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올 에이지 클래식
낸시 가든 지음,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발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학교 도서관에서였다. 샛노란 표지에 제목도 너무 분명해서 내가 남자라면 이 책을 읽어도 의심받을 일이 없을 텐데 마침 여고생이어서 동성애자로 오해받으면 어쩌지? 라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걱정을 하면서 남들 공부하는 야자 시간에 정독실에서 몰래 읽었다. 그때는 결국 읽다 말았는데, 지금 끝까지 읽어보니 담담한 목소리의 퀴어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퀴어 문학이 새삼스럽게 소중하다.

 

이 소설은 1982년에 발표되었지만, 한국에서 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퀴어에게도 유효했다. 첫사랑에 빠진 여자애가 남의 집에서 처음으로 섹스하려다 들켜서 학교 이사회 회의에 소집되고, 그 집의 주인인 레즈비언 커플 선생님은 퇴직을 당하고 주인공 남매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만, 그래도 리자와 애니의 연애는 계속되는 이야기.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2009년이었고, 남녀공학인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키스하다가 불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학이었어도 남녀분반이었는데, 부반장과 반장은 썸을 타고 있었고, 나는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성욕의 유무에서 찾으며 단짝에게 엄청난 집착을 하면서도 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던 중이었다.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서, 다니는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맡은 리자는 친한 친구 샐리가 학교에서 귀 뚫기 시술을 하다가 사고를 내기 전 보고를 하지 않은 벌로 1주일간 정학을 당한다. 이후에 있을 사건의 복선처럼 "괜찮다, 리자.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하지. 이번엔 그저 조금 큰 실수를 했을 뿐이야. 그게 다야. 네가 다시는 그런 실수를 안 할 거라 믿는다."(92)라는 훈계를 듣는데, 이는 실수 혹은 잘못으로 여겨지는 청소년기의 퀴어성 발현에 대한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소설은 청소년인 리자의 첫사랑 외에도 스티븐슨 선생님과 위드머 선생님의 오래된 연인 관계가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청소년기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불리는 것이 그 시기의 특성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인식과 정체화임을 분명히 한다.

 

낸시 가든은 애니와 리자라는 소녀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끌림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애착 관계를 맺는 퀴어들이 경험하는 클로짓 상태[1], 탈반[2], 아웃팅[3], 신의 이름을 내세운 혐오[4], 방관하는 혐오[5], 전환치료 강요[6]까지 서사에 고스란히 담았다. 다소 교과서적으로도 느껴지는 이런 서사가 가능한 것은 이 연애를 낭만적으로 대상화하는 대신 보통의 연애로 그려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하고 도둑질하듯 섹스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어린 연인이 느끼는 당혹감은 레즈비언뿐 아니라 헤테로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특히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장소설에서 순결은 지켜야 할 것으로, 지키지 못한 경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비난받기도 한다.[7]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에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애니와 리자의 고충에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애니와 리자는 이유 모를 병으로 앓지 않고 죽지 않고 헤어지지도 않고 계속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내가 나인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내가 나인 것을 선택이라고 하든 병이라고 하든,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이들[8]이 나를 처벌하려고 하든 치료하려고 하든,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나는 나여야 하고 내가 아닌 채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라고 '위로'받았고 '안심'할 수도 있다(252). 내가 아닌 외부의 어떤 것에 영향받은 결과라고 오해받거나 변명(286)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위로와 가짜 안심으로 나를 언제까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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