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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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표지에 이끌렸다. 표지가 너무 예쁘다!! 연한 핑크색 배경으로 분홍빛 장미가 가득한 표지라니……. 게다가 에폭시 후가공을 한 모양인지 배경의 태양과 별과 은하와 우주가 은은하게 빛난다. 핑크색 표지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취향에는 완전히 부합했다. 이 때문에라도 구매 의욕 10% 상승이다. 출판사에서는 디자이너님께 보너스를 주시길(?). 그런데 이 탐스러운 장미를 매만지는 손이 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이다. 피를 머금은 장미와 피 흘리는 손가락. 이 책의 장르가 핑크빛 무드의 로맨스는 아니라는 의미다.

 

저자가 온다 리쿠다. 그의 작품을 모두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초콜릿 코스모스를 읽고 작가의 팬이 되었다. 온다 리쿠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성립시키는 데 성공한 작가다. 그가 이번에 낸 책의 장르는 SF. 작가가 무려 14년 만에 완성했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데다가 sf와 판타지가 적절히 섞인 세계관이다. 하지만 장르적 접근성이 높은 편이다. 쉽고 간결한 문체에 단계적인 설명과 명확한 개념 정의(변질, 피먹임, 통로, 포도 등)로 이해하기 쉬웠다.



 

책의 장소는 일본의 이와쿠라라는 시골 마을이지만, 시간적 배경은 아주 먼 미래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지구는 머지않아(정확히 약 125백년 후) 태양에 먹힐 운명이다. (실제로 약 70억 년 뒤 태양은 적색거성이 되고 그때 지구는 행성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지구의 종말 이전에 인류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허주(虛舟)’를 우주로 보낸다. ‘허주란 우주를 항해하는 배다. 한편 허주에 탑승할 수 있는 승선원은 특별한 자격을 갖춰야 하는데, 주인공 다카다 나치는 바로 이 허주 승선원을 선발하는 캠프에 참여하게 된다.

 

허주 승선원이 되려면 일단 변질을 시작해야 한다. 변질이란 타인의 피를 탐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흡혈을 하는 것이 우선 조건. 흡혈을 하면서 신체는 불로불사로 바뀐다. 그래야 머나먼 외해로의 항해를 할 수 있다. 또한 승선원은 감정기복이 사라진다. 희노애락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인터스텔라(성간 우주)의 항해는 지독하게 길고 따분할 테니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승선원이 되는 것은 선망의 대상인데도, 나치는 필사적으로 변질체가 되기를 거부한다. 정확히 말해서 흡혈을 거부하는 것이다. 피를 빠는 행위에 본질적으로 혐오감이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이번 캠프에서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난다. 폭력적인 성향을 표출하는 메아리가 등장하고, 급기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한다. 거기에 과거 나치의 부모님의 석연치 않은 사망 사건까지 엮인다. 과연 나치는 무사히(?) 변질체가 될 수 있을까?



 

책은 처음에는 평온하게 시작한다. 순조롭게 아이들이 변질체가 되어가려나 싶더니(물론 나치는 극렬하게 거부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 전개는 정신없이 흘러간다. 시점의 변화와 다층적 사건의 구조가 어지러움을 유발할 법도 한데 이야기는 힘을 잃지 않는 한편 끝까지 중심적인 구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장르도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SF, 판타지, 로맨스 등등. 장르적 긴장감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매끄럽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전개와 구성의 깔끔함은 작가의 내공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결말 또한 SF와 판타지와 로맨스 모두를 충족시키는 적정한 결말이었다고 본다.

 

SF·판타지적 요소가 짙은 소설이지만 현실 비판적인 요소도 있다. 피를 제공하는 자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되는데, 여기에 권력과 금력이 개입한다. 대신이라는 작자가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나쁜 피를 제공하려고 든 것이다. 또 선발되는 아이들 간에 빈부격차가 있어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자원하는 아이도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는 경우였다. 인류의 존속을 위한 숭고한 사업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가치는 인간사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치는 불과 14살의 소녀인데도, 어른스럽다. 오빠인 후카시보다 더 성숙한 정신 연령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대단한 점은 정신력이다. 흡혈을 참는 것은 극기의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녀가 허주의 승선원이 된다면, 아주 우수한 승선원이 될 것이다.



 

+ 나치와 후카시의 이름은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 최초의 허주가 정착한 땅.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가 있는 허주의 성지, 일명 나비 계곡’. 타원현 모양의 천장에서 빛이 쏟아지고, 향긋한 장미의 향이 가득하고, 꽃보라 몰아치듯 무수한 나비가 날아다니는 곳. 묘사만 봐도 황홀했다. 영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 출판사에서 이벤트를 한 적이 있었다. 허주 승선원이 될지, 안 될지 선택하는 이벤트였다. 즉 똑똑한 장미가 될 것인지, 어리석은 장미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이벤트에 참여할 때나 책을 다 읽은 때나 선택에 변함이 없다. 허주 승선원이 되고 싶다! 아름다운 외해에 가보고파!

 

+ 나치의 부모님, 나치에게 너무했다. 나치가 부모님이 아니라 도와를 이상향으로 삼는 것에 수긍이 간다.

 

+ 도와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외전으로 나올 법한데?

 




pp57~8 도와 이걸 왜 독한 장미라고 부르는지 아니? () 이건 말이지, 원래는 똑똑한 장미. 한마디로 이건 현명한 장미. () 똑똑한 장미는 피어나서, 시들고, 어김없이 져 버리는 꽃이야. 그래서 현명한 거야. () 하지만 어리석은 장미는 시들지 않아. 피어난 채 영원히 지지 않고, 말라 죽지도 않아. 그래서 어리석은 장미라고 하는 거지.”

 

p125 도와 외해는 이 세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요. 별들이 오싹하리만치 먼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죠.”

 

p323 우리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흘러가는 작은 잎사귀 하나에 불과하다. 고작 한 장의 잎사귀가 흐름의 한구석 둑에 걸려 흐름을 거스른다고 뭐가 달라질까.

 

p545 마사키 어쩌면 그립다라는 감정은 과거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감정일 수도 있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으나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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