승찬 교수의 평화방송 강연 그리스도교, 서양 문화의 어머니 2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중 2권이다. 저자가 사랑한다고 밝히는 신앙의 두 거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라고 하는데, 2권에서는 아퀴나스에 대한 이야기가 압도적이다. 13개의 강좌 중에서 5개의 강좌가 아퀴나스의 신학과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중세철학사 강의가 SBS와 대학교육협의회에서 선정한 대학 100대 명강의로 선정되었다던데, 그의 다른 강연을 정리한 이 책도 역시 아주 훌륭한 대중서라고 평할 수 있겠다. 난해한 철학, 신학적 내용 정리도 간결하고, 설명을 위한 예시들도 적절해서 어렵고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중세의 이야기들이 쉽게 읽힌다. 천년도 더 된 중세의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마치 건너건너 아는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듯 독자들을 몰입하게 한다. 나는 그의 강연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이 책만 읽어도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책으로 꼼꼼하게 편집해낸 편집부의 노력도 느껴진다. 얇지 않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이틀간 정신없이 몰두해서 읽어 내려갔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 책은 13개의 강좌로 구성된다.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기술했을 1권에 이어서 이 책에서는 8세기 카를 대제 (혹은 샤를마뉴)로부터 15세기 중세말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저 14강부터 16강까지는, 카를 대제로부터 시작되는 문예부흥, 수도원의 발흥이 어떻게 중세 스콜라주의의 배경이 되는지, 그리고 스콜라철학에서 신학과 철학의 만남이, 혹은 신앙과 이성의 만남이 안셀름과 아벨라르두스라는 대표적인 인물들에 의해서 펼쳐지는지를 먼저 개괄한다. 나로서는 속죄론이라는 신학의 전문분야에서 이론적으로만 딱딱하게 접했던 두 인물을, 그들의 전체 신학적 영향을 꽤 친근하게 소개 받은 느낌이었다.


17강에서는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어느정도는 그리스도교중심적으로 읽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자기비판적으로 이슬람문화권과 서구유럽그리스도교문화권의 조우를 개괄한다. 이 장은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 어떻게 서구로 유입되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중세초기부터 중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적으로 수용한 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던 반면, 13세기 아퀴나스시대 직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서구로 소개되고 유입되는데 그 통로가 바로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구는 헬라철학의 두 기둥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슬람문화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받았던 것이다.


18강부터 20강에서는 이 만남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어떻게 이 새로운철학이 중세 기독교문화권에서, 구체적으로는 중세 대학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었고, 또 비판적으로 결국에는 수용되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21강과 22강은 아퀴나스의 성장과 교육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며 그의 대표작 <<신학대전>>3권을 중심으로 설명해준다. 이 장들에서는 아퀴나스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애정을 많이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아퀴나스의 <<신학 요강>> <<대이교도 대전>>을 라틴어에서 한글로 번역한 아퀴나스 전문가이다. 내용은 간결하고 쉽게 풀어 썼지만, 깊이가 덜 한 것은 아니다.


23강에서는 바실리카-로마네스크-고딕으로 이어지는 중세의 건축양식사를 통해서 어떻게 중세인들이 신에 대한 신앙을 건축이라는 양식을 통해서 나타내려 했는지 설명해준다. 또 단순히 신앙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그 양식들이 당대의 신학, 철학 사조와 맺는 관련성도 설명해준다. 풍부한 사진자료와 쉬운 설명 덕에 건축의 문외한인 사람도 어느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24강은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라는 두 사건을 중심으로 어떻게 중세 말기에 교황권이 세속권력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게 되며 또 몰락하게 되는지를 들려준다. 또 이 역사적 사건들이 오늘날 세속정치와 관계를 맺는 그리스도교에 던져주는 통찰은 무엇인지 고민한다.


25강은 중세말 교회가 힘을 잃게 되는 시기를 그리는데 이에 대한 교회 외적 요인들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혼란, 전쟁 을 다룬다.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에 이르게 한 흑사병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나 사회체계의 변화를,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100년 전쟁은 유럽대륙에 문화정치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개혁적 시도들과 영성에 대한 강조등 몰락해가는 그리스도교를 회복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중세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 독자, 출판사 모두 가톨릭이기에 우물에서 숭늉찾는 격일 수도 있겠지만, 중세말기의 개신교 종교개혁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약간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가톨릭내 개혁적 움직임도 비중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에필로그인 26강에서 바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 저자가 택한 주제는 서양중세사에 대한 포괄적 개론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의 조화이기에 이 아쉬움은 다른 개론서에서 달래야 할 것이다.


26강은 저자가 밝힌 이 책의 주제인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대해서 기독교 초기 교부시절부터,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 철학을 지나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다룬다. 1장에서 25장까지 한번 다뤘던 것을 요약 정리하는 장이다. 철학과 신학을 모두 공부한 저자의 이력과 관심이 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개신교신학교에서도 기독교철학사라고 하여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대한 개론격인 수업이 있는데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책에서는 온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서 아퀴나스 신학에 대한 부분 (예를 들어 발출과 귀환이라는 주제) 이 더 긍정적으로 또 자세히 다뤄지고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책에 대해서 간단히 평하자면 2차 바티칸 이후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인으로서 나는 가톨릭 교회와 그 신학에 대한 이런 개론서가 나와준 것에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든다. 단순히 피상적인 개괄이 아니라 전문적인 학자가 학문적 깊이로부터, 그 탁월한 입담으로 풀어낸 개론서라서 더욱 감사하다. 또한 단순히 맥락없는 백과사전식 역사사건과 인물들의 나열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선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들려준 이야기라서 이 이야기가 한국 가톨릭 교회와 또한 한 하나님을 신앙하는 개신교교회에 들려줄 메시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사상을 다루는 학자라면 전체적인 사상사의 손쉬운 정리를 위해서, 일반신자라면 믿는것과 아는 것의 조화로운 신앙을 위하여, 성직자들이라면 교회사의 자기비판적인 성찰을 위하여 일독을 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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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약 집을 짓는다면 - 후암동 골목 그 집 이야기
권희라.김종대 지음 / 리더스북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일단 이 책은 술술 잘 읽힌다. 가독성이 뛰어난 책이다. 영화프로듀서라는 저자의 이력때문인지 기승전결이 선명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강력하다. 집짓는 과정을 묘사하다가 자신이 배운 성찰이라던가, 집짓기에 대한 철학이 유기적으로 잘 엮여 들어가 있어서 어느새 저자와 집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발견한 저자는 상당히 꼼꼼한 사람인 듯하다. 아내가 인테리어 디자이너라지만, 건설현장에 나타나 상황을 체크하고 시공사의 일 진행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계약을 해지한 후에 공사장1층에 현장사무소를 차리고 한겨울에 현장을 직접 지키는 사람이 어디 평범한 사람이겠는가. 


이 책은 인테리어 디자이어인 아내와 영화프로듀서인 남편 둘이 부모님과 함께 살 집을 지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왜 아파트를 떠나서, 또 신도시를 떠나서 구도심인 서울 후암동에 단독 주택을 짓기 시작했는지에서 시작해서 마무리된 4층 집에서 딸아이와, 부모님과, 또 방문한 지인들과 보내는 시간과 공간의 가치에 대해서 들려준다. 


책 구성은 아주 직관적이다. 집을 짓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느낀 네가지 감정인 희, 노, 애, 락 을 주제삼아 책을 크게 4부분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각 부분은 다시 각각 2장씩의 분량으로 구성된다. 집 짓는 과정을 독자가 따라가며 그들이 느꼈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게 만든 영리한 장치이다. 아마도 남편의 영화적 구성력의 영향인듯 하다. 


먼저 기쁨이다. 누구든 전세값 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그리고 획일화된 아파트의 삶에서 벗어나서 삶이 느껴지고 활발한 구도심에서 주택을 짓는다는 생각을 한다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될 감정이 기쁨일 것이다. 게다가 옥상에서는 남산을 보며 와인한잔을 하고 1층에는 작업실겸 또 미래에는 임대를 줄 공간마져 생긴다는 기대를 한다면 기쁨 말로 달리 무얼 느끼겠는가. 저자들은 "내가 아이와 살고 싶은 집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파트는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가지고 구도심인 후암동에 땅을 산다. 그리고는 삼대가 같이 사는 4층짜리 건물을 올리기로 결정한다. 


집을 지으면 10년을 늙는다는 어른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 집을 짓기 시작하자 부푼 기대는 사라져 버리고 저자들에게도 분노의 감정이 주가된다. 원 거주자의 텃세에 공사기간이 늦춰지고, 시공사의 작업이 자신들의 설계도와 달리 관습대로 진행되는 것에 일의 진척이 늦어져 결국 한겨울 공사를 하게 된다. 어떤 작업을 해도 건축주들의 마음같지 않은 일을 보며 분노하는것 당연하다. 


나는 집짓기에 관심을 가진 후에 이 책을 읽으며, 땅콩집으로 유명한 이현욱 소장의 팟캐스트도 함께 꾸준히 들었다. 이현욱 소장은 건축사무소의 소장을 하고 있기에 건축주의 시각으로 쓰인 이 책과는 관점이 약간 다르다. 물론 둘 모두 한국에서 지극히 상품화된 아파트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면에서는 같이 할만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건축주로서 이현욱은 이 책의 저자들같은 건축주들에게는 좀 마음을 여유있게 먹고 건축가와 시공사를 더 믿으라고 말할테다. 전문가가 아무래도 비전문가인 건축주들보다는 무엇이 더 좋은지 잘 안다는 근거에서이다. 반면에 이 책의 저자들은 내가 살집이니 내 삶의 패턴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100년이 지나도 허름한 집이 아니라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집을 지으려면 더 꼼꼼하게 체크해야 할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확고한 철학과 꼼꼼함, 그리고 어느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들이라면 이현욱 소장의 말보다는 이 책의 저자들의 조언을 따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결과가 분노요, 10년치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하는 소모되는 1년이 될지라도 말이다. 


골조공사를 마치고 이제 어느정도 집의 형상을 갖춘 건축물을 앞두고는 바로 기쁨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이제 저자들은 한겨울 공사를 앞두게  된다. 게다가 시공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들이 직접 현장을 차려서 공사를 진두지휘한다. 각 단계에 맞는 업체들을 직접 선별해서 전체 공사를 이끌어 가게 된다. 수도가 동파되는 추위에도 공사를 직접하는 열정이라니. 아내가 전문가요, 남편은 출퇴근이 자유로운 영화업계 사람이라고 해도 다 설명이 되는 열정은 아니다. 이 한겨울 공사를 두고 저자는 애 라고 표현한다. 혹한기에 창문을 올리고, 이전에 부실하게 해놨던 공사들 덕분에 두번 세번 일을 해야 하는 과정이 슬픔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처음에 이 부분을 읽으며 역시 이현욱 소장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괜히 비 전문가가 너무 간섭해서 일을 이럽게 만든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실 어느정도는 저자들의 꼼꼼함이 일을 어렵게 만든것도 있을테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집짓기인데 건축주들의 스타일에 맞추지 못한 건설현장의 구조적 문제가 더 큰듯 보인다. 모두다 획일화된 아파트짓기에 최적화 된 인부들이요, 작업스케쥴이요, 자재들일테다. 그런데 기성품이 아닌 맞춤 옷을 하나 만들어 내라고 하니 만드는 업체에선 여간 성가신게 아닐것이다. 그러니 그냥 하던대로, 관습대로, 지침은 무시하고 재단하던대로 해버리게 되는 것 아닐까. 이런 무언가 기형적인 구조에서 한명이 자기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불편하다고, 내입맛에 맞는 집을 지어내라고 고집을 꺽지 않으니 10년은 더 늙는 것 아닐까? 결국 이런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관습이 깨지고, 획일화된 산업이 자극을 받게 되는것 같다. 비단 집짓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집은 저자들에게 삼대가 함께 사는집, 아이가 뛰어 놀아도 말리지 않아도 되는집, 아이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각 층을 뛰어나니며 해소할 수 있는집이 되었다.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1층으로 출근하는 집, 할머니가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오는 장면을 일하면서 지켜볼 수 있는 집, 작은 마당이 있어서 아이와 함게 흙을 만지는 집. 지인들이 놀러오면 1층에서 파티를 하고 분위기가 익으면 옥상에 올라가 달과 남산을 함께 보는 집. 그런 집. 저자는 용기있는 자가 집을 얻는다고 말한다. 주저하지 말고 일단 저질러 보라고. 아이와 함께 어디에 살고 싶은지 고민을 시작하면 행동하지 않으면 못 배긴다고 말하는 듯 하다. 


책을 읽고 나니 빚을 얻어서도 집을 짓고 싶다. 구 도심의 싼 땅을 사서 저렴하게 그러나 알차게 집을 짓고 싶다. 하지만 저자가 걸어놓은 환상에서 잠시 깨어날 시간이기도 하다. 저자부부의 경험은 놀랍고 도전적이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단 빚을 얻어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부부와 그 부모의 재산을 합친 재산은 이 책의 독자들 대다수의 수준보다 높을 것이다. 출근을 1층으로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성인은 몇프로나 될까? 또 집의 밑그림을 직접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시공사의 전문적인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자신감과 또 그걸 뒷받침하는 배경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겨울에라도 매일 현장으로 출근해 지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책을 덮고 독자들은 또 매일 쳇바퀴처럼 출근해야 하고, 아파트에라도 울며겨자먹기로 살며 아이에게 뛰지 말라고 다그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상적이라거나 상류층의 특수한 경험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이들역시 재정적으로 힘들었으며, 자신들의 삶과 이상을 조율하기 위해서 눈물나게 투쟁한 이들이다. 또 이들이 독자들에게 모두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들의 집에 대한 철학과, 사는 곳에 대한 고민, 아이가 살 환경에 대한 이상 이런것들을 같이 고민할 수 있다면, 독자들이 자신만의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면 이 책값은 다 하는 것일 테다. 


이런 고민과 사고의 과정을, 그리고 나름의 투쟁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잘 풀어 낸 책이다. 동시에 그 고민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당장 내 집을 짓지 않더라도, 그럴 계획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1독을 권한다. 삶에 대한 고민,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주는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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