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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ㅣ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카포티의 소설 가운데 자신의 동성애자 정체성을 가장 숨김없이 드러낸 것으로 꼽히는 작품 하나가 바로 오늘 리뷰를 하게 될 단편 ‘다이아몬드 기타’이다. 게이 남성으로 경험하게 되는 관계와 그로 인한 내면의 자기 고백이 절절하게 읽히는 이 작품은 작가인 카포티 본인의 고뇌를 이야기 속에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난로 불빛, 겨울의 찬 공기가 절로 눈앞에 그려지는 이 흥미롭고도 서정적인 단편은 50대의 남성 재소자 섀퍼가 새로 온 소년 죄수인 티코를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그에 대한 회신을 받지 못한 채로 남겨지는 이야기다. 마음을 준 상대에게 이용만 당하고 끝나버리는 이야기나 모든 사랑의 좌절들은, 대개의 경우 힘겨운 비극으로 읽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결말이 마냥 감상적인 비극만으로 남지 않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티코가 두고 떠난 유리 다이아몬드 기타를 매만지며 새 ‘세상’을 음미할 수 있게 된 섀퍼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줌과 동시에 행복과 또 하나의 성장을 가져다주는 아이러니의 결정체이기에 독자는 홀로 남겨진 섀퍼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지면서도 그저 안타까워하지만은 않는다.
섀퍼는 배신당했지만 분명 진실된 사랑의 감정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또 한 번 자기 스스로를 내면의 거울로 비추어 보게 했다는 점은 늘 교도소를 ‘자신의 관’처럼 생각하던 섀퍼에게 한편으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다 썩어 문드러져 버린 집과 같았던, 음울하고 죽었던 방들이 티코와의 추억을 갖게 됨으로써 등불을 환히 밝혀놓은 듯한 광경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남자들이 주위에 모여들면 티코 페오는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실로 대부분 남자들이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 (p.326)
그렇다면 기타를 치며 재소자들을 위로하던 아름다운 소년 티코 페오는 과연 섀퍼를 진정 사랑했을까. 황당한 이야기들을 마구 지어내어 떠벌릴 만큼 새빨간 거짓말쟁이였지만 섀퍼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그 동안 허풍 떤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티코가 분명 그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티코가, 자신보다 서른 살도 넘게 나이가 많은 섀퍼를 교도소 안에 있는 동안에 그저 잠깐 기댈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부비었을 뿐이며 연인의 감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섀퍼가 교도소 내에서 많은 이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약삭빠르게 접근한 것만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에게 있어 섀퍼의 존재는 이 교도소 안에서만큼은 아주 든든한 조력자였을 것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