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
김영진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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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막말로 내가 공부하는 전공에는 수업시간에 꿀먹은 벙어리여도 페이퍼만, 논문만 기깔나게 써낸다면 그 사람은 인정받는다. 공부가 답답해서 인터넷을 보면 글을 매끄럽게 잘 쓰는 사람이 참 많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논리적이어서 A에서 B를 거쳐 C라는 결론에 아주 매끄럽게 도달하는데, 내가 다시 비슷한 구성을 해보려면 내 글은 너저분하기 짝이 없다. 머리속에서는 연결이 매끈한데, 글로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분명히 C로 가기 위해서 AB를 지나왔는데, C라고 말하기에는 좀 뭐한 글이 되고 만다. 만만치 않은 게 글이다.


글 잘 쓰는 사람에게는 뭔가 다른게 있을까? 폭넓은 지식, 예리한 통찰, 훌륭한 기술, 아니면 글빨? 자기 분야에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글이란 어떻게 써야하는지가 아닌, 자신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를 들려주는 책이다. 자고로 나는 자기개발서나 “~~하려면 이러저러 해라라는 식의 글은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글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어서인지 무슨 팁이라도 좀 얻을까 해서 기웃거려봤다. 목마르니 우물을 판다. 각장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내 감상을 적도록 하는 식으로 서평을 해보려고 한다.


먼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글이다. 평론가로 시작해 씨네 21, Film 2.0을 거친 그는

어떻게 자신이 쉬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영화에서 주도적인 인상을 잡아서 글을 쓰는지 설명한다. 자신이 썼던 여러 평론들을 인용해서 설명해준다. 난해한 영화평론에 허덕이던 독자로서 그가 제안한 쓰기를 다른 평론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다.


한겨레 기자 안수찬은 끊어 치라고 말한다. 김구나 함석헌 선생같은 고상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서 무얼 쓰더라도 자아가 드러날 사람이 아니라면, 끊어치라고 말이다. 문장을 가장 작은 단위로 자를 수 있을 때 자신만의 리듬이 생긴다고 말한다.


다음으로는 시인 유희경의 글이 나오는데, 내게 시는 가장 관심이 없는 장르다. 내가 관심이 없는 이유는,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하는 것 쓰는 것 모두 다 어렵다. 예를 들어, 시에 등장하는 기가 막힌 표현들을 나로서는 도저히 써낼 수 없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 표현에 담긴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해내지 못해서 더 읽기가 꺼려진다. “한 줄의 유혹을 피하라고 말하는 유희경의 말은 그런 나에게 도움이 된다. 시를 쓸 때 기가 막힌 한 줄이 시를 지배하거나, 그 한 줄로만 시를 시작해서는 안된다고, 한 줄은 전체 시의 일부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한 줄의 깊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나는, 적어도 시와 태생적으로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닐테다.


시도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 나오는 것은 더 생소하고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는 글의 종류이다. 바로 판결문이다. 어처구니 없는 판결이 뉴스에 등장하면 나는 손쉽게 판사가 논리도 상식도 없이, 별 고민도 없이 저런 결론을 내렸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니 판결문은 논리와 상식의 싸움이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재판을 진 쪽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텐데, 어느 법관이 허술한 논리와 말도 안되는 근거를 가지고 결론을 내리겠는가. 뭐 그렇다고 모든 판결이 따라서 논리적이고 상식적이라 볼 수는 없지만, 판결문이라는 글도 역시 글이다는 말이다.


<괭이 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작가인 김중미의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그녀의 글쓰기는 이 장의 제목에 가장 잘 드러나있다. “내 글쓰기의 첫걸음은 세상을 향한 연민이다.” 빈민가에서 공부방을 운영한 그녀 자신의 경험이 어떻게 글쓰기에 녹아 들어 있는지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래 역시 삶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보다는 삶, 글의 문체보다는 글 쓰는 이의 삶에 대한 자세가 훌륭한 글을 만드는 것 아닌가.


철학자의 글쓰기는 조금 흥미롭다. 학문적인 토대 위에서 대중적인 글을 써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철학자이며 교수인 최훈은, 자신의 글을 인용해서 소개해주고 있다. 결국 자신들만의 리그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전달이 되며, 실용적이고, 쉬운 호흡으로 읽힐수 있어야 지식의 확신이 이루어진다. 내가 전공하는 분야인 신학에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백소영 교수 정도 였던것 같다. 전문적이면서도 말해주듯이 들려주는 책을 원한다면, 그녀가 쓴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미술비평은 또 어떤가? 시는 한두번 읽어 본적이 있고, 판결문은 간혹 뉴스에 부분적으로나마 등장해서 본적이 있지만, 미술 비평은 단언하건데 단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장을 읽어보니 꽤나 현학적이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가득차 있는 장르임이 분명하다.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한 저자가 그 한계를 지적하고, 미술평론가들의 자세란 어떠해야 한다고 제안한 부분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미술 평론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는 소개가 없다. 아쉽다.


번역이라면 나도 서너권 해보았다. 그래서 번역가 성귀수가 자신은 어떻게 번역글을 쓰는지를 설명한 장은 특별히 주의 깊게 읽었다. 번역투를 피하라든지, 수동태를 피하라든지 등등 실천적인 조언보다는 이 책의 방향에 맞게 자신이 어떻게 전문번역가로서 책을 대하고, 그에 깊이 빠지고, 또 창조적으로 번역을 해 나가는지 잘 설명해주었다. 그가 말하는 번역가의 자세는 마치 연기에서와 같이 메소드번역을 하는 것이다. 해석 해야할 텍스트와 깊이 동화되고, 본문에 충실하되 창조적으로 해석해내어 결국에는 진정한 다시 쓰기까지 나아가는 것.


저 위의 장에서 시인 유희경은 시란 어떤 대상이며, 우리가 하는 행위는 그 시적 대상을 최대한 근사치로 표현해내는 것이라 한 것이 기억난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추상적 창조적 대상이긴 하지만 표현되어야 할 대상이 있고, 저자들은 자신의 기술과 직관으로 그 대상을 장르에 맞게 표현해낸다. 번역의 경우에 그 대상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원문 텍스트가 그것이다. 마치 시의 이데아를 맛보고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처럼, 번역자의 작업도 자신이 원문에서 느낀 감정, 희열, 논리, 풍경을 다른 언어로 최대한 구현해내야 하는 것 아닐까.


시나리오작가 김선정은 자신의 글이 상업적이라고 말하며 시작한다. 대중에게 팔릴, 그들에게 사랑받을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략하기는 했지만 앞에 나온 장에는 광고카피를 쓰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두 작가 모두 글을 쓰는 나 보다는 그 글을 읽게 되는, 그리고 그 글을 구매할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낸다. 시나 소설, 동화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철학적 글도 읽기 쉽게 쓴다지만 대중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철학이나 논리의 내용을 바꿀 필요는 없다. 기사 역시 내용을 전달하기만 하면 될 뿐, 기사의 팩트나 논조가 독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결정되지는 않는다. 반면에 시나리오는 상당한 부분이 그것을 소비하는 보는, 너의 이야기이다. 작가적 욕심을 더 많이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이런 시나리오의 작가인 김선정이, 철학이나 판결문, 기사나 번역글보다 더 자신의 글에서 작가로서 자아가 더 많이 녹아 들어있게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글에 대한 거부나 비판을 자신에 대한 평가라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저자는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보는 너를 가장 많이 생각해야 하는 시나리오에서 쓰는 나를 가장 많이 녹여내게 된다는 아이러니. 그래서 김선정은 자신의 글을 애달픈 구애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임범은 칼럼을 칼럼되게 하는 것은 바로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남과 다른, 고유한 시각을 담아 내는 것이 칼럼이란다. 그러면 그 고유한 시각은 어떻게 얻을 수 있나? 우리는 누구나 남과 다른 본능적인 시각이 있다. 다만, 그걸 뒷받침할 논리가 없어서 대충 남의 시각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사는 것이란다. 그때 타협하지 말자는 거다. 왜 나는 그렇게 느끼는지 솔직히 바라보고, 더 깊게, 끈질기게 파고 들자는 거다. 그럴 때 저자만의 고유한 시각이 비로소 구체화되고, 근거를 얻게 되며 칼럼이라는 형태로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한다.


민중신학자이며 목사인 김진호는 자신의 설교 쓰기에 대해서 말한다. 주의하자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개신교회의 설교와는 다르다. 그가 설교를 한다는 한백교회에서는 설교대신에 하늘 뜻 나누기라고 쓴단다.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설교전달과정을 위계적인 일방적 전달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 쌍방향적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 모양이다. 그는 설교가 지금,여기라는 상황을 넘어서 더 넓은 사회적 맥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교가 전달하는 낯설고 불편한 진실이 결국에는 청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의 틀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전하는 설교론과, 교회론에 개인적으로는 아주 큰 매력을 느끼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소개한 설교와 한백교회의 맥락은 한국 개신교 교회 설교의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는 이 장의 제목을 설교에 대한 하나의생각이라고 지었나 싶다.


마지막 장 소설가 듀나의 글은 어떤 체계적인 글쓰기가 아닌 자신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또 생각들을 설계하는지, 또 작가적 세계를 글을 써 나가면서 창조되도록 여지를 두는지 설명한다. 소설가답게 그의 글은 이 책 전체 중 가장 술술 읽힌다.


어떤 특출난 방법론을 배우려고 읽은 책은 아니다. 이 책이 그 목적으로 쓰여진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 저자들이 자신들은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아닌)를 그냥 풀어낸 글들의 모음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여러가지 힌트나 팁을 얻은 것들도 있다. 일단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펼쳐 보지 않은 채로 기억나는 것을 적어 본다면, 먼저 안수찬 기자의 끊어치라는 제안이다. 글을 더이상 끊을 수 없는 단위로 짧게 끊어치라고. 글을 쓰다보면, 문장이 이상하게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시작할 때와 다른 뉘앙스로 문장이 끝나기도 한다. 나중에 돌아보며 이 문장을 문단의 어디에 넣어야 좋을지 계륵같은 이놈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생각해보니 끊어치면 애매한 글들의 논리에 휩싸이지 않게 된다. 또 동화작가인 김중미의 글에서, 작가의 삶과 글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적의식이 결국은 어떤 기교보다도 글을 더 강하게 끌고 간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상업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독자를 덜 상정하는 글을 써야 하는 나로서는 역설적으로 상업적 글쓰기를 설명한 장이 인상에 깊이 남는다. 가장 상업적 글쓰기일 시나리오가 가장 선명하게 독자를 상정함으로써, 결국 그 글을 들려주는 작가의 내밀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는 것.


장르는 다르나, 결국 글이란 것은 하나다. 작가가 경험하고 추상적으로 본 것을 언어를 통해 들려주는 것.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이 언어라는 매체로 전달되는 것. 따라서 매개체인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작가에 대한 이해, 독자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글을 쓰며, 무언가 막힐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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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엄마만 느끼는 육아감정 - 나도 몰랐던 감정 때문에 상처받은 엄마들을 위한 치유 심리서
정우열 지음 / 팬덤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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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이 쓴 책이다. 이분은 엄마가 아니라 아빠지만, 두 아이를 키운 사람이다. 게다가 수많은 엄마들을 상담하면서 배운 케이스가 상당히 많다. 난 아빠지만, 아이를 같이 키우게 되면 이 책에 기록된 여러가지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엄마 아빠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주 양육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감정이기 때문이다. 


크게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육아감정". 2장 "엄마에겐 감정이 많아도 너무나 많다". 3장 "서툰 육아 감정에 나를 잃어가는 엄마들". 4장 "감정적이어도 서툴러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각 장들은 또 그 안에 한두페이지씩의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시간날때 아무곳이나 집어들어 읽어도 별 문제 없다. 나는 이 책을 하루에 열페이지정도씩 조금씩 읽어나갔다. 


결혼한 친구들이 하는 말 중 가장 낯설었던 것이 바로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만큼 아이가 밉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어디에 말할수도 없고, 많은 경우 그 감정을 경험하는 자기 자신도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엄마만 느끼는" 그리고 당사자인 엄마도 정확하게 모르는 육아감정을 다룬다.  


대부분의 감정은 아이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 엄마 자신에 대한 감정인 경우가 많다. 엄마 자신의 불안감, 성장기의 경험, 죄책감, 그리고 미해결된 여러 감정등이 아이를 통해 투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엄마가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 보는 것 만으로도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저자의 상담 경험을 통해서 말해준다.  


여러 인터넷 매체나 블로그등을 통해서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 상황도 있다. 인터넷에 그려진 남들의 삶은 완벽하고, 더 없이 이상적으로 보이는데, 자신의 양육방법이나 과정에 만족하지 못하는 엄마들도 많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장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엄마들에게 힐링이 될 듯하다. 

 

이론적인 전개가 아니라 정신과의사로서 상담한 케이스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읽기에 어렵지 않다. 한번정도 정독하고, 시간날때 여기저기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엄마뿐 아니라 주 양육자가 된 아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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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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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지영씨의 책은 한권 밖에 읽지 못했다. 제작년엔가 읽었던 쌍용차 사태를 다룬 소위 르포르타주인 <의자놀이>였다. 그 책을 통해서 쌍용사태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되었고, 작가인 공지영씨의 필력에 또 놀랐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의 작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영화로나마 접한 적이 있다. 사람에 대한 관찰이 뛰어났었고, 용서나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역시 그녀의 원작인 <도가니>는 보지 않았다. 감정소모가 너무 강하게 될 것 같아서 지금까지 피해두고 있는 영화중 하나이다.



이번에 우연치 않은 기회로 그녀의 <수도원 기행>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한국에 있는 수도원을 다녀와서 쓴 책이 있다던데, 내가 읽은 책은 2000년에 그녀가 유럽에 있는 수도원들을 다녀와서 그 감회를 기록한 책이다. 한 달여 남짓하는 기간 동안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에 있는 여러 수도원들, 주로 봉쇄 수도원이라 불리는 곳들을 다녔단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 종교에 대한 이야기등을 적어 놓았다.  참고로 내가 읽은 판은 2001년에 김영사에서 나온 판인데, 이게 오픈하우스에서 재출간된것으로 보인다. 두 출판사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르정탱 수도원, 솔렘 수도원, 테제 공동체, 오뜨리브 수도원, 림부르크 수도원 등. 18년만에 가톨릭으로 돌아온 탕아로 자신을 묘사하는 공작가는, 이 거룩한 장소들을 방문하면서 손쉽게 종교적인 감상으로 빠지지 않는다. 여전히 세속적인 시각들, 까칠한 신도로서의 관점을 놓치지 않는다. 어느정도는 내부에 속하면서도, 여전히 외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가장 전통적인 종교집단인 가톨릭의 가장 고립된 수도원을 관찰한다. 그런 그녀가 선 고유한 자리에서 나오는 관찰들이 흥미롭게 읽힌다.



에세이집이어서 그런지 책은 쉽게 읽힌다. 글의 흐름도 매끈하고, 장소에 대한 기록에서 자신의 감정으로, 예전의 기억으로, 다시 방문한 장소로 돌아오는 서사도 흡입력있게 전개된다. 공지영이라면 유럽의 수도원이 아닌 다른 곳에 갔었더라도 이정도의 소회는 해내지 않았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도 해본다.



수도원이라면 한국의 태백에 있는 예수원 밖에 모르는 한 개신교인으로서 그녀가 기록한 수도원에 대한 묘사들은 방문하고 싶은 흥미를 돋운다. 무언가를 위해서, 초월적인 대상을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의 복잡함 보다는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하여 자신을 가둔 이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예수원에 갔다가 하루만에 탈출해서 동해바다를 보러 갔던 내 어린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나이를 십수년이나 더 먹은 지금도 섣불리 갔다가는 봉쇄는 고사하고 인터넷의 바다에 빠져서 나갈 시간만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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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릴 수 없는 배 - 세월호로 드러난 부끄러운 대한민국을 말하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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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릴 수 없는 배> 우석훈

<88만원 세대>, <성숙 자본주의>의 저자 우석훈의 책이다. 2014 4 6일 세월호 이후 그 사건에 대한 깊은 차원의 고찰이다. 세월호 사태의 배후에서, 이 비극을 일으킨 한국 사회의 전체 시스템과 불합리한 경제제도에 대한 고찰을 한다.


1장은 유령선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에 대한 은유로서의 배를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2장은 416일 세월호 사건에 대한 기록이며, 이 사건을 벌어지게 한 사회적 맥락에 대한 보다 깊은 분석을 위한 준비가 된다. 3장은 위험요인을 떠안으면서도 세월호 같은 배가 계속 운행되는 어처구니 없는 제도에 대한 분석을 한다. 마지막으로 4장은 미래적 제안이다. 여기서 공공성에 대한 제안이 등장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의 논의에서 그가 주목한 기이한 현상은 이 모든 사회적 논의에서 배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작년 여름, 그러니까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일년후에 그가 관찰한 것인데, 이 배에 대한 논의의 부재라는 현상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배가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왜 정작 이야기가 안 들리느냐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는 두가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공공교통으로서의 배이다. 세월호가 왜 불안과 위험요소를 끌어안고서도 계속해서 운행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세월호 사건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식의 운영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지 정책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그 중 하나로 강력하게 지적하는 것이 신자유주의로 인한 강력한 민영화 드라이브이다. 그는 민영화도, 준공영제도 답이 아니라고 보고 연안여객체계를 포함한 대중교통을 완전공영제로 전화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한국 사회 구조 전체에 대한 은유로서의 배이다. 한국사회는 어쩌다 이렇게 마치 로마시대의 갤리선처럼 누군가가 배의 밑바닥에서 노를 저어야 가는 구조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희생당하는 자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인 강남이 아닌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되었는지 질문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죽음을 몰고 다니는 마치 유령선같은 한국사회에, 우리는 마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내릴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제안하는 세월호에 대한 충분한 사후대책은, 역설적으로 예비대책이다. 다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다잡고, 한국사회의 기본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공공이 제공해야 할 분야를 공공에 돌리는 것. 생명의 가치를 경제가치보다 위에 두는 것. 저자의 제안은 즉각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이다. 오래 걸리지만, 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제안이 공허하다거나 이상적인것은 아니다, 신안군의 버스공영제를 논하는 경우에서처럼 저자의 연안여객의 공영제 제안은 충분히 현실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를 주로 다룬 책이지만, 이를 통해서 생태경제학자로서 우석훈의 목소리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제도적 허점때문에 유령선과 같은 배가 침몰했다면, 그리고 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음에도 수백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면, 그 이후에 무언가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석훈의 지적처럼 상황은 더 안 좋아질것이고, 우리는 잊을 것이다. 이 사건 기저에 있는 근본적인 사회적 제도, 변화방향등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책이 그것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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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을 넘어서
박찬운 지음 / 스마트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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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을 넘어서>  박찬운 저

인권이란 참으로 애매한 단어이다.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극악한 살인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느냐며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그 보호에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아동성범죄자들의 신상을 공개해야 하느냐는 문제에는 늘상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과 갈등하는 듯이 제시된다.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없었다. 그런 그들일지라도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보호도,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분노 앞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미국에서 소수자로서 인권문제에 민감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만큼 미치지 못 한것도 사실이다.


뭐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인식하던 인권이라는 이슈는 딱 이정도였다. 따라서 이 책을 쓴 저자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이 책을 통해서 접한 것이 거의 다 새로운 내용들이었다. 그럼 왜 이 책을 읽었느냐고? 먼저는 인권에 관심은 있으나 잘 몰라서이고, 둘째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저자는 자신이 경계인이라고 했는데,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모양이다. 여러가지 사회현안에 대해서 입장은 있으나 드러내기는 두렵고, 행동하고 싶지만 여러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신중한것일수도, 겁이 많은 것 일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딱 경계선이다. 아니 저자나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 경계선에 서 있을 것이다.

1세상을 바꾸는 힘에 대하여무엇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민한다. 아마도 저자의 인권활동에 대해서 제일 직접적으로 다룬 장일 것이다. 재소자 인권보호를 위한 활동과, 일본변호사단과 함께 진행한 소록도 보상 소송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가 서두에 쓴 인권감수성이란 단어가 있다. 소위 남들은 당연시여기고, 그냥 지나칠 만한 인권침해의 상황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느냐 정도가 되겠다. 요사이 인터넷에 프로 불편러라는 말이 돌아다닌다.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시선을 담은 글이나 사진을 보면서, 불편하다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반조롱조로 일컫는 말인 것으로 안다. 그들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얼토당토 않은지, 그래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불편한 마음, 즉 감수성이 없이는, 당연시여기는 현 상황을 바꾸기 힘들 것이다. 결국 불편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저자는 미술과 글쓰기에 조예가 깊은 듯 하다. 저작 목록을 살펴보니 고흐에 관한 책도 쓴 적이 있다. 2역사 앞에서는 그림, 글쓰기 등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창의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던, 그럼으로써 역사 앞에서 책임을 다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권이라는 이야기를 법과 제도만이 아닌, 예술과 감성의 이야기로 풀어내려 했던 것에는 찬사를 보낸다. 다만, 마지막에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의 아름다운 화해와 용서 이야기, ‘관대한 용서이야기는 너무 낭만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독립사회를 향하여에서는 의존사회와 독립사회를 구분하며 시작한다. 평생을 부모에게, 이웃에게, 자식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야 되는 한국 사회와, 사회적 복지안전망 덕택에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스웨덴의 사회를 아주 거칠게 구분해 비교한다. 자신의 1년 안식년경험을 위주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 인식론에 기대어, 물질적인 안정을 제공해주는 복지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한 점이다. 독립사회든 시민의 공공의 덕성이든, 제도와 복지의 뒷받침 없이는 힘들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적절한 통찰이라 보인다.


다만 의존사회 한국 독립사회 스웨덴이라는 거친 이분법도 그렇고, 한국사회가 의식의 르네상스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한국사회가 여전히 소통되지 않으며, 헛된 권위에 눌려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기에,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데 안타까웠다. 동시에, 스웨덴식 서구유럽사회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데 아쉬움이 느껴졌다. 90년대 중반 세계화를 외치던, 서구의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찬양에서 많이 들어보았던 화법이다.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4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힌다. 소위 자유주의라 하여, 국가보다는 개인에,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개인에 촛점을 맞춘다.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라는 두 저자와 <그리스인 조르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두 소설을 읽어가며, 개인은 국민보다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위주의사회에서 경험했던 인권침해의 한국역사를 고려해 볼 때, 인권을 보호하려면 어떠한 속박에서도 자유로운 개인을 상정하는 것은 필수인 듯 보인다. 그런데 두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현실적인가? 개인은 그렇게 자유로운가? 둘째, 꼭 그래야만 하는가? 서구식의 자유주의적 인간론을 상정하지 않고는 인권은 주장될 수 없는가?


5우리시대의 자화상,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경제적 성장에 뒤이은 현재의 불평등한 한국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마도 지금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적 회고이다. 저자 자신이 지금 50대요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라는 격정의 시기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지금 희망 없는 불평등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런 문제인식위에 그가 제안하는 것은 복지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한국사회의 문제점으로 학벌사회와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 후에 지식인의 책무를 제안하며 이 장을 마친다. 저자는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겸손을 담아 표현했지만, 그의 살아온 자취나, 그의 선명히 드러난 사상을 보면 그는 경계인은 아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고 싶어하고,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독립된 개인이 되라고 말하며, 사회적 약자에게도 동일한 기회와 안전망을 제공하는, 그런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경계인을 넘어서는" 사람이되라고 조언한다. 


저자의 독서량이 놀랍다. 인권법학자이면서도 미술, 사회학, 소설, 역사 등 다방면의 독서를 한다. 그리고 그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관점을 확증,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책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인권침해나 그것에 대항해 싸운 흥미로운 이야기는 1장에서 거의 마무리되고, 2-5장에서는 그것보다는 큰 이야기,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가 진행된다. 따라서 이야기가 좀 퍼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학술논문도 아니고 그런걸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 좋은 책이다. 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가 인용한 여러 사상가중에서 글 말미의 '지식인의 책무'에서 등장한 촘스키가 관심이 간다. 다음 책으로 "촘스키 이펙트"를 구입했다 (사실, 하루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촘스키에 대한 좋은 안내서인지는 아직 확신이 안선다. 번역도 매끄럽지 않고, 내용도 아직까지는 좀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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