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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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은 한국여성학회 40주년을 맞아 기획된 책으로,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양상의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운동을 정리한다. 흥미롭게 읽은 꼭지는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다룬 김수아의 〈온라인 공간을 횡단하는 여성들〉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나타난 페미니스트들 사이 젠더 인식을 다룬 김보명의 〈젠더 이후의 젠더 정치학〉, 능력주의 개념의 성차별적 성격과 이것이 페미니즘에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주의로 나타나는 양상을 다룬 엄혜진의 〈능력주의는 어떻게 구조적 성차별과 공모하는가〉이다. 머리말의 제안대로 김수아와 김보명의 글을 함께 읽으며 페미니즘 대중화가 남긴 딜레마를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엄혜진의 능력주의를 다룬 글 역시 최근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와 현재


〈온라인 공간을 횡단하는 여성들〉의 저자는 안전한 공간을 찾으려 한 여성들의 역사와 여성들이 안전하게 모이면서도 포용적인 연대를 만드는 방법을 논한다. 그는 ‘여성시대’나 ‘메갈리아’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여성 공간이 만들어진 이유를 1999년 헌법재판소의 군 가산점제 평등권 침해 판단 이후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여성에 대한 공격에서 찾는다. 당시 여성을 위협하는 온라인 공간의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우리 사회가 해당 현상을 여성혐오로 개념화하지 못하면서 여성들은 스스로 안전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이를 계기로 안전한 온라인 공간을 찾으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메갈리아’ 이전에도 여러 유료 웹사이트나 ‘여성시대’ 등으로 대표되는 포털 사이트 카페 등 폐쇄적인 여성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더 공개적인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자발적인 연결이 이루어졌다.


  최근 SNS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은 기존 사회 운동과 달리 시민단체와 같은 하나의 구심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폭발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지난 8월 말부터 딥페이크 범죄 사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X(옛 트위터)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딥페이크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였고, 해당 해시태그로 전 세계 트렌드 2위에 오르는 성과를 만들었다. 2018년에 벌어진 미투운동도 비슷한 예시로 볼 수 있다. 다만 디지털 행동주의는 기존 사회 운동과 비교해 지속성이 떨어지며, 단지 SNS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국 사회 전환을 위해서는 기성 언론의 보도나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디지털 행동이 여러 소수자 개인의 주체적인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이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하고, 구조적 차별의 존재를 일깨우며, 오히려 레거시 미디어의 보도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의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언론이 SNS 여론을 기사 작성에 활용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고 개인들이 디지털 행동을 통해 입법 청원을 독려하는 등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으로 볼 때 디지털 행동이 정치적 효능감을 높임으로써 사회 참여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딜레마 : ‘젠더 박살’과 자기계발


다만 온라인상 페미니즘 운동에서 보이는 젠더 배제적인 움직임이나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주의는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젠더 이후의 젠더 정치학〉은 젠더 개념이 보수 개신교 반동성애 운동 흐름과 신자유주의적 안티페미니즘, 트랜스 배제적 급진페미니즘 (‘랟펨’ *) 사이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오늘날 한국에서 보수 개신교 집단은 이성애중심적 가족 질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젠더 개념을 공격하고 안티페미니즘을 내세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마주한 이 백래시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점을 짚는다. 19세기 후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반발한 남성과 중산층 백인 여성들, 1990년대 종교계가 내세운 안티페미니즘이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랟펨’ 사이에서 젠더는 해체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젠더를 해체하며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범주를 ‘진정한 여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결국 ‘랟펨’의 젠더 정치학은 보수 개신교와 유사하게 본질주의를 강조하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이들이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는 존재임을 간과한다. 여전히 SNS에서 ‘진정한 여성’ 범주를 주장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기혼 여성과 좌파 운동권 여성을 거부하거나 페미니스트 행동 규범을 정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주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셀 남성이나 보수 우파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 안티페미니즘은 여성들이 과거에 비해 남성과 동등한 교육과 노동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등장했다. 이들은 성평등 정책이 사회 구조적 차별을 시정하는 것임을 무시하며 여성이 ‘태어난 성’을 기준으로 혜택을 받는다고 항의한다. ‘젠더’를 ‘섹스’로 오독한 것이다. 〈능력주의는 어떻게 구조적 성차별과 공모하는가〉는 특히 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페미니즘을 집중적으로 다뤄 능력주의가 성차별을 은폐해 왔으며 페미니스트들의 자기계발주의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밝힌다. 실제로 일부 여성들은 상위 계층 이동을 곧 성평등 실현으로 여기며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고 경제적 삶의 질 향상을 꾀한다. 그러나 앞서 다뤘듯, 애초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여성의 성적 차이를 결핍으로 보는 문화를 비판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여성들을 오히려 공정 경쟁 질서의 위협으로 여겼다. 여성들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편견을 깨면서도 여성 일반에게 부과된 성역할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이중 구속에 시달리기도 했다. 저자는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여성들이 능력주의를 내면화해 욕망을 추구하거나 피해자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경향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페미니즘이 능력주의 사회 자체를 비판할 가능성을 기대한다.



*



나 역시 야망을 품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자는 분위기를 좇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후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과 자기를 경영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꼈거나 지쳤던 경험을 공유하며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리천장 문제로 여전히 고위직 여성의 비율이 낮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높은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각 여성은 계층, 장애, 인종, 연령 면에서 차이를 지니는 존재이며 엄혜진이 언급했듯 개인의 노력과 성취에는 사회적 우연성과 운의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에게는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페미니즘 운동은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하는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를 여성의 관점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때 성차별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차별을 묵인하는 사회 현실을 폭로하고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 구조를 전환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 꼭지의 저자는 온라인 공간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칭하는 ‘랟펨’과 학문적 의미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구분해 사용한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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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초록빛 - 아끼고 고치고 키우고 나누는, 환경작가 박경화의 에코한 하루
박경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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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에서부터 책 내용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환경을 위한 실천이라고 하면 흔히 비장함부터 갖추거나 죄책감을 느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바꾸고 싶다는 저자의 말에 환경 실천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환경 실천은 죄책감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텀블러를 챙기지 못해 종이컵을 써야 한다든가 걸레를 쓰기에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물티슈를 쓸 때 환경을 위해서는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며 편리함을 포기할 각오를 세우곤 했기 때문이다. 환경 실천법이 유독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변에서 보내는 유난이라는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새것을 사지 않으려고 빈티지 의류 쇼핑몰이나 중고 거래 앱을 뒤지면 엄마는 내가 돈을 아끼려는 줄 알고 (그런 이유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알뜰하다며 칭찬하거나 측은한 눈빛을 보낸다. 물건을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이 새 물건을 살 때 드는 비용보다 더 많다면 고장 난 물건을 버리고 새것을 사는 편이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진다. 새 물건을 마다하고 시간과 돈을 더 들일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발품을 팔면서 대장간을 찾아 새것을 살 때보다 더 비싸게 돈을 주고 칼을 고치고, 가게에서 받은 종이 포장지가 너무 튼튼하고 깨끗해서 다시 돌려주러 가는 저자를 보며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 역시 내심 새 걸 사고 싶어서 가스레인지가 고장 나지 않는 걸 아쉬워하고, 종이 포장지를 돌려주며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기도 하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일 뿐이다. 저자가 환경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것부터 시작해 꾸준히 실천의 범위를 넓혀 온 덕일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간단한 실천만으로도 환경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식재료가 들어 있던 유리병을 다시 사용하고, 고장 난 우산의 천을 뜯어 돗자리로 쓰고, 머리를 감거나 샤워할 때 쏟아지는 물을 대야에 받아 두었다가 걸레를 빨 때 사용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뭐든 망가질 때까지 애착을 갖고 물건을 사용하고, 쓸 만한 물건은 다시 나누고, 물과 전기를 아끼는 저자만의 비결이 가득해 환경을 위한 실천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저자는 과일 씨앗을 베란다 화분에 무작정 심어 2미터 넘는 모과나무를 만들어 내고, 비파 모종을 나눠 주며 식물의 생명력을 실감한다. 과일을 먹은 사람들이 길가에 과일 씨앗을 심으면 과일나무로 가득한 도심이 될 거라는 저자의 상상은 단지 재미있는 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환경 실천을 지속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를 보여주는 듯 느껴진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저자의 상상력은 그가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도 환경 실천을 지속해 온 원동력이지 않을까. 환경 실천의 어려움이나 회의감에 절망하기보다 나와 우리의 행동이 만들 변화를 상상할 때 환경 실천의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을 이야기할 때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는 무거운 내용도 분명 필요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그런 이야기가 체념과 자포자기 상태를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환경 실천도 간단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 책이 소중한 이유다. 익숙지 않은 일에 이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이 책과 함께라면 작은 실천이 만들어 낼 변화를 상상하며 약간의 불편함도 이내 즐거움으로 바꾸어 환경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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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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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질문이 만들 정의로운 평화


두 달 전쯤 동대문구에서 36년간 무료급식 봉사를 해 온 ‘밥퍼나눔운동본부’(이하 밥퍼)가 구청으로부터 건물 철거 명령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밥퍼 시설 주위에 노숙자가 많아져 치안 문제가 우려되고 집값이 떨어진다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과 건물 ‘불법’ 증축이 철거 명령의 근거였다. 그러나 취재에 따르면 노숙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그로 인한 범죄 위험이 증가했단 얘기도 사실이 아니었다. 현 건물이 ‘불법’이 된 것도 건물을 지을 당시 서울시와 동대문구의 손발이 맞지 않아 발생한 행정상의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에 온전히 밥퍼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공익보다 근거 없는 소문의 편에 선 동대문구의 처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불온한 공익》을 읽으며 밥퍼가 처한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니, 동대문구가 공익을 무시했다기보다 약자의 끼니를 보장하는 밥퍼의 활동을 공익적인 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제가 보여주듯 이 책은 ‘공익’의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장애인이나 아동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쉽게 공익 활동으로 인정되며 ‘좋은 일’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반면 노동조합이 기업에 대항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일명 ‘귀족 노조’가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거니즘이나 일회용품 줄이기 등 개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환경 운동은 적극 권장되지만, 더 나아가 국가의 성장주의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쉽게 무시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위 사례 중 공익으로 인정받는 것은 모두 강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어떤 약자의 사익이 공익인지 아닌지는 사회와 강자의 허용에 달렸다. 동대문구가 밥퍼의 활동과 약자의 이익을 공익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역시 밥퍼의 활동이 ‘집값’이라는 강자의 이익을 훼손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책 전체에 걸쳐 저자는 공익의 범위를 넓히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질문한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강자에 맞선 저자와 시민들의 ‘사익’ 투쟁 사례와 변호사로서 저자가 사법 시스템의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한 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길잡이가 된다. 공권력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을 억압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1장에 등장하는 공권력 남용의 사례는 국가가 공익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레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했음을 보여준다. 집회의 자유를 주장한 시위 참여자를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체포한 경찰, 2018년 스쿨미투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한 서울시교육청, 정당한 근거 없는 행정대집행으로 용역을 동원해 노점을 강제 철거한 구청들이 그 예다. 2장에서는 기업 역시 강자로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불법 파견계약을 맺거나 위험한 노동환경을 방치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한 사례가 제시되며 일부 사건에는 사실상 국가가 공모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2019년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경찰은 삼성전자 노조 탄압에 맞서다 세상을 떠난 조합원의 유족을 만나 합의를 설득했으며 장례식장에서 노조원을 제압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 2020년에야 폐기된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는 일정 부분 국가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공익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불온하다. 앞선 사례가 보여주듯 공익을 정의하는 강자의 논리에 저항할 때 비로소 공익의 범위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관행이나 판단에도 질문을 던지는 저자의 모습에서 이 책의 불온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제도나 대법원 판례의 경우 이미 권위를 지닌다고 인정받기 때문에 그 안의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혹 그 부조리를 인식하더라도 체념하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사안에서도 의문점을 찾고 부조리를 시정한 경우가 특히 돋보인다. 일례로 저자는 한 마리의 동물에 대해 보호자 두 명을 등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공동명의 등록이 불가한 것이 단지 시스템상 한계로 이어져 온 관행임을 확인한 후 저자는 동물 보호자의 의무와 권리 보장을 위해 그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며 행정소송으로 동물등록 시스템 개선을 이끌어낸다. 재개발 사건에서 저자는 재개발조합이 원주민에 대한 손실보상금을 공탁(법원에 돈을 맡기는 일)하면 원주민이 퇴거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뒤집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대법원 판례가 있는 사안의 경우 1심에서부터 어느 정도 결과가 정해지기 때문에 판례를 반박하는 것은 상당히 불리하다. 그럼에도 그는 재개발조합이 철거민에게 주거 이전비, 이주 정착금, 이사비를 미지급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상고심에서 승소라는 결과를 얻어낸다.


  저자는 우리가 결국 목표로 해야 하는 바는 갈등을 넘어 사회의 정의를 전반적으로 향상하고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개별 사건의 승소가 곧장 사회 정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약자가 재판에서 이겨도 그가 돌아가야 할 사회에는 여전히 강자의 논리가 지배적이고 차별이 만연한 탓이다. 또한 여기서 ‘평화’는 기계적 중립이 아니다. 저자는 정의를 위해 권력의 차이를 직시하고 강자가 그 힘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각자가 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소송은 늦고,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p.190)기 때문에 약자는 부당한 현실과 강자에 맞서 당장 시끄럽게 싸울 수밖에 없다. 그 상황을 헤아리고 투쟁에 지지를 표하는 것도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권위에 반기를 드는 사익을 옹호하려는 불온한 시도가 만들 불온한 평화를 함께 상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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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 기자·PD·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글쓰기의 모든 것
김창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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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착한 책 표지를 보고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다. 큰 제목만 보고 일반적인 글쓰기 책인 줄 알았지, 언론사 입사 시험에 특화된 내용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책을 고를 당시에는 표지 사진을 확인할 수 없던 터라 소개를 잘 읽어봤어야 했는데 대충 보고 신청해 버린 내 탓이었다. 필기시험 준비에 필요한 내용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약간의 선입견을 품고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글쓰기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내용이나 평소 글쓰기 연습을 할 때 적용할 수 있는 조언이 많아 유용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저널리즘 글쓰기를 주로 다루는 책이지만, 논픽션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에게도 활용도 높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1장이 다루는 저널리즘 글쓰기의 기초는 저널리즘에만 국한되지 않고 글쓰기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저널리즘 글쓰기가 문학적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의 경계에 위치한다고 설명한다. 저널리즘은 감수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갖출 필요가 있지만, 문학 영역이 요구하는 예술적 표현 기술이나 학술 영역의 현학적인 글쓰기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문 작가 같은 탁월한 실력이나 깊이 있는 이론이 필수는 아니라는 저자의 설명은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가 이 책을 가깝게 느끼는 요인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애초 저널리즘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리한 저널리즘 글쓰기의 요구사항인 알기 쉽게 쓴다, 군더더기 없이 치밀하게 쓴다, 신선하게 쓴다 역시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글의 요건과 닮아 있다. 좋은 글의 요소로 저자가 언급한 표현력과 구성력, 내용을 대응해 보면, 알기 쉽고 군더더기 없는 글은 표현력과 구성력에, 신선한 글은 내용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글쓰기에 앞서 다독(多讀)과 다상량(多商量)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한다. 앞서 제시된 요건 중 ‘내용’을 잘 쓰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100 대 1 법칙을 소개하며 글쓰기로 1을 출력하려면 100이 입력돼야 한다고 본다. 입력이 빈약하면 출력되는 글쓰기도 단순 요약이나 짜깁기, 심하게는 표절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이때 다독을 넘어서는 ‘체계적 독서’를 통해 여러 권의 책을 종합해 비교함으로써 나만의 결론을 내고, 권위자의 말이나 학술적 이론을 내 생각과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차별화된 내용을 만들 수 있다. 2, 3장의 논술과 작문 공부법 중 논제를 정리하는 방법이나 인상적인 콘텐츠에 대해 자신만의 맥락을 메모해 두는 연습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표현이나 구성 등 형식에 대한 구체적 첨삭은 이 책에 친절함을 더한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글쓰기 능력을 키워야 하는 언론사 준비생을 위한 효율적인 훈련법도 눈에 띈다. 비문학 독서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나 생활 속에서 글감 찾기, 글을 읽고 논지를 파악해 설계도 그려 보기 등의 방법이 그것이다. 2, 3장은 1장과 비교해 논술과 작문이라는 언론사 필기시험 준비법을 더 구체적으로 다뤄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눈길이 덜 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단지 자신의 주장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공감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대화와 이해를 촉발하는 글을 쓰려면 논술의 설득력과 작문의 주목력을 두루 갖출 필요가 있다. 2장에 설명된 논리적 표현과 구성, 논증법은 설득력을 기르고 싶은 이들에게, 3장의 작문 작성 전략인 통찰력, 감동력, 주목력은 신선한 글을 쓰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완성하려면 평생에 걸쳐 단련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한 윌리엄 진서도 “글쓰기가 단번에 완성되는 생산품이 아니라 점점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글을 잘 쓸 수 없다.”*고 했다. 보이지 않아도 꾸준히 쌓이는 글의 힘을 믿고 쓰는 수밖엔 없다. 이렇게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왜 쓰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될 때가 있다. ‘왜 쓰는가?’란 질문에 대해 저자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글쓰기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글쓰기의 모습”이라고 답한다. 어떤 가치를 위해 펜을 들지는 다시 글을 쓰는 우리가 대답할 몫이다.



*은유, 《쓰기의 말들》(유유, 2016), 158쪽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닐까? (리베카 솔닛)


 ― 은유, 《쓰기의 말들》(유유, 2016),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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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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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치인의 사랑》에 등장하는 여성 ‘나오미’는 1920년대 일본에서 대중소비사회의 새로운 주도자로 떠오른 ‘모던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모던걸은 전통적인 의복에서 벗어나 단발과 양장 등의 겉모습으로 대표되었으며 기존 여성의 정조 관념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낭비벽이 심하다거나 성적으로 타락했다며 멸시당하기도 했는데, 소설 속 나오미 역시 자기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 사회에 ‘나오미즘’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엘리트 여성 집단인 ‘신여성’이 등장했다.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는 근대잡지 《신여성》에 재현된 여성의 생활상을 좇으며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공적공간에 나타난 신여성이 다시 집 안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맡게 된 과정을 살핀다. 남성들은 기존 조선의 여성들과 달리 교육을 받고 대중문화와 유행을 따르는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한 신여성을 계도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남성 필진이 70%에 달했던 《신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역설적으로 이 남성의 시선에서 신여성의 새로운 욕망과 언어 습관, 생활 양식을 읽어낼 수 있음을 짚으며 《신여성》 읽기의 의의를 제시한다. 1930년대 들어 신여성의 역할이 가정주부로 변화하면서 《신여성》도 여성의 노동 참여와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육아를 동시에 요구하기 시작한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적 구조에 더해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현대 여성의 이중부담은 100년 전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지금 우리가 《신여성》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신여성은 남성의 응시와 관찰에 의해 서술되는 존재였으며, 《신여성》의 남성 필진은 “객관성을 가장한 주관성”을 내보인다. 《신여성》의 필자 ‘은파리’는 미행 형식을 통해 여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비판하는 서술 방식을 취하지만, 그의 상상과 해석은 오히려 주관적 인식을 더 드러낼 뿐이다. 이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무력화된 식민지 남성이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여성을 타자화하고 관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또한 《신여성》은 세태를 풍자하는 사전이나 ‘여학생의 아홉 가지 잘못’ 따위의 십계명을 게재해 ‘상징폭력’의 형태로 여성을 계몽하고자 했다. 남성 필진은 여학생을 순진하고 미숙한 존재로 상정해 교복과 남녀 관계를 단속했으며, 신여성에게도 보호의 논리를 들어 극장 개장 시간을 제한하거나 선정적 장면을 검열하는 등의 형태로 대중문화 향유를 일부 제한했다.


  근대잡지 《신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모습을 규정해 온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신여성은 남성들의 눈초리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신여성》이 여성을 남성의 시선으로 규정해 온 역사이면서도 동시에 여성 스스로 주체성을 얻고자 분투해 온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여성》의 여성 기자로 일한 송계월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자신을 재현하고, 나아가 여성이 남성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여성 주도의 좌담을 기획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듯한 성차별과 여성혐오, 여성의 이중부담 속에서 우리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신여성들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 이제 ‘우리 몫의 책임’*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남겨진 과제다.


*조형근,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한겨레출판, 2024)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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