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넘기고 있던 일요일 오후 다섯 시, 열어둔 창문 너머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신음소리와 헷갈릴 만큼 가녀린 흐느낌은 점점 굵어지다가 갈라진 비명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마침 주인공이 자기 손을 망치로 내려친 부분을 읽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무슨 일인지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는 동안 책 속의 인물은 하얗게 드러난 뼈라느니 뭉개진 살갗에 대해 건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습게도 살짝 왼손 손가락을 구부려봤다. 잘 있나 싶어서.

  김영하의 소설 <손>은 화자 ‘나’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용으로 한, 이십 페이지 남짓의 단편소설이다. 편지글답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오는데 전부 손에 관한 이야기다. 라 보엠 <그대의 찬 손>부터 시작해서 반지, 로댕의 조각, 손에 관한 역사적인 일화 등 손이라는 표제어를 중심으로 마인드맵처럼 가지가 곳곳으로 뻗는 느낌이다. 방향성 없이 튀는 이야기들은 마지막 순간에야 의미가 한 줄기로 관통하는데 그 중심선을 잇는 키워드가 바로 그 사람의 손, 당신의 손 그리고 나의 손이다.

 

생각해보세요.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베토벤을 그이의 시선 아래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이 제 목덜미에 와 닿는 것이었어요. 음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연주에 열중하려고 애썼습니다. 제 목덜미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그이는 제 귀에 속삭였습니다. 계속 연주해줘. 멈추지 마.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요. 멈추지 않을게요. 그 사람의 손은 천천히 목덜미를 지나 쇄골을 더듬다가 제 젖무덤으로 내려왔어요.  p.96

 

베토벤을 연주하던 나, 그리고 나를 연주하던 그. 그러나 그 사람의 손은 믿어달라고 했던 눈과는 달리 다른 여자도 연주하고 있었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눈을 믿지 않는다. 손을 믿는다. 그에 비해 눈을 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당신의 손은 혼란스러운 온도로 ‘나’를 위안해주었다고 말한다. 의장대의 총검술처럼 담배를 뽑아들던 손, 우아하고 색정적으로 ‘나’를 부르던 당신의 손짓을 화자는 기억한다.

  이처럼 사람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도 온통 손에 관한 이야기뿐이라 장면들은 감각적이지만 어쩐지 모호하고 이 손이 그 손이었던가 싶게 정보들이 뭉텅뭉텅 잘려있다. 손 페티시처럼 줄곧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화자의 손과 관련된 ‘그 사건’에서 드러난다.

  연극이 막을 내리던 날-비로소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게 된 그날 밤- 화자는 ‘나’를 연주했던,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던 그 여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난생 처음 자신의 손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왼손 약지를 조이는 반지를 발견하고 빼보려 하지만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망치를 들어 자신의 손을 부숴버린다.

  그렇다. 줄곧 그 사람(혹은 그이), 당신이라고 지칭했던 인물들이 여자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나 당신이라는 지칭에서 가볍게 남성이라고 넘겨짚었던 독자의 추론이 깨져버린다. 손 말고는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는 사실이 반전으로 다가온다. 성적 지향을 판별하는 방법 중 하나로 손톱을 꼽을 만큼 레즈비언에게 있어서 손이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몸을 쓸어내리고. 어쩌면 눈보다 손이 더 깊은 곳까지 연인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자신의 손을 망치로 짓뭉갠 후 모든 관계의 끝을 선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을 내리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화자가 조각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종말이 아닌 완성의 의미를 갖게 된다.

 

저는 두 손가락이 뭉그러진 제 왼손을 조각할 거예요. 그 속에는 제가 그동안 탐해왔던 모든 손들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을 거라고 믿어요.  p.107

 

자신이 겪었던 관계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던 행위는 사실 일련의 모든 상황, 감정을 수렴하는 폭발적인 자기표현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확대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페라 라 보엠에서 <그대의 찬 손>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이며 망치로 부숴버린 손은 관계의 끝, 그리고 다시 완벽한 손을 조각하려는 행동은 재탄생과 완성을 의미하는 듯 느껴진다.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다각도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p.s. 퀴어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반전이기 때문에 퀴어소설로 소개하는 것이 어쩐지 미안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 라고 얘기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성자: 모글토리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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