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을 넘어서
박찬운 지음 / 스마트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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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을 넘어서>  박찬운 저

인권이란 참으로 애매한 단어이다.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극악한 살인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느냐며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그 보호에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아동성범죄자들의 신상을 공개해야 하느냐는 문제에는 늘상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과 갈등하는 듯이 제시된다.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없었다. 그런 그들일지라도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보호도,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분노 앞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미국에서 소수자로서 인권문제에 민감할 수 있는 반면,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만큼 미치지 못 한것도 사실이다.


뭐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인식하던 인권이라는 이슈는 딱 이정도였다. 따라서 이 책을 쓴 저자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이 책을 통해서 접한 것이 거의 다 새로운 내용들이었다. 그럼 왜 이 책을 읽었느냐고? 먼저는 인권에 관심은 있으나 잘 몰라서이고, 둘째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저자는 자신이 경계인이라고 했는데,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모양이다. 여러가지 사회현안에 대해서 입장은 있으나 드러내기는 두렵고, 행동하고 싶지만 여러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신중한것일수도, 겁이 많은 것 일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딱 경계선이다. 아니 저자나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 경계선에 서 있을 것이다.

1세상을 바꾸는 힘에 대하여무엇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민한다. 아마도 저자의 인권활동에 대해서 제일 직접적으로 다룬 장일 것이다. 재소자 인권보호를 위한 활동과, 일본변호사단과 함께 진행한 소록도 보상 소송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가 서두에 쓴 인권감수성이란 단어가 있다. 소위 남들은 당연시여기고, 그냥 지나칠 만한 인권침해의 상황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느냐 정도가 되겠다. 요사이 인터넷에 프로 불편러라는 말이 돌아다닌다.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시선을 담은 글이나 사진을 보면서, 불편하다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반조롱조로 일컫는 말인 것으로 안다. 그들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얼토당토 않은지, 그래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불편한 마음, 즉 감수성이 없이는, 당연시여기는 현 상황을 바꾸기 힘들 것이다. 결국 불편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저자는 미술과 글쓰기에 조예가 깊은 듯 하다. 저작 목록을 살펴보니 고흐에 관한 책도 쓴 적이 있다. 2역사 앞에서는 그림, 글쓰기 등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창의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던, 그럼으로써 역사 앞에서 책임을 다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권이라는 이야기를 법과 제도만이 아닌, 예술과 감성의 이야기로 풀어내려 했던 것에는 찬사를 보낸다. 다만, 마지막에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의 아름다운 화해와 용서 이야기, ‘관대한 용서이야기는 너무 낭만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독립사회를 향하여에서는 의존사회와 독립사회를 구분하며 시작한다. 평생을 부모에게, 이웃에게, 자식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야 되는 한국 사회와, 사회적 복지안전망 덕택에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스웨덴의 사회를 아주 거칠게 구분해 비교한다. 자신의 1년 안식년경험을 위주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 인식론에 기대어, 물질적인 안정을 제공해주는 복지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한 점이다. 독립사회든 시민의 공공의 덕성이든, 제도와 복지의 뒷받침 없이는 힘들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적절한 통찰이라 보인다.


다만 의존사회 한국 독립사회 스웨덴이라는 거친 이분법도 그렇고, 한국사회가 의식의 르네상스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한국사회가 여전히 소통되지 않으며, 헛된 권위에 눌려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기에,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데 안타까웠다. 동시에, 스웨덴식 서구유럽사회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데 아쉬움이 느껴졌다. 90년대 중반 세계화를 외치던, 서구의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찬양에서 많이 들어보았던 화법이다.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4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힌다. 소위 자유주의라 하여, 국가보다는 개인에,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개인에 촛점을 맞춘다.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라는 두 저자와 <그리스인 조르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두 소설을 읽어가며, 개인은 국민보다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위주의사회에서 경험했던 인권침해의 한국역사를 고려해 볼 때, 인권을 보호하려면 어떠한 속박에서도 자유로운 개인을 상정하는 것은 필수인 듯 보인다. 그런데 두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현실적인가? 개인은 그렇게 자유로운가? 둘째, 꼭 그래야만 하는가? 서구식의 자유주의적 인간론을 상정하지 않고는 인권은 주장될 수 없는가?


5우리시대의 자화상,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경제적 성장에 뒤이은 현재의 불평등한 한국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마도 지금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적 회고이다. 저자 자신이 지금 50대요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라는 격정의 시기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지금 희망 없는 불평등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런 문제인식위에 그가 제안하는 것은 복지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한국사회의 문제점으로 학벌사회와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 후에 지식인의 책무를 제안하며 이 장을 마친다. 저자는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겸손을 담아 표현했지만, 그의 살아온 자취나, 그의 선명히 드러난 사상을 보면 그는 경계인은 아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고 싶어하고,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독립된 개인이 되라고 말하며, 사회적 약자에게도 동일한 기회와 안전망을 제공하는, 그런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경계인을 넘어서는" 사람이되라고 조언한다. 


저자의 독서량이 놀랍다. 인권법학자이면서도 미술, 사회학, 소설, 역사 등 다방면의 독서를 한다. 그리고 그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관점을 확증,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책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인권침해나 그것에 대항해 싸운 흥미로운 이야기는 1장에서 거의 마무리되고, 2-5장에서는 그것보다는 큰 이야기,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가 진행된다. 따라서 이야기가 좀 퍼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학술논문도 아니고 그런걸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 좋은 책이다. 인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가 인용한 여러 사상가중에서 글 말미의 '지식인의 책무'에서 등장한 촘스키가 관심이 간다. 다음 책으로 "촘스키 이펙트"를 구입했다 (사실, 하루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촘스키에 대한 좋은 안내서인지는 아직 확신이 안선다. 번역도 매끄럽지 않고, 내용도 아직까지는 좀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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