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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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키워드는 ‘자살’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언젠가 어린 딸이 자살에 관해 물어보았을 때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스스로 죽는거야 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말했더니, 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스스로 죽는 게 뭐냐고 다시 물었다. 그 때 머릿속에는 기다란 줄이나 인형처럼 떨어지는 그런 상황들밖에 그려지지 않았고, 차마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워 머뭇거렸다. 나이가 들어 저절로 죽는게 아니고, 자기 힘으로 죽으려는 거야, 하니까 아이는 알 듯 말 듯한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직 인생의 첫걸음을 떼는 아이에게 죽음을 설명한다는 것, 더구나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자살을 설명한다는 게 그저 난처하기만 했다.

<혀>라는 매력적인 소설로 조경란이란 작가를 처음 만났다. 사실 이 소설을 알게 된 것은 표절 시비 때문이었다. 표절이라 주장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아,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혀>는 참으로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나중에 이 작가의 <백화점>이라는 수필을 통해 빵을 굽는 제빵학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작가의 미각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묘사를 이해했지만, <혀>에 묘사되어 있는 서양 요리의 냄새와 색감, 맛은 정말이지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파닥파닥 튀는 생선이 내 앞에서 금세 신선한 회로 썰어져 나올 때의 기분이랄까. 내용의 섬뜩함과 달리 촘촘하게 짜여있는 소설의 구성과 그 음식들은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복어>라. 다시 먹는 것이다. 독을 품고 있는 이 생선, 조경란은 어떻게 요리했을지 궁금했다. 독을 내 몸 깊숙이 넣어 즉사시킬 것인지, 아니면 뛰어난 요리사가 되어 독을 제거한 채 그 뛰어난 맛을 남길 것인지.

결론은 독은 제거했는데, 맛은 좀 심심하다 정도. 시원한 탕을 기대했는데, 그저 복어라는 독있는 생선을 무사하게 먹었다는 안도감이 느껴지는, 거기까지다. 워낙 <혀>가 주는 감각적이고 탱탱한 감각이 생생해 기대를 많이 해서일 수도 있다. 복어와 자살.

삶과 죽음은 백지장 차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이 소설의 주인공 그녀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내력이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그녀의 할머니부터 막내고모, 막내삼촌, 그리고 아버지, 숙희 고모까지 모두 자살로 생을 마친다. 그래, 정말 이 정도면 내력이라 할 만하겠다 싶을 정도이다. ‘그’ 역시도 형의 자살을 겪은 사람이다. 내력이 있는 그녀와 그가 만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이야기들, 사연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처럼 복어를 먹고 자살을 할 결심을 한 채, 일본의 어시장에서 실제로 복어를 조리하는 요리사를 만난다. 잘못 건드리면 요리하는 사람조차 위험한 복어를 그 일본인 요리사는 멋지게 해치운다. 그 요리사와 그가 그녀를 복어의 망령에서 이끈다. 결국 삶이란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던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내 주변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들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이들을 떠올렸다. 평론가 고 이성욱씨도 문득 생각이 났다. 대학시절 학보사 세미나를 통해 잠시 보았던 그가 가족들을 잃고 그 자신 역시 간암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한 평론집을 통해 보았을 때, 잠깐이지만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못내 아쉬웠고, 그냥 죄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살이라는 것도 유전처럼 되풀이되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잔인한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 역시도 그랬던 걸까. 작가 역시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녀마저 그녀 집안의 내력처럼 복어를 혹은 다른 방법을 써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서 였는지, 그를 만나게 한다.

자살을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의 그녀처럼 존재론적 괴로움으로 자살을 그려보건 그렇지 않건 어디선가의 잘못으로 인해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자살을 방조하고 혹은 방치하는 것은 아닌지, 이대로 가도 좋은 것인지, 삶 자체가 물질화되어서 우리 삶 자체도 그렇게 값어치로 따져져서 이런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할 때라 여긴다. 아니, 지금은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시작은 해봐야 되지 않을까. 이 진창 같은 세상, 고고한 꽃이 될 수 없다면 진창 속에서 뒹굴면서 또 이러쿵저러쿵 사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내가 절박한 그들의 삶에 관해 관여할 자격도 언급할 자격은 당연히 없지만, 이 세상에 그 많은 존재 중에 그래도 나름대로의 저마다의 이유로 태어났다면 그 태어난 만큼 살아가는 것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아픈 마음에 주절주절 적어본다.

쓰다보니 의문이 든다. <복어>의 그녀는 왜 자살을 하고 싶은지 나는 모르겠다. 집안 내력만으로 그럴 리는 없겠고, 그냥 삶이 너무 괴로워서 그런 듯 한데, 그 이유가 절실하게 와닿지 않다 보니 심심하다는 것이다. 죽을 만큼 치열한 그 무엇, 복어의 독처럼 진한 액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죽지 않은 것인지 감이 안 온다. 하여튼 이 소설을 보니 딱 한번 먹어본 복어탕을 다시는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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