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
김영진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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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도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막말로 내가 공부하는 전공에는 수업시간에 꿀먹은 벙어리여도 페이퍼만, 논문만 기깔나게 써낸다면 그 사람은 인정받는다. 공부가 답답해서 인터넷을 보면 글을 매끄럽게 잘 쓰는 사람이 참 많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논리적이어서 A에서 B를 거쳐 C라는 결론에 아주 매끄럽게 도달하는데, 내가 다시 비슷한 구성을 해보려면 내 글은 너저분하기 짝이 없다. 머리속에서는 연결이 매끈한데, 글로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분명히 C로 가기 위해서 AB를 지나왔는데, C라고 말하기에는 좀 뭐한 글이 되고 만다. 만만치 않은 게 글이다.


글 잘 쓰는 사람에게는 뭔가 다른게 있을까? 폭넓은 지식, 예리한 통찰, 훌륭한 기술, 아니면 글빨? 자기 분야에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글이란 어떻게 써야하는지가 아닌, 자신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를 들려주는 책이다. 자고로 나는 자기개발서나 “~~하려면 이러저러 해라라는 식의 글은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글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어서인지 무슨 팁이라도 좀 얻을까 해서 기웃거려봤다. 목마르니 우물을 판다. 각장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내 감상을 적도록 하는 식으로 서평을 해보려고 한다.


먼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글이다. 평론가로 시작해 씨네 21, Film 2.0을 거친 그는

어떻게 자신이 쉬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영화에서 주도적인 인상을 잡아서 글을 쓰는지 설명한다. 자신이 썼던 여러 평론들을 인용해서 설명해준다. 난해한 영화평론에 허덕이던 독자로서 그가 제안한 쓰기를 다른 평론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다.


한겨레 기자 안수찬은 끊어 치라고 말한다. 김구나 함석헌 선생같은 고상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서 무얼 쓰더라도 자아가 드러날 사람이 아니라면, 끊어치라고 말이다. 문장을 가장 작은 단위로 자를 수 있을 때 자신만의 리듬이 생긴다고 말한다.


다음으로는 시인 유희경의 글이 나오는데, 내게 시는 가장 관심이 없는 장르다. 내가 관심이 없는 이유는,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하는 것 쓰는 것 모두 다 어렵다. 예를 들어, 시에 등장하는 기가 막힌 표현들을 나로서는 도저히 써낼 수 없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 표현에 담긴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해내지 못해서 더 읽기가 꺼려진다. “한 줄의 유혹을 피하라고 말하는 유희경의 말은 그런 나에게 도움이 된다. 시를 쓸 때 기가 막힌 한 줄이 시를 지배하거나, 그 한 줄로만 시를 시작해서는 안된다고, 한 줄은 전체 시의 일부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한 줄의 깊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나는, 적어도 시와 태생적으로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닐테다.


시도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 나오는 것은 더 생소하고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는 글의 종류이다. 바로 판결문이다. 어처구니 없는 판결이 뉴스에 등장하면 나는 손쉽게 판사가 논리도 상식도 없이, 별 고민도 없이 저런 결론을 내렸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니 판결문은 논리와 상식의 싸움이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재판을 진 쪽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텐데, 어느 법관이 허술한 논리와 말도 안되는 근거를 가지고 결론을 내리겠는가. 뭐 그렇다고 모든 판결이 따라서 논리적이고 상식적이라 볼 수는 없지만, 판결문이라는 글도 역시 글이다는 말이다.


<괭이 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작가인 김중미의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그녀의 글쓰기는 이 장의 제목에 가장 잘 드러나있다. “내 글쓰기의 첫걸음은 세상을 향한 연민이다.” 빈민가에서 공부방을 운영한 그녀 자신의 경험이 어떻게 글쓰기에 녹아 들어 있는지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래 역시 삶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보다는 삶, 글의 문체보다는 글 쓰는 이의 삶에 대한 자세가 훌륭한 글을 만드는 것 아닌가.


철학자의 글쓰기는 조금 흥미롭다. 학문적인 토대 위에서 대중적인 글을 써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철학자이며 교수인 최훈은, 자신의 글을 인용해서 소개해주고 있다. 결국 자신들만의 리그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전달이 되며, 실용적이고, 쉬운 호흡으로 읽힐수 있어야 지식의 확신이 이루어진다. 내가 전공하는 분야인 신학에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백소영 교수 정도 였던것 같다. 전문적이면서도 말해주듯이 들려주는 책을 원한다면, 그녀가 쓴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미술비평은 또 어떤가? 시는 한두번 읽어 본적이 있고, 판결문은 간혹 뉴스에 부분적으로나마 등장해서 본적이 있지만, 미술 비평은 단언하건데 단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장을 읽어보니 꽤나 현학적이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가득차 있는 장르임이 분명하다.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한 저자가 그 한계를 지적하고, 미술평론가들의 자세란 어떠해야 한다고 제안한 부분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미술 평론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는 소개가 없다. 아쉽다.


번역이라면 나도 서너권 해보았다. 그래서 번역가 성귀수가 자신은 어떻게 번역글을 쓰는지를 설명한 장은 특별히 주의 깊게 읽었다. 번역투를 피하라든지, 수동태를 피하라든지 등등 실천적인 조언보다는 이 책의 방향에 맞게 자신이 어떻게 전문번역가로서 책을 대하고, 그에 깊이 빠지고, 또 창조적으로 번역을 해 나가는지 잘 설명해주었다. 그가 말하는 번역가의 자세는 마치 연기에서와 같이 메소드번역을 하는 것이다. 해석 해야할 텍스트와 깊이 동화되고, 본문에 충실하되 창조적으로 해석해내어 결국에는 진정한 다시 쓰기까지 나아가는 것.


저 위의 장에서 시인 유희경은 시란 어떤 대상이며, 우리가 하는 행위는 그 시적 대상을 최대한 근사치로 표현해내는 것이라 한 것이 기억난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추상적 창조적 대상이긴 하지만 표현되어야 할 대상이 있고, 저자들은 자신의 기술과 직관으로 그 대상을 장르에 맞게 표현해낸다. 번역의 경우에 그 대상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원문 텍스트가 그것이다. 마치 시의 이데아를 맛보고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처럼, 번역자의 작업도 자신이 원문에서 느낀 감정, 희열, 논리, 풍경을 다른 언어로 최대한 구현해내야 하는 것 아닐까.


시나리오작가 김선정은 자신의 글이 상업적이라고 말하며 시작한다. 대중에게 팔릴, 그들에게 사랑받을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생략하기는 했지만 앞에 나온 장에는 광고카피를 쓰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두 작가 모두 글을 쓰는 나 보다는 그 글을 읽게 되는, 그리고 그 글을 구매할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낸다. 시나 소설, 동화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철학적 글도 읽기 쉽게 쓴다지만 대중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철학이나 논리의 내용을 바꿀 필요는 없다. 기사 역시 내용을 전달하기만 하면 될 뿐, 기사의 팩트나 논조가 독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결정되지는 않는다. 반면에 시나리오는 상당한 부분이 그것을 소비하는 보는, 너의 이야기이다. 작가적 욕심을 더 많이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바로 이런 시나리오의 작가인 김선정이, 철학이나 판결문, 기사나 번역글보다 더 자신의 글에서 작가로서 자아가 더 많이 녹아 들어있게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글에 대한 거부나 비판을 자신에 대한 평가라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저자는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보는 너를 가장 많이 생각해야 하는 시나리오에서 쓰는 나를 가장 많이 녹여내게 된다는 아이러니. 그래서 김선정은 자신의 글을 애달픈 구애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임범은 칼럼을 칼럼되게 하는 것은 바로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남과 다른, 고유한 시각을 담아 내는 것이 칼럼이란다. 그러면 그 고유한 시각은 어떻게 얻을 수 있나? 우리는 누구나 남과 다른 본능적인 시각이 있다. 다만, 그걸 뒷받침할 논리가 없어서 대충 남의 시각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사는 것이란다. 그때 타협하지 말자는 거다. 왜 나는 그렇게 느끼는지 솔직히 바라보고, 더 깊게, 끈질기게 파고 들자는 거다. 그럴 때 저자만의 고유한 시각이 비로소 구체화되고, 근거를 얻게 되며 칼럼이라는 형태로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한다.


민중신학자이며 목사인 김진호는 자신의 설교 쓰기에 대해서 말한다. 주의하자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개신교회의 설교와는 다르다. 그가 설교를 한다는 한백교회에서는 설교대신에 하늘 뜻 나누기라고 쓴단다.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설교전달과정을 위계적인 일방적 전달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 쌍방향적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 모양이다. 그는 설교가 지금,여기라는 상황을 넘어서 더 넓은 사회적 맥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교가 전달하는 낯설고 불편한 진실이 결국에는 청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의 틀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전하는 설교론과, 교회론에 개인적으로는 아주 큰 매력을 느끼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소개한 설교와 한백교회의 맥락은 한국 개신교 교회 설교의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는 이 장의 제목을 설교에 대한 하나의생각이라고 지었나 싶다.


마지막 장 소설가 듀나의 글은 어떤 체계적인 글쓰기가 아닌 자신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또 생각들을 설계하는지, 또 작가적 세계를 글을 써 나가면서 창조되도록 여지를 두는지 설명한다. 소설가답게 그의 글은 이 책 전체 중 가장 술술 읽힌다.


어떤 특출난 방법론을 배우려고 읽은 책은 아니다. 이 책이 그 목적으로 쓰여진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 저자들이 자신들은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아닌)를 그냥 풀어낸 글들의 모음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여러가지 힌트나 팁을 얻은 것들도 있다. 일단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펼쳐 보지 않은 채로 기억나는 것을 적어 본다면, 먼저 안수찬 기자의 끊어치라는 제안이다. 글을 더이상 끊을 수 없는 단위로 짧게 끊어치라고. 글을 쓰다보면, 문장이 이상하게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시작할 때와 다른 뉘앙스로 문장이 끝나기도 한다. 나중에 돌아보며 이 문장을 문단의 어디에 넣어야 좋을지 계륵같은 이놈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생각해보니 끊어치면 애매한 글들의 논리에 휩싸이지 않게 된다. 또 동화작가인 김중미의 글에서, 작가의 삶과 글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적의식이 결국은 어떤 기교보다도 글을 더 강하게 끌고 간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상업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독자를 덜 상정하는 글을 써야 하는 나로서는 역설적으로 상업적 글쓰기를 설명한 장이 인상에 깊이 남는다. 가장 상업적 글쓰기일 시나리오가 가장 선명하게 독자를 상정함으로써, 결국 그 글을 들려주는 작가의 내밀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는 것.


장르는 다르나, 결국 글이란 것은 하나다. 작가가 경험하고 추상적으로 본 것을 언어를 통해 들려주는 것.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이 언어라는 매체로 전달되는 것. 따라서 매개체인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작가에 대한 이해, 독자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글을 쓰며, 무언가 막힐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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