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7월
평점 :
책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자면.
1. 책은 가급적 깨끗하게. 구기지 않거나 펜으로 끄적이지 않거나.
2. 책은, 읽는 사람의 흔적을 남기는 곳. 밑줄 쫙. 여기저기 끄적끄적. 중요 부분은 접기까지.
나는, 후자이다.
책에는 고스란히 나의 흔적이 남는다. 때론 누군가가 나의 책을 들추다가 "시험 공부 했니?"라며 피식 웃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책은, 내밀한 내 속 얘기가 잔뜩 담긴, 일기장과도 같다. 빌려주기도, 헌책방에 넘기지도 못하는 게 대부분인지라, 그저 차곡차곡 쌓이고, 또 쌓인다.
그 중에서도 한 문장, 한 문장이 그 시절 그 순간에 절절히 다가오고, 나에게 말을 거는 듯 하여, 밑줄치기에 끄적이기를 가득한 책이 있으니, 바로 목수정씨 책이다.
2008년. 11월 마지막 주말은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라는 책을 읽었다.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20대에 '여성'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벼르고, 또 벼르게 해 주었다. 더불어, 사랑의 아픔에 너덜너덜해진 나에게 도대체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해보게 한 책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이자 엄마이자 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면서.
[야성의 사랑학]을 두 번 읽었다. 2010년과. 2014년. '지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만치않은 날들의 연속. 일상에서의 투쟁의 나날들.
그렇게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질퍽질퍽한 시간들을, 목수정씨 책과 함께 했다. 목수정씨가 있었기에 버텨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은 서늘한, 그래도 나를 품어주는 누군가를 만난 듯. 서로의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고민을 들어주고 힘을 주는 언니를 만난 듯 했다.
오랜만에 다시 목수정씨 책을 읽었다. [파리의 생활 좌파들].
이번에는 그녀의 삶이 아닌, 그녀 주변의 사람들 얘기를 들려준다. 나박나박.
각양각색의 삶이지만, 중심에는 늘 '사랑'이 관통한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지금의 나의 삶에 대해 계속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넌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니? 어떻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니?"
'좌파'라고 하면, 뭔가 딱딱한 정치적 용어를 갑옷처럼 둘러싸고는 비장한 각오, 한 토막은 갖고 살아가는가 싶지만,
목수정씨 말마따나 파리의 생활좌파들은 "목숨 바쳐 좌파 노릇을 하지도 않았고, 희생 따위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마치 걸치기 편한 옷마냥 좌파의 생각을 걸치고 누리고 있는 이들이었다."(7쪽)
앞으로의 내 삶에 영감을 준 이야기 몇 토막들.
<노인을 위한 나라를 꿈꾸다-테레즈 끌레르>
테레즈는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사는 것의 연장일 뿐이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얘기하며 자식들에게 투정이나 부리다가 죽음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대신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갖는 것,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온몸을 다해 투쟁하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찬 시민으로 살다 가는것"이 테레즈의 꿈이자 그녀가 바바야가의 집을 통해 실현하려고 하는 목표다. (19쪽)
"나를 움직인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정의' 그리고 '사랑'이다. 정의롭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계속 벌어진다면 그것을 멈추기 위해 어떤 순간에라도 일어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중단할 순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이다." (29쪽)
<분홍 돼지 엽서를 그리는 남자-에릭 브로시에>
"자기를 매혹하는 그곳으로 끝까지 가보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그 속에서 일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릴 때 원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일깨워주고 지지해주는 벗이 있다면 더욱 확실히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40쪽)
"단순하게 말하자면 좌파와 우파는 돈에 부여하는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라 구분되는 것 같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우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통해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44쪽)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자본가에게 뺏기지 마라 - 자크 제르베르>
Q. 아들에게도 당신의 정치적 신념을 교육했나?
A.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강요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아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새로운 방식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전하려 했다. 아들에게 "부모의 뜻을 거스를 때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매일매일 너는 부모의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구축한 네 모습을 나는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내가 그런 모습을 나무라면 "아빠가 부모의 맘에 안 들게 행동하라고 말했잖아요"라며 항변했다. 그때는 나도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한 아들을 사랑한다. (74쪽)
"좌파란 시간을 더디게 흘러가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파는 모든 삶을 속도에 대한 강박 속에 날려버린다. 좌파는 시간을 갖고 삶을 음미하며, 이른바 개발과 발전이라는 강박으로부터 삶을 되찾아오는 싸움을 한다. 또한 좌파는 끊임없이 세상의 구조,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수에 맞서 소수를 대변하며, 지속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일깨우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다"(79쪽)
Q. 좌파로서 당신의 실천은 무엇인가?
A. 나는 끊임없이 놀라움을 선사하는 그림과 책과 영화를 찾는다. 그것으로 나를 자극하고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엿본다. 루브르박물관을 나설 때면 마치 집회에 참여했다가 귀가할 때처럼 내가 한 뼘 움직였음을 느낀다. (...) 나에게 예술작품을 가까이하는 것과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목적이 같다. 그것이 나를 진정한 좌파로 존재하게 한다. (80쪽)
<나의 양심은 총을 들 수 없었다. -이예다>
"중1때. 일본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었다. 그때부터 만화 주인공에 감정이입되면서 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을 이유 없이 죽일까에 대한 긴 고민이 시작되었다. 모든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잇다. 그러나 인간은 주변에 있는 작은 벌레들을 습관처럼 죽인다"(123쪽)
<변신을 위해 양쪽의 세계가 필요하다 - 엠마누엘 갈리엔느>
"몸이 움츠러들 만큼 심장이 오그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치료는 존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엠마누엘이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약은 시였다. 그것은 물론 음악일 수도 무용일 수도,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단지 그 모든 것은 각자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고결한 자아를 일깨워주기만 하면 된다."(15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사라 달루아>
"그리고 나는 충만한 사랑을 누린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 사랑이 나를 이렇게 살게 해주었지." 그녀가 말하는 그 사랑은 바로 조셉과 나눈 절박하고 열렬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셉은 사라가 서른아홉 살이던 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그와 함께한 20여 년의 세월이 그가 떠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녀로 하여금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준 것이다.(166쪽)
"흰머리는 인생의 아카이브야. 내가 살아온 인생이 이 흰머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야. 그래서 좋아해. 그러니까 염색 안 하지." (166쪽)
"요즘 사람들은 언제 어디로 바캉스를 떠날까, 언제 바겐세일이 시작될까 하는 얘기들만 화제로 올린다. 예전엔 이웃끼리 눈만 마주치면 정치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정치 얘기를 꺼린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정치 얘기를 건넨다. 그것이 나의 실천이다."(168쪽)
<한국 국정원이 나를 투사로 만든다 - 브누아 켄더>
"각자의 입맛에 맞는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들은 흔히 돈을 버는 직업과 열정을 바치는 협회 활동에 동등한 에너지를 쏟으며 산다."(176쪽)
<혼자서 맞는 해방은 없다 - 루이즈 포르>
Q. 당신에게 좌파는 어떤 사람인가?
A. 옆 사람이 불행한데 나 홀로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 좌파란 또한 "세상 모든 일에 즉각적,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 무엇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각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줄 아는 사람"
<학교 수위 아저씨를 위해 연대하는 학부모들-토마 페루아>
"은퇴하면 피아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연주를 잘하고 싶다. 그리고 현대무용을 배울 생각이었다. 오래전부터 은퇴 뒤에 현대무용을 배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Q. 기타리스트 큰아들은 여유 있는 삶을 살지 않나? 아들이 아빠를 도울 수 있는 것 아닌가?
A. 아들은 도대체 얼마나 버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기댈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나이 들어서 덕을 보려고 그 아이들을 키운 것은 아니니까. 내가 정말 힘들어지면 아이들이 나를 도울지도 모르지만, 그 생각을 미리 염두에 두진 않는다. 나의 신념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워볼 생각이다.(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