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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달의 바다>
정한아, 문학동네, 2007년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7p)’
꿈결이었죠. 정한아의 『달의 바다』를 펼쳐들고 얼마간은 말이에요. 이 책의 1장, 그러니까 1997년 1월 17일자 고모의 편지를 통해서, 정한아는 적확하고도 감미로운 문체로 그려내고 있어요. 우주선의 첫 비행을 말이에요. 영화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로 접한 우주선보다 실감나게 말이죠. 별과 별 사이를 헤엄쳐본 이의 편지가, 이 책에는 일곱 편이나 수록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1장을 읽으며, 짐작했어요. 꿈결이겠구나.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자신의 비행을 속삭여주는 화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동안은, 꿈결의 독서가 되겠구나. 나 또한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둥둥 떠다니며 우주 유영을 하듯—지금, 여기, 이 순간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 그런, 꿈결의 이야기겠구나.
그런데 말입니다.(김상중톤) 책에 한참 코를 박고 있으려니, 아차차. 머지않아 작가 정한아는 독자의 정수리를 향해 각얼음 가득 채운 찬물 한 바가지를 퍼부으며, 이러더군요. 꿈 깨.
우주비행사인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들은, 우주에 직접 다녀와본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법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이를테면 무중력에 익숙해진 비행사들은 지구로 복귀한 뒤에도 컵이나 그릇을 자꾸 허공에서 놓치고 깨먹게 된다는군요. 주인공 ‘은미’는 여전히 이따금 컵을 깨먹고 있을지도 모르는—어쩐지 우주 냄새가 날 것 같은—우주비행사 고모를 찾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다시 만난 고모는, 당연히 킹왕짱 멋져보입니다. 우주를 다녀온 것도 모자라, 미국 NASA에서 존경 받는 연구자로 자리잡았다고 하니까요. 우리가 아는 그 미국...! 그 NASA...! (S#1.미국병, 사대주의, 친미주의 등등으로 필자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미국 가보고 싶다. 뉴욕에서 비싼 브런치 먹어보고 싶다. 스프링 시즌의 릴랙스한 위크앤드 블루톤이 가미된 원피스로 쉬크의 진수를 보여주며 홈메이드 베이크된 베이클에 후레쉬 푸릇을 곁들여 딜리셔스한 브렉퍼스트를 즐겨보자.)
그러나 주인공은 곧 마주하게 됩니다. 거짓말. 『달의 바다』를 관통하는 키워드, 거짓말과 말이죠. 네. 『달의 바다』는 그야말로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연속해서 등장하는 거짓말들이 독자의 정수리를 내려치죠. 거짓말의 정체는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독자분들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고모의 편지에 등장하는 ‘조엘’이라는 인물—우주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비극적으로, 고로 낭만적으로 비행사 자격을 박탈당한 인물은, 실은 슬리퍼 장사꾼이었습니다. 우주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알콜 중독자였죠.
제 기능을 다 하는 복선이란, 늘 반전을 접하고 난 뒤에야 헤아려지는 법입니다. 주인공 은미가 어릴 적부터 고모를 꼭 빼닮았다는 점. 거짓말을 하는 데 능했다는 점. ‘가족이라 해도, 낭떠러지 같은 절망 속에 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별일 없는 듯(19p)’ 상대를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다는 점. 소설의 복선이자 전체 플롯을 아우르는 이 ‘거짓말’이라는 수단은, 주인공 은미와 고모의 삶은 물론, 독자의 영역까지도 은밀하게 아우릅니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이야기와 공상을 좋아하다가, 결국 정한아의 『달의 바다』에까지 이르렀을 독자들 또한, 어떤 거짓말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테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거짓말이 아닐까요. 실은 꿈에서 깬 지 오래인데, 꿈꾸는 것이 더 피곤해진 지 한참인데. 현실의 발길질에 채이고 온몸이 노곤해져서는, 그저 잠만 자고 싶어진 지 오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속에—저 달의 뒤편 비밀기지에 살아요, 라고 슬쩍 농을 친다는 혐의.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이에게도, 뻔뻔하게 농을 치며 즐거워한다는 혐의. 이 혐의를 혹자는 낭만, 이라 부르더군요.
우리는 수없이 낙방합니다. 우리는, 그토록 꿈꾸던 우주정거장에는 발끝도 딛지 못한 채 하루종일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양인 노동자입니다. 5년째 시험에 떨어지는 백수입니다. 여자가 되고싶은 소설 속 주인공의 친구 ‘민이’는, 제자신을 ‘태어날 때부터 여자가 되는 것에 낙방한 존재’라고 일컫습니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전신지방흡입수술을 비롯해 여기저기 손 봤음에도 불구하고, S라인 미녀가 되는 것에 낙방한 전적이 있네요. 평생 가는 수술 후유증도 얻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 저는 꿈을 꿔요.(61p)’ 필자는 수술 후유증으로 아플 때마다, 그러니까, 온 몸의 통점으로 현실을 감각할 때마다, ‘멈추지 않고 다시 꿈을 꾸려고 이불을 끌어당겨요.(61p)’ 더욱 뻔뻔하게, 스스로를 빅뷰티(Big beauty)라고 칭하면서, 꿈결에 살고 싶어서요.
꿈에서 깨어나고도 ‘손 안에 든 돌멩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151p) 그것을 운석이라 부르는 것.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는(161p) 것.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161p)’는 것을, 내내 아파하며 배워가는 것. 그렇게 뻔뻔하게 꿈꾸는 것이, 진실이나 거짓의 여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삶. 아마 우리 모두의 이야기겠죠. 여러분은 달을 즐겨 바라보시나요? 무엇에 낙방하셨고, 어떤 꿈을 꾸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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