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15
이한솔 그림, 이채 글.기획 / 리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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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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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

이채 글, 이한솔 그림, 리젬, 2015.6.5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는 독특한 동화책입니다.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그림책’을 표방하는만큼 치마를 좋아하고 8-10세 여아를 대상으로 한 사과소녀 선발대회에 나가고 싶어하는 초등학교 남학생 꽁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꽁치가 독특하기 때문에 이 책이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책은 치마 입기 좋아하는 '독특한' 남자아이에 대한 관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된 꽁치의 일상적 고민을 친구처럼 들어주는 교환일기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첫 페이지는 “꽁치는 일어나서 / 샤워를 하고 / 치마를 입고”라는 꽁치의 더없이 일상적인 아침으로 시작합니다. 첫 페이지를 펴면서 독자는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할 뿐인, 사랑스러운 꽁치의 삶에 물들어갑니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일상(성)’이라면, 다른 하나의 축은 가족과 친구입니다. “치마 입은 꽁치가 제일 예뻐”라고 말해주는, 치마를 좋아하는 꽁치에게 치마를 구해다주는, 꽁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채]의 말대로 “꽁치에게는 ‘꽁치가 좋아하는’ 치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꽁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책은 그 중요한 사실을 함께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종족의 문학—성소수자 당사자들만을 위한 퀴어문학—을 넘어선 진짜 좋은 아동문학을 만나게 됩니다.

  꽁치 덕분에 다시 깨닫습니다. 옷장의 딜레마, 외모의 구속이란 얼마나 우습도록 가벼운 것인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사랑스럽게 응원하는 꽁치의 이야기, 많은 분들이(특히 어린이들!) 읽어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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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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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창비, 2015.5.29

 

 

  5월 발간, 김려령의 <트렁크>는 트렁크를 들고 홀연히 여행을 떠나는 소설이 아닙니다. 주인공 ‘인지’가 일하는 곳인 NM(New Marriage)은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로, 회원들에게 아내와 남편을 기간제로 임대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일명 계약 결혼이죠. 결국 <트렁크>는 인지가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끝낼 때마다 여닫는 트렁크 안, 결혼과 사랑과 삶에 대한 비밀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계약 결혼을 마치고 회사에 돌아온 인지. 마지막 남편이 재계약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시 다섯 번째 결혼을 시작하는데요, 나름대로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는 인지의 앞에 능글맞은 스토커같은 남자 ‘엄태성’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나-남편-엄태성-NM회사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언뜻 호러 스릴러물(!)을 연상시킬 만큼 지극히 ‘성인 소설’적입니다. 동시에 20대 후반 여성들이 쏟아내는 각각의 섹스론은 경쾌한 키치물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실패자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분위기도 풍겨내면서, “김려령 성인소설”이라는 기묘한 마케팅 문구를 단번에 해독하기 어려울 만큼 혼합적인 서사를 보여줍니다. 작가의 전작 중 하나인 <완득이>에서 보았던 발랄한 문체를 벗어나지 않는데 내용은 섹스와 죽음을 다루면서 독자를 약간 헷갈리게 하기도 하구요.

 

  그렇게 이 책에 약간의 불신(?)이 생길 때 즈음, 퀴어 서사가 튀어나옵니다. 먼저 인지와 절친 ‘시정’, 죽은 친구 ‘혜영’ 사이의 레즈비언 서사가 있는데, 일명 진성 이성애자인 인지에게 시정이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오고, 고등학교 때 시정과 혜영이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이성애자 화자의 ‘알고보니 절친이 레즈비언이고, 날 짝사랑해’라는 서사는 매우 뻔해 보이지만, 시정의 대응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보여집니다. “단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일 뿐인데, 특이한 제스처를 취한다던가, 독특한 취향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은 눈치챌 수가 없어요. 시정은 아주 평범한 아이에요”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참고해 보면, 동성애자 시정을 일부러 소설 전체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정은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지도, 강요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죠. 다만 이 소설의 화자가 이성애자이다보니, 이성애 화자가 주위의 ‘가깝지만 먼’ 이방인으로서의 성소수자를 관찰(?)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랑을 하는 사람, 대하기 다소 어려운 이방인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인지는 여자끼리의 섹스를 상상하지 못하며, 시정의 사랑을 (언제나) 안타깝고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극히 까다로운 독자인 제게 시정의 짝사랑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대학시절 인지의 연인이었던 남성 양성애자 선배 이야기였습니다. 국내에서 남성 양성애자 정체성이 나온 예가 거의 없기도 하고,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의 양성애자 차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거든요! (너무 짤막해서 아쉬울 정도.) 사실 가장 불만인 것은, 책에서 ‘양성애자’라는 단어를 분명히 명시하는데도 불구하고 포털의 모든 책소개에선 ‘게이’나 ‘동성애자’로만 묘사된다는 거죠.

 

  레즈비언 친구들과 양성애자 전남친을 둔 시정은, 이성애 결혼제도 안에서 (본인이 말하듯) 신개념 성노동을 수행하면서, ‘모든 사랑’을 적극적으로 응원합니다. 작가가 말한대로 이 소설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김려령의 <트렁크>를 읽으며, 우리의 사랑들을 볕에 보송하게 널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런 사랑, 모두 꺼내어 볕에 널고 싶다. 누구라도 보송보송 잘 마른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사랑 때문에 우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p.s. 소설이 딱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결말이 다소 생뚱맞더군요. 당신에겐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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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종말이 오다 - 종말문학 공모전 신체강탈자 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3
최경빈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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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줄거리

 

 어느 날,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남자로 변하기 시작한다면? 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지, 또 각자의 종말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써낸 종말 문학이다.

 

 각각 대학생, 레스토랑 사장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 아프리카 BJ를 직업 삼아 살고 있는 여자, 게임 폐인 등의 시선에서 하나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 된다. 각자의 이야기마다 '여자가 남자가 된다'는 '종말'에 대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용납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쾌락적으로 받아들이며, 누군가는 그 안에서도 인간성을 지키려 들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사랑한다.

 

 

 1. 감상평: 탐욕에 밀려 종말로 떨어지다

 

 읽는 동안 '현실에서도?' 라는 물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다 읽은 후에는 '현실에서도'라고 결론짓고 말았다.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왜곡한 비현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설이 현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나 싶다.

 

 현실에서는 '재용(대학생)'이나 '인석(레스토랑 사장)'이 대부분일 것이고, 그 외에는 '박장로(전직군인)'나 '목사'나 '흉터', 혹은 '클럽을 찾아오는 남자들' 밖엔 없을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에. 모두 '수희(BJ콜라)'가 되어 육체의 쾌락에 몸을 맡긴 채 흐느적거리든가, 대체할 '수단'인 '게이'나 되어갈 것이 뻔하다. 현실에 '상욱(게임폐인)'은 없다.

 

 결국 종말을 가져온 것은 '나와 같은 성'이 아니라,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이었다.

 

 실제로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톱은 여전히 투명한 매니큐어가 칠해진 채 반짝이고, 거문고를 타는 손길은 변함 없는 ‘그녀’의 것인데. 오로지 ‘나’의 시선만이 변했다. 사람을 구성하는 겉껍질로부터 파생된 편견에 잡아먹혔다. 종말은 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딸을 낳았다. 그러나 '인격'은 '탐욕'에 먹혀 모두 죽었다. 정확히는, '고정관념'에 짓눌려 스스로의 이성을 버렸다. 남자의 성기가 항상 여성의 성기를 갈망한다는 그 지독한 고정관념과 무절제한 탐욕이 종말을 불러왔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종말이 왔다.

 

 

 2. 감상 포인트

 

 하나, 고정관념과 편협함은 모두의 것

 

 필자가 이 소설에서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그래서 필자를 소설에 몰입하게끔 했던 요소는 아래와 같다.

 

 내 여친(썸녀, 짝녀, 엄마, 부인)이 남자가 된다니! 안타깝게도, 필자 역시 고정관념의 노예이지 않았나 싶다. 만약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 모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소설 속 남자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필자는 과연 쿨하게 ‘여남’을 인정하고 그들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이성애자에게 '너는 편협해!'라고 말하면서, 이쪽 역시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않은걸까?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때로는 배척하던 것으로부터 배워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둘, 트랜스젠더에 대해

 

 2000년대 초반, 사람들은 말했다. 뭐? 남자가 여자가 된다고? 여자가 남자가 된다고? 말세야, 말세! 그러나 결국 종말은 오지 않았다. 모두의 종말은 오지 않았으되, 개인의 종말이라면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도래했다. '여자'가 남자가 되는 세상에서, 남자에서 여자가 된 사람들은, 아니 처음부터 여자로 태어나 드디어 제 성별을 찾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그들의 몸을 다시금 남자로 만든다. 알 수 없는 세상의 의지-세상의 모든 여자가 남자가 될 지어다!-는 그들을 '여자'로 봐주었던 것일까? 작가가 어디까지 의도하고 기획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세상은 언제나 그들에게 잔인하다.

 

 셋, 언제쯤 종말이 올까?

 

 2000 1월 1일을 살아서 맞이했던 사람들 중 하나로서, 종종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세상은 언제쯤 종말을 맞이할까? 그리고 요즈음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망했어! 그럼에도 사람은 살아 있고, 그럼에도 인격이 남아 있으며, 그럼에도 필자는 미래를 꿈꾼다. 살아 숨쉬는 한 종말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저 종종 생각해보는 것이다. 종말은 우리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마음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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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무슨 상관이람
엘렌 위트링거 지음, 정소연 옮김 / 궁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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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무슨 상관이람>

엘렌 위트링거, 정소연 역, 궁리, 2013

 

 

  2001년 미국에서 초판 발간, 국내엔 2013년에야 번역 출간된 엘렌 위트링거의 <이름이 무슨 상관이람>은 퀴어문학과 청소년문학에 대한 편견을 동시에 뛰어넘는 수작이다. 이 책은 미국의 한 바닷가 마을 스크럽 하버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열 명의 청소년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명의 화자를 내세우지 않은 것은 ‘전형(stereotype)’을 넘어 ‘사람’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선택한 기법이다. 결국 ‘이름’이란 키워드를 통해, 이름에 부착되는 필연적인 정형을 탐구하고, 이름 이전에 존재하거나 이름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을 꽤나 치열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게이가 등장하기 때문에’ 퀴어문학이라는 단순한 정의를 넘어서서 정체성 자체를 질문하게 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퀴어문학으로 볼 수 있겠다. 소설의 모든 인물은 이름, 즉 정체성을 탐구한다. 따라서 모두가 퀴어하며, 이 소설 역시 더없이 퀴어해진다.

 

  소설엔 10명의 화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사는 마을의 이름도 일종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결국 이름이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묶어주는 빵끈^_^같은 역할을 한다. 마을, 국가, 성별, 인종에 대한 이름은 당연히 그렇지만, 각각의 사람에게 부여되는 이름, 고유명사도 마치 그 한 개인을 완전히 설명해주는 듯한 또다른 대(표)명사와 같다. 내가 부여받거나 선택하거나 반복적으로 ‘숨쉬는’ 이름 혹은 정체성(보배, 여성, 레즈비언, 한국인 등등)은 엄밀히 따지면 내게 매 순간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와 상황에 따라 전면화된다. 그렇기에 “모두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오닐’의 말에 “그건 정체성이 아니야. 정형일 뿐이지”라고 답한 크리스틴의 말은, 정체성의 신화를 재고하게 한다.(54쪽)

 

  “네가 너라는 사람이기에, 나는 나”이다.(112쪽) 모든 이름과 정체성은 상대적일 때에만 유의미하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름과 정체성은 결국 우리가 그토록 욕하는 정형성에 적극적으로/필연적으로 기대어 있다. 내가 이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임을 깨닫거나, 획득하거나 선언할 때, 그때의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극히 정형적이다. 이러한 정형성을 극복하고자 ‘퀴어’란 쿨한 이름이 생겼지만, 그 역시도 퀴어 아님에 대한 정형적 반대항이다. (또한 퀴어는 지나친(?) 다양성을 표방하는 탓에 집단을 하나로 묶어주는 빵끈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욕을 먹어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세상에 ‘맞거나’ ‘옳은’ 이름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두 필요에 의해 이리 붙였다 저리 붙인 결과처럼 보인다. 이름의 상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닐’-‘퀸시’의 에피소드이다. 남동생 ‘오닐’의 커밍아웃 이후 ‘퀸시’가 선 자리는 급격히 출렁이고, “동생이 자기가(이 강조표시는 중요하다) 누구인지를 선언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234-235쪽) 이름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름은 나와, 내가 속한 모든 집단을 묶는 빵끈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름이 갖는 지위와 우리가 이름에 갖는 태도는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름이 절대적이고 완전하다는 신화는 (익히 아는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한편 작가는 이미 여러 곳에서(146, 152, 160, 174쪽 등) 이름의 신화에 무감각해져 저지르는 실수, 편견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이 소설 전체는 이름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도록 돕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름은 쓰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고까지 여겨진다. 이름이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도 물론 아니다. 지긋지긋한 이름에 염증이 느껴져 극단적인 해체론에 가까운 지향을 갖고 있을 때에도, 인간을 성별/인종/국가 등의 이름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었다. 급진성을 오해했던 시절에 상상했던 ‘이름 없음’의 천국 역시 또 다른 신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양한 퀴어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점점 이름이 늘어나고 있는 것(LGBTQIAQP…)도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 속에서 이름은 때로 5G 이상의 무게로 압박을 주고, 때로는 무중력에 가까운 가벼움으로 흩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이름과 정체성은 양자택일이라 선택의 폭이 매우 좁은데, 체감하는 무게는 스스로 구성해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 스크럽파와 폴리파라는 다소 유치한 싸움의 형국에 수동적으로 휘말리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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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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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정한아, 문학동네, 2007년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7p)’

꿈결이었죠. 정한아의 『달의 바다』를 펼쳐들고 얼마간은 말이에요. 이 책의 1장, 그러니까 1997년 1월 17일자 고모의 편지를 통해서, 정한아는 적확하고도 감미로운 문체로 그려내고 있어요. 우주선의 첫 비행을 말이에요. 영화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로 접한 우주선보다 실감나게 말이죠. 별과 별 사이를 헤엄쳐본 이의 편지가, 이 책에는 일곱 편이나 수록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1장을 읽으며, 짐작했어요. 꿈결이겠구나.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자신의 비행을 속삭여주는 화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동안은, 꿈결의 독서가 되겠구나. 나 또한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둥둥 떠다니며 우주 유영을 하듯—지금, 여기, 이 순간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 그런, 꿈결의 이야기겠구나.

 

그런데 말입니다.(김상중톤) 책에 한참 코를 박고 있으려니, 아차차. 머지않아 작가 정한아는 독자의 정수리를 향해 각얼음 가득 채운 찬물 한 바가지를 퍼부으며, 이러더군요. 꿈 깨.


우주비행사인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들은, 우주에 직접 다녀와본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법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이를테면 무중력에 익숙해진 비행사들은 지구로 복귀한 뒤에도 컵이나 그릇을 자꾸 허공에서 놓치고 깨먹게 된다는군요. 주인공 ‘은미’는 여전히 이따금 컵을 깨먹고 있을지도 모르는—어쩐지 우주 냄새가 날 것 같은—우주비행사 고모를 찾아 미국으로 떠납니다. 다시 만난 고모는, 당연히 킹왕짱 멋져보입니다. 우주를 다녀온 것도 모자라, 미국 NASA에서 존경 받는 연구자로 자리잡았다고 하니까요. 우리가 아는 그 미국...! 그 NASA...! (S#1.미국병, 사대주의, 친미주의 등등으로 필자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미국 가보고 싶다. 뉴욕에서 비싼 브런치 먹어보고 싶다. 스프링 시즌의 릴랙스한 위크앤드 블루톤이 가미된 원피스로 쉬크의 진수를 보여주며 홈메이드 베이크된 베이클에 후레쉬 푸릇을 곁들여 딜리셔스한 브렉퍼스트를 즐겨보자.)

 

그러나 주인공은 곧 마주하게 됩니다. 거짓말. 『달의 바다』를 관통하는 키워드, 거짓말과 말이죠. 네. 『달의 바다』는 그야말로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연속해서 등장하는 거짓말들이 독자의 정수리를 내려치죠. 거짓말의 정체는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독자분들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고모의 편지에 등장하는 ‘조엘’이라는 인물—우주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비극적으로, 고로 낭만적으로 비행사 자격을 박탈당한 인물은, 실은 슬리퍼 장사꾼이었습니다. 우주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알콜 중독자였죠.

 

제 기능을 다 하는 복선이란, 늘 반전을 접하고 난 뒤에야 헤아려지는 법입니다. 주인공 은미가 어릴 적부터 고모를 꼭 빼닮았다는 점. 거짓말을 하는 데 능했다는 점. ‘가족이라 해도, 낭떠러지 같은 절망 속에 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별일 없는 듯(19p)’ 상대를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다는 점. 소설의 복선이자 전체 플롯을 아우르는 이 ‘거짓말’이라는 수단은, 주인공 은미와 고모의 삶은 물론, 독자의 영역까지도 은밀하게 아우릅니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이야기와 공상을 좋아하다가, 결국 정한아의 『달의 바다』에까지 이르렀을 독자들 또한, 어떤 거짓말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테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거짓말이 아닐까요. 실은 꿈에서 깬 지 오래인데, 꿈꾸는 것이 더 피곤해진 지 한참인데. 현실의 발길질에 채이고 온몸이 노곤해져서는, 그저 잠만 자고 싶어진 지 오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속에—저 달의 뒤편 비밀기지에 살아요, 라고 슬쩍 농을 친다는 혐의.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이에게도, 뻔뻔하게 농을 치며 즐거워한다는 혐의. 이 혐의를 혹자는 낭만, 이라 부르더군요.

우리는 수없이 낙방합니다. 우리는, 그토록 꿈꾸던 우주정거장에는 발끝도 딛지 못한 채 하루종일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양인 노동자입니다. 5년째 시험에 떨어지는 백수입니다. 여자가 되고싶은 소설 속 주인공의 친구 ‘민이’는, 제자신을 ‘태어날 때부터 여자가 되는 것에 낙방한 존재’라고 일컫습니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전신지방흡입수술을 비롯해 여기저기 손 봤음에도 불구하고, S라인 미녀가 되는 것에 낙방한 전적이 있네요. 평생 가는 수술 후유증도 얻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 저는 꿈을 꿔요.(61p)’ 필자는 수술 후유증으로 아플 때마다, 그러니까, 온 몸의 통점으로 현실을 감각할 때마다, ‘멈추지 않고 다시 꿈을 꾸려고 이불을 끌어당겨요.(61p)’ 더욱 뻔뻔하게, 스스로를 빅뷰티(Big beauty)라고 칭하면서, 꿈결에 살고 싶어서요.

꿈에서 깨어나고도 ‘손 안에 든 돌멩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151p) 그것을 운석이라 부르는 것.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는(161p) 것.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161p)’는 것을, 내내 아파하며 배워가는 것. 그렇게 뻔뻔하게 꿈꾸는 것이, 진실이나 거짓의 여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삶. 아마 우리 모두의 이야기겠죠. 여러분은 달을 즐겨 바라보시나요? 무엇에 낙방하셨고, 어떤 꿈을 꾸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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