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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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일, 또는 어떤 삶에 익숙했던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일, 또는 전혀 다른 삶이 발생한다. 이전 것은 최악이고, 다음 것은 최선이다. 인생이 역전되었을 때, 기쁨만큼 들이닥치는 것은 불안이다. 이렇게 좋은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날 리가 없어. 이렇게 좋은 사람을 내가 만날 리가 없어. 이렇게 선한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리가 없어.


이 삶이 거짓이면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삶이 거짓이기를 바란다. 하루 빨리 거짓이 밝혀지면 언제 이 삶이 끝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이 사람들이 본색을 드러날까, 언제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인 걸 알아볼까, 언제 나를 비난하고 경멸할까, 겁먹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삶이 진짜일까? 실감이 나지 않는 날에는 자해를 한다. 그것은 매일이다. 매일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에 매일 팔을 긋는다.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다.



2.


네 명의 친구들이 있다. 배우 지망생 윌럼, 로스쿨 학생 주드, 예술가 제이비, 건축을 공부하는 맬컴. 넷은 대학 신입생 시절 우연히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면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넷 사이의 접점 또는 공통점이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의 과거를 몰랐고 각자 밝히기로 한 과거에 대해서만 알 수 있었다. 한편,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전 재산이었기에 과거는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무수한 기회가 주어졌고, 그 무수함이란 정녕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굴곡이야 있었지만, 40대에 접어든 네 사람은 모두 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잃은 것, 또는 그 이전에 이미 잃어버린 것은 흉터처럼 장애처럼 남아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처럼’ 남아있고, 주드에게는 아니다.


야나기하라는 특히 주드에게 초점을 맞춰 소설을 진행한다. 주드의 이야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을 소비시키는 포르노로 여겨질 만큼 혹독하다. 그럼에도 “그는 낙천주의자였다. 매달, 매주, 그는 눈을 뜨고 세상에서 또 하루를 살기를 선택했다. 때로는 모든 게, 그렇게 잊으려 애쓰던 과거조차 회색 수채물감처럼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고통이 너무 심해 다른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끔찍한 기분일 때도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런 주드의 곁에서 윌럼은 긴 우정을 선택한다. 윌럼에 따르면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윌럼과 애인이 미래를 계획하고 상상할 때조차, 윌럼은 그 가족 안에 주드를 포함시킨다.



3.


윌럼과, 또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염려 안에서, 주드가 만나게 되는 사람은 어이없게도 주드가 대학 이전에 만난 사람들과 같은, 학대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연인에게 학대받았다는 사실이 발각되고 그 폭력적인 관계가 끝나면서 그는 “자유”를 느낀다. “다시는 사람을 사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했다고. 학대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고,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사람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그러나 몇 가지 우연의 일치로 그의 자살은 시도에 그친다.


주드가 자살을 시도했을 때 영화촬영차 해외로 떠났던 윌럼은 주드를 돌보기 위해 공식적으로 휴식기간을 가진다. 그리고 예전처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불현듯 윌럼은 주드에게 연애감정을 느낀다. 이전에는 분명히 아니었는데, 이전 애인들은 모두 여자였는데, 심지어 게이인 친구 제이비와 호기심으로 애무를 했을 때 서로 전혀 감흥이 없었는데. 윌럼은 자신의 고백이, 그리고 연애로 새롭게 시작한 관계의 전개가 주드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고민한다. 그 후, “두려운 섹스 그 자체는 없되, 서로를 사랑하고 섹스를 하고 있는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온기가 주드와 윌럼의 관계에 부여된다.


그러나 곧 너무나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사랑의 증거인 양,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섹스는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러 등장한다. 주드는 “윌럼 옆에서 잠을 깨는 매일 아침을 위해, 윌럼이 주는 모든 애정을 위해, 그와 같이 있는 편안함을 위해서 참을 수 있었다.” 다만 “윌럼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행복한 시절”, 주드의 몸에는 스스로 낸 상처가 터무니없이 늘었지만, 결국 윌럼은 섹스를 주드와의 관계에서 포기하고, 둘은 오롯이 다정한 연인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주드와 윌럼의 관계는 보스턴 결혼[1]과도 유사하다. 자해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많이 줄었고, 주드는 여전히 건강하지 않지만 자상한 양부모와 상냥한 애인과 함께 삶을 지속한다.



4.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진술되는 주드의 심리 탓에 그가 결국 자살하지 않을지 마지막 장까지도 걱정한다. 위에서 요약한 줄거리는 소설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으며, 딱히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함은 아니지만 주드의 삶의 결말은 적지 않았다. 다만 소설을 다 읽고도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던 주드 시점과 스스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주드를 이해하지 못한 양부 헤럴드, 친구였고 애인이었던 윌럼 시점 사이의 간극이다.


그들 사이에는 거대한 유리벽이 있어 애정은 도달하지 못하고 반사되기만 한다. 그 벽은 무너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달하지 않는 애정을 기어코 전하고자 애쓰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전해지지 않는 애정이지만,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모습은 벽의 건너편에서도 보인다. 그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어느 편에서도 마음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리틀 라이프』는 치유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는 삶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사람들의 기록으로 채워진다.



5.


중앙일보에서는 <동성애자끼리 우정은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리뷰를 썼다.[2] 퀴어 서사를 ‘퀴어 서사임에도 불구하고’라거나, ‘이것은 퀴어 서사가 아니다’라고 평하는 것만큼이나, 작가가 부각하지 않은 소수자성에 방점을 찍어 읽는 것 또한, 의도적인 오독이다.[3] 물론 리틀라이프는 퀴어 서사이다.


이 소설을 많은 사람에게 두려워하면서 권한다. 등장인물의 육중한 고통이 독자에게 삽화의 계기가 될까 두렵지만, 이 소설을 읽는 누구나 행복을 보장받는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있음을 확신하며, 그러나 치유에 대한 희망 없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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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죽음
리사 오도넬 지음, 김지현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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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죽음'은 자매인 두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전개되는 소설이다. 자매는 거침없고 날 것에 가까운 표현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주변 인물들에 관하여 묘사한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퀴어 캐릭터(주요인물)가 등장한다. 게이 노인 레니와 청소년 레즈비언 킴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기꺼이 자각하고 인정하며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더불어 레니와 킴은 소설 ‘벌들의 죽음’속의 두 주인공인 마니와 넬리의 가장 큰 조력자다. 진심으로 주인공 자매를 위하는 사람들로 바로 그 두 명의 퀴어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킴과 레니는 마니와 넬리와 함께 성장하고, 진심을 나누고, 그렇게 스스로와 자매를 돕는다. 물론 든든한 조력자라고 해서 킴과 레니가 문제없는 캐릭터인 것은 절대 아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 소설 속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결함이나 성장 또한 당연하게 여겨진다.

 

레니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관하여 항상 가족들에게 외면을 당해왔다. 레니의 많은 누나들은 여러 잘못이나 일탈을 저지르고 레니에게 찾아와 하소연하곤 했지만 정작 레니가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레니는 여러 종류의 ‘관계’에서 상실감을 맛본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필연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레니에게 따라서 연인 조셉은 형제이자 사랑이자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레니의 ‘너 없이 이 길을 걸어야 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p.94)’라는 고백은 연인이라는 관계를 넘어선 조셉과의 유대감을 절절히 말해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레니를 통해 이야기한다. ‘유대감은 중요한거야. 그게 있어야 삶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어떻게든 계속 걸어 나갈 수 있으니까.(p.94)’ 라고. 작가가 이야기했듯, 레니는 보호와 사랑의 손길이 형상화된 인물이다.

 

한편 레즈비언인 킴은 또래 친구인 로나와 연애를 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킴을 바라보는 친구 수지의 시선은 ‘경멸’이다. 킴이 약을 먹지 않아 그 부작용으로 동성애 성향이 나타난 것이라고, 대놓고 관계가 비정상적인 것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후에 학교에서도 커밍아웃을 당당히 하게 되는 킴이지만, 모두가 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있을 때 정작 부모님은 그녀를 외면한다. 킴은 자신을 방치해온 부모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실망감을 넘어선 좌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킴은 레즈비언인 자신의 존재를 미워하지 않고 스스로 긍정해나간다. 원래 남성적이라는 이유로 ‘킴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킴은 커밍아웃 이후 “과거의 킴보는 자기 자신을 싫어했던 여자고, 지금의 킴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라며 ‘킴’으로 불러달라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자신을 ‘고정관념의 틀’에 가두지 말라고 선언하면서.(p.140)

 

레니는 킴의 존재를 이해하고 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 가운데 한 명이다. ‘늘 이런저런 일로 분노에 차 있는 것 같고. 아마 여성동성애자들의 삶이 남성 동성애자보다 여러모로 더 각박하기 때문이겠지. 세상은 여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니까. 보통 이성애자 남자들은 “여자들이 여자가 아니라면 나는 남자 노릇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하는 식의 위기감을 느끼잖아. 그래서인지 그들은 레즈비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해. (p.113)‘ 라고 그는 킴에 대해 독백한다.

 

한편 레니는 자신과 다른 세대인 킴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예컨대 킴을 생각해봐. 그 아이는 동성애자인데, 열여덟 살도 안 된 나이에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자유를 갖고 있잖아. 내가 그 나이였을 땐 부모님께 커밍아웃하는 건 엄두도 못했어.......(중략) 반면 킴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동성애자 지원 동아리에서 킴을 도와주고, 체육 수업이 끝난 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하더라고.(p.122)’. 독자들은 레니의 독백을 통해서 세대가 달라지고 변화하며 무척이나 순탄치 않았던 길들이 조금씩 열려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이 소설에는 자신을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하는 퀴어 캐릭터도 등장한다. 킴과 연애를 했던 여자 친구 로나는 킴에게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로나와 다투던 킴은 ‘네가 보지를 빠는데 그럼 레즈비언이지 뭐야?’라는 말로 로나의 정체성을 희석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 와중에 친구 수지는 그렇게 떠드는 킴과 로나를 창피해하며 자신마저 레즈비언으로 볼까봐 전전긍긍해한다. 작가는 이런 장면을 통해 일상에 내재된 바이포빅을 비롯한 퀴어포빅, 의식할 새도 없이 튀어나오는 청소년 사이의 혐오발언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레니의 연인 조셉에게도 게이인 외삼촌이 있었다. 외삼촌 에드워드는 거의 집안에서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났고 두려움에 젖어 진실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레니는 자매를 에드워드 외삼촌의 별장으로 데려와 편안한 시간을 보내게 도우면서, 별장 안에 켜켜이 쌓여있는 조셉과의 추억을 생각하고 어루만진다. 에드워드 외삼촌에게 헌사를 바치는 대목은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분이 평생 기다렸을 위안을, 그분이 생전에 알지 못했을 솔직한 삶을, 그분이 천 번쯤 꿈꿨을 사랑을 우리는 이 바닷가로 가져왔으니까. 누군가에겐 사랑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었던 사랑을 우리는 열렬히 탐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이 맞닿아 꿰매어진 자리를, 그 행운의 자수가 놓인 바늘땀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이.(p.180)’

 

소설 중후반부 즈음, 레니는 자매의 친족인 로버트에게 아웃팅을 당한다. 레니의 정체성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넬리는 충격을 받는다. 넬리는 처음에는 귀를 틀어막고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야. 나는 성적으로 남자를 원하고, 남자와 낭만적으로 만나기를 원해. (p.312)”,  “조셉은 내 연인이었다”라고 절절히 고백하는 레니를 보고 넬리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넬리와 레니가 부둥켜안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은 이 작품 속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넬리는 레니의 조셉을 기억하겠다고 속삭인다. 친구의 연인을 기억하는 것,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바로 그 순간의 소중함을, 레니와 넬리를 통해 작가는 보여준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잔혹한 현실을 들추어낸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퀴어들이 사회에서 겪게 되는 차별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고발소설로, 주인공 자매의 서술을 통해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을 신랄하게 까발리며 퀴어포빅에 대해 폭로한다. 벌들의 죽음은 너무나도 어둡지만,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유대와 사랑이었다. 친구가 되는 것, 서로를 보호하는 것,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자매를 아껴준 레니의 사랑 덕에 결국 아이들이 자신의 세상을 향해 뛰어나갈 수 있게 되었고, 레니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연인 조셉과 나눈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 때문이었으니까. 모든 사랑은 사랑으로 연결되고 돌아온다. 이 희망적이고 이상적인 순환 고리 속에서 마니와 넬리는, 또 책을 읽는 우리는 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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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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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혜안'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수진'을 떠나면서 남긴 편지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수진'은 '혜안'을 추억하며 '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고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절규하는 여자가 되게 해준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혜안은 나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p.135)'라는 말을 남긴다. '혜안'은 어떤 인물이길래 이토록 절절한 평을 남기게 만드는 걸까? 이 리뷰는 '혜안'이라는 인물이 '수진'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수진'과 '혜안'은 ''절규'라는 간단한 이름으로 열어놓은 인터넷 카페 하나를 공동으로 운영하(p.139)'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바로 사람들의 ''절규를 대신해(p.139)'주는 것이다. '수진'은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이 결코 토해내지 못한 것들을 대신 토해주고 돈을 벌었다(p.135)'고 말하고 있으며, '절규하는 여자는 나였지만 기묘하게도 혜안이 없으면 그 일은 불가능(p.135)'했다고 고백한다. '수진'은 '내가 영문 모르고 굿판에 불려와 사지를 덜덜 떨며 신내림을 받아내는 초짜배기 강신무였다면, 혜안은 매번 내게 잔인하고도 끔찍한 신병을 내려주는 베테랑 샤먼이었다(p.142)'고 표현한다. 즉 둘은 최고의 파트너였고,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행할 수 없던 일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작중 내내, 주인공인 '수진'이 가진 절규하는 능력은 스스로의 입을 통해 설명되고 있지만 '혜안'이 가진 기묘한 능력은 설명되지 않고 있다. 대신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신기하게도 '수진'은 '혜안'은 처음 만난 날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뭐랄까, 그녀는 내가 취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다른 차원에서 떨어진 비현실의 스트레이트잔 같았으므로.

(…) 그녀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예뻤다. 나는 처음 보는 그녀에게 일종의 매혹을 느꼈으나, 그 매혹은 어딘가 지독하게 답답한 것이었다.

 

 '수진'이 느낀 이 '지독하게 답답함(p.149)'은 바로 '혜안'의 성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다. '혜안'의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으며, 그녀는 '28년 동안 한 번도 부모님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p.151~152)'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혜안'은 하필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촌 동생을 사랑(p.151)'하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혜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번 숨을 들이마(p.151)'쉬거나 '둘이서 손을 꼭 붙잡은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시간이 멈추기만 기다(p.152)'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비밀스런 연애가 발각되면서 두 집안은 난리가 난다. 그때를 회상하며 '혜안'은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 목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존재 자체로. 이십몇 년 동안 한 번도 말해보지 못한 내 진짜 이름을 크게 써서 엄마 아빠 눈앞에 흔들어 보이고 싶었어.

 

 '혜안'은 며칠 뒤 감시를 피해 함께 근신 중이던 사촌 동생에게 몰래 전화를 걸었고, 둘은 도망을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한 날 새벽, 사촌 동생은 나오지 않았(p.153)'고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촌 동생이 선을 보았으며 다음 달에 결혼까지 한다는 소식을 듣고야 만다. 그 얘기를 듣던 '수진'은 '혜안' 대신 소리를 질러버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바보야, 멍청아! 네가 거길 왜 가니!

 

 그리고 곧 '수진'의 서술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의 첫 의뢰인인 셈이었다(p.155)'고. 이 사건이 일어난 뒤 곧바로 둘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절규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했다. '혜안'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사람과 닮은 사람인 '수진'을 통해 성 소수자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답답함을 해소시키려 했다. 자신의 절규하고픈 마음을 의뢰인들에게 투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혜안'과 만남을 가진 뒤에도 '구십구 퍼센트 스트레이트였(p.153)'던 사촌동생처럼, '수진' 역시 남자인 의뢰인과 사귀게 되었다. '수진'은 '꼭 그 남자 때문은 아니었다(p.175)'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결국 서로 목적이 뚜렷하면서도 진정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었던 '혜안'과 '수진'의 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었으나, '혜안'은 '수진'이 그 의뢰인과 사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인다.

 

(……) 귓불에 매달린 피어싱을 쑥스럽다는 듯 만지작거리면서, 야, 근데 솔직히 얼굴은 좀 아니더라, 너 취향 좀 이상해, 하고 쿡쿡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한차의 침묵 끝에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가 돌아왔어. 그러니까 나도 돌아갈게, 갈 때 되면. 

 

 하지만 '수진'은 혜안의 자깁에서 자신과 '퍽 닮았지만 아무런 흠집도 없는(p.176)' 그리고 '결코 혜안에게 돌아오거나 할 얼굴(p.176)'이 아닌 사촌 동생의 사진을 발견하면서 '혜안'이 자신과 함께 있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혜안은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자신의 사촌 동생이 울고 소리치고 온몸을 떨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너도 사실은 아팠겠지, 하는 남모를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혜안과 나는 서로를 이상한 청동 거울처럼 이용하는 사악한 흑마법사들에 불과했을까. 붙들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한 번도 우리에게 귀기울여주지 않았던 이들을 거울 위에 불러내, 목소리로 혹은 온몸으로 그 얼굴 위에 날비린내 나는 것들을 퍼붓는.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결코 치유 따위의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시큼하고도 유쾌한 위안이었고 먹기 싫은 쓴 약을 삼키는 가장 달콤한 방식이었다고. 하지만 입을 벌리고 있어도 그런 말은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소리치는 건 그렇게도 쉬웠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진' 또한 그런 '혜안'에게 위안을 얻고 있었다. '수진'에게 있어서 '혜안'은 '가장 끔찍한 것들이 조금씩 배설되는 것을 눈 돌리지 않고 지켜보아준 유일한 사람(p.156)'이었으며 '수진'을 욕망했지만 '수진'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를 원하지도 않을 거고. 우리 서로 촌스럽게 굴지는 말자. 나도 그러지 않을 테니까(p.159)'라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진'은 '혜안'이 잠든 모습에서 그녀의 본모습을 본다. '혜안'은 '(……) 파충류의 잔인하고 공허한 눈동자가 아니라, 험악한 세계를 견디기 위해 순한 나비가 제 날개에 새겨 넣은 커다란 가짜 눈동자(p.178)'를 가진 뱀눈나비였다. '수진'은 '혜안'이 떠난 뒤 그녀와 함께 개설했던 '절규' 카페를 폐쇄하며 '이제 곧, 나비들이 있는 곳에도 봄이 오겠지(p.179)'란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은 2006년에 쓰여진 작품이다.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혜안'은 소리 없는 절규를 멈출 수 있었을까? 과연 나비들이 있는 곳에도 봄이 왔을까.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런 질문에 떳떳하지 못하다. 여전히 추운 겨울이고,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소리 없는 절규를 지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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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비밀의 방 - 제10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55
조규미 외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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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녕하세요, 그에게 인사했다>는 주인공인 승찬의 정체화를 다루는 짧은 소설이다. 승찬은 또래 여자아이와의 관계에 관심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다 어느날 누군가 묻어놓은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 일기장은 승찬이 태어난 1995년에 쓰여진 일기로, 연인의 오빠를 사랑하게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승찬은 그 일기를 읽고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닫는다.

 

우리 학교에서 윤서하를 찬다는 것은 미친 것이거나 남자가 아닌 것 둘 중 하나이다. - 64p

 

 누구나 관심을 갖고있는 절세미인 여자아이에게 흥미가 없는 주인공이 정체화를 하는 것은 청소년 퀴어 소설에 흔하게 있는 서사라고 생각한다. 그 여자아이는 하필이면 승찬을 좋아했고, 소설은 승찬이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여자 아이가 손이라도 잡으려 하면 나 역시 그처럼 몸이 굳는다. 더 심해지면 속까지 메슥거린다. - 76p

 

 그런데 승찬은 성적 끌림은 물론이고, 일종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듯한 반응을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게이로 정체화한 사람들은 이성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보편적인걸까? 그리고 지금까지 국내 청소년 퀴어 소설에서 다뤄진 주인공들과 달리 승찬은 작품 내에서 타인에게 성적 호기심이나 여타 호감을 품지 않는다. 이것은 꼭 경험하지 않아도 정체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에이섹슈얼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 남자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간절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했고 또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 83p

 

 짧은 소설 안에서도 퀴어포빅한 현실은 극단적으로 다뤄졌다. 승찬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에 악기를 찾으러 낙원 상가로 향하고, 그곳에서 상점 주인의 인터뷰를 보게 된다. 상점 주인은 폭행 사건의 증인으로 인터뷰를 했고, 폭행 사건의 피해자는 동성애자라고 암묵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여기서 그 피해자는 폭행을 당했음에도 모자이크 뒤에서 자신을 숨기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너무 전형적인 혐오범죄였다.

 

분명하게 알았다. 그를 마음에서 지운다는 것은 나에겐 실낙원일 뿐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낙원을 찾을 것이다. - 85p

 

 승찬이 발견한 일기의 마지막장에서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러 떠난다. 그 결과는 암시되는 바가 없지만 승찬은 자신을 게이로 정체화를 마치고 커밍아웃을 한다. 꽤 많은 것이 담겼지만 실제로는 무척 짧은 소설이다. 리뷰의 제목을 '정체화와 롤모델'이라고 적어놓은 필자는 여기서 롤모델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누구나 인생은 처음이기에 누군가를 보며 배운다. 시스헤테로유성애자들은 자신의 부모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으며 자신의 인생의 갈피를 잡아간다. 반면 성소수자는 그러기에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밍아웃을 공적으로 하기에 어려운 환경인 점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지우는 일이 많은 사회임을 체감하게 한다. 소설 속 승찬은 타인의 일기를 읽고 자신을 정체화 한다. 우리도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성장한다. 그 점에서 앞으로 퀴어 사회가 추구해야할 점을 떠올렸다.

 

p.s.

"노력하면, 노력한다면 바뀌지 않을까?" "뭘? 노력하면 너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거임?" - 87-88p

 개인적으로 마지막의 커밍아웃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무겁지 않고 오히려 가벼워서 좋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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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에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
권하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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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흐느껴 울었어. 지금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내 감정이, 왜 언제나 이렇듯 허무하게 부정당하는 거지? 어차피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는 모호하고 이상항 간정에 휘둘려서는, 아프고, 울고, 쓰리고, 그러다가는 잠깐 기쁘고, 다시 아프고, 울고, 쓰리고. -비너스에게. 250p

 

 

권하은 작가의 장편소설 ‘비너스에게’. 국내 소설로서는 흔치 않게 당당한 퀴어를 표방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제목과 일맥상통하게 평범한 고등학생 ‘강성훈’이 ‘비너스’라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형식의 글이 이어진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비너스’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인물, 즉 독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냐!”

철가면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 교장과 주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지. 철가면의 얼굴에 선명히 떠오르는 표정을 나는 처음으로 보고 있었어. 그건 바로 ‘혐오’였어. -비너스에게. 63p

 

 

이 글의 주인공 성훈은 동성애자이다. 본인 스스로도 은연중에 이를 인식하고 있다. 같은 학교의 3학년 선배를 짝사랑하는 그는 우연한 기회에 선배의 집에 가게 되고, 함께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키스’를 하고 만다.

 

 

‘첫 키스’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달콤하고 행복하지만 성훈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여운도 잠깐, 선배의 소스라치는 반응에 그는 창백한 얼굴로 돌아오고 만다. 이 일은 일파만파로 퍼져, 교장과 어머니의 귀에도 들어가고 결국 남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퇴를 선택하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각부터 그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타인과 다른 나를 발견하고, 무엇보다 인정하는 것.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잘 구분지어서, 타인과 다를 뿐 나 역시 나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 간단하지만 어려운 이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성훈은 ‘애미 청소년 상담센터’라는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며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편견의 늪 속에서 나 자신을 찾고, 내가 세상에서 낙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폄하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미성년자 한정이라고 했어. 내가 성년이 되려면 아직 2년하고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내가 할 일은 무언가를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듯 내 삶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 -비너스에게. 2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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