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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록 - 정세균 에세이
정세균 지음 / 이소노미아 / 2021년 4월
평점 :
이 책은 원래 1년도 더 전에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려 했다. "정치인의 책"이 우리사회 리더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양서로서 "읽히는" 게 아니라 돈봉투를 모으기 위해 만들어져 라면받침으로 쓰이다 "버려지는"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편집자의 의지로 시작된 프로젝트라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선거를 앞두고 내는 보통 정치인 책의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막 나오는 책들을 보면 그 특징을 알 수 있는데, 흑백에 가까운 어두운 배경에 저자의 얼굴이 표지 전체를 채우거나 초록빛 자연같은 배경에 저자의 상반신이 나오고, 비장한 정치구호가 타이틀로 달리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의 얼굴은 커녕 빛이 내려앉은 옷자락과 옥색배경이 표지의 전부다.
제목은 <수상록>. 검색창에 치면 몽테뉴의 저술이 가장 위에 나오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글'이라 설명한다. 저자가 총리를 마치며 수정된 제목인데, '수상'이 행정부의 수장을 뜻하기도 해서, 말하자면 총리의 기록이라는 언어유희가 가미된 셈이다.
그렇다면 왜 이 프로젝트는 미뤄졌는가. 저자가 '갑자기' 총리에 지명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갑자기' 코로나라는 소용돌이에 우리사회가 빨려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장을 한 사람이 총리로 가는 게 맞느냐고들 했지만, 당의장을 하다가 장관으로 입각한 경험도 있는 그는 본인을 필요로 하는 때에 "격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꺼이 쓰이길 마다하지 않은 것 같다.
총리로 지명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통'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애초 김진표 의원이 유력한 상황에서 선회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결말은 '경제통총리'가 아니라 '코로나총리'로 이어졌고, 대중이 세균과 바이러스의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이 그 이름때문에라도 굳어졌다.
그렇게 "백신을 기다려 온 세균"의 이야기가 제2장 '바이러스와 싸우다'에서 펼쳐졌다. 지금이야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작년 초에는 엄청난 대란으로 공적 마스크니, 마스크 5부제니 하면서 마스크를 '구해다' 썼더랬다.
국무회의에 마스크 2부제 안건이 올라왔는데, 저자는 국가의 수급 능력을 고려해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며 5부제를 대안으로 냈다고 한다. 사실 국무회의에 올라오는 안건이라면 이미 수많은 회의와 부처간 논의를 마친 것이라 그냥 '의례' 통과된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거다.
그런데 저자는 그냥 통과시키지 않고 전례없는 국무회의 정회를 거쳐 5부제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이후에 이게 중대본 회의에서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대구에 코로나가 심각했을 때, 대통령이 만류했음에도 주저없이 들어간 대목도 고집있는 저자의 면모가 드러났다. 대통령의 뜻은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 외에는 마땅한 출구전략이 없는 상황에서 총리가 거길 들어가는 게 괜찮겠냐는 거였다. 저자는 대구로 갔고, 지금 돌이켜보면 대구 시민들의 모범적인 대응 덕에 결국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는 대구사람들을 만나면 위로와 칭찬을 전해달라고 한다.
저자의 고집은 제1장 '무엇이 올바른지'에서도 여실없이 드러난다. 일본과 외교를 할 때 소파의 높이를 같게 맞추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고 한 대목도 그랬고, 국회 청소노동자를 직고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번지면 좋은 거요"라며 노동자들의 오랜 숙원사업을 의장임기내에 해결한 것도 그랬다.
1장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종합선물세트'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그게 아니고 보수도 진보도 부패로 망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민주당을 편의상 진보라고 치자), 수많은 정치인의 손에 불법정치자금을 쥐어주는데 성공했지만 정세균 딱 한 사람은 실패했다는 한보사태 청문회 증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며 인터뷰도 다 거절했다지만, 수많은 '사과 하나 없는 사과상자' 혹은 '과자 하나 없는 과자상자'를 받았을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한숨과 함께 대비된다. 선당후사라는 말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 답게 정당정치에 이롭게 처신했단다.
정치를 대하는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제4장 '민주주의자 정세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어진다. "사장까지 하고 정치에 입문하라"는 쌍용그룹 회장의 말에 "국회는 다른 분야에서 용도가 다 끝난 사람들이 가서 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새로운 도전을 택한 그다. 다른 직업이었으면 진작 정년은퇴할 나이에 정치에 '입문'하는 일은 너무도 흔한데 말이다.
물론 재벌그룹 출신 경력을 십분활용해서 재벌개혁과 노사정 대타협에 분명한 기여도 했단다. 20년이 훌쩍 넘는 정치인생동안 굵진한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한 저자의 일정을 잠깐 엿볼 수 있었다.
자, 이제 그의 지나간 역사 말고 미래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지 궁금하다면 제3장 '더 훌륭한 나라'를 펼쳐 훑으면 된다. 실제로 그냥 훑어질만큼 분량도 내용도 많지 않은데, 그래도 정치인의 책에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현안에 대한 생각은 바로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나는 특히 재정건전성과 기본소득에 대해서, 4차산업혁명과 수소경제에 대해서 저자의 보다 깊은 생각을 알고 싶어졌다. 다음 대선에서 기본소득, 안심소득, 기본자산, 신복지 등 다양한 이름을 단 복지대안이 쟁점이 될 것 같기 때문이고, 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이 된 것 처럼 디지털경제, 수소경제 강국이 될 여지가 충분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매체나 공간을 통해서 알 기회가 있겠지 싶다.
<수상록> 전체가 짧고 쉬운 글로 쓰였지만, 제5장 '응, 아저씨가 진짜 세균맨이야'는 손에 든 책이 단숨에 읽히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다. 학교를 못 다닐만큼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아내와 장인어른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감정까지 진솔하지만 가벼운 언어로 던져놓았다.
특히, '세균'이라는 이름은 어릴 때부터 많은 놀림을 당했으리라 아주 확신할 수 있는 이름이다. 요즘이야 유산균이라든지 장내 유익균이라든지 균이 다 나쁜 게 아니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옛날엔 그리고 어린 아이들 사이에선 세균은 얼마나 불결한 대상이었을까.
하지만 저자는 청년들이 이름때문에, 그리고 외모때문에 선물한 세균맨 인형과 루피 인형(검색창에 "정세균 루피"을 쳐보시라)을 '명예보좌관'으로 여기며 아직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한편 지지난 총선때는 '소독차'를 타고 종로 유세를 다녔다고. 세균맨이 소독차에 올랐지만 죽기는커녕 여론조사 결과를 30% 뒤집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저자가 우리사회에서 '정치내 유익균'이 되었으면 한다. 여태까지 그가 쇼맨십이 부재해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최근 이란 선박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아마 다른 정치인이었다면 본인의 귀국에 맞춰 함께 오는 그림을 어떻게든 연출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저자는 하루라도 빠른 석방이 국익에 이롭다며 쇼할 기회를 쉽게 버렸다.
코로나 방역사령관으로 불린 그는 얼마 전에 퇴임했는데, 코로나 확산세가 줄어들 기미가 지금으론 보이지 않아 민심은 결코 좋을리 만무한 것 같다. "백신 문제를 뒤로 하고 대권 욕심에 사퇴했다"는 야당의 공격에 "사퇴는 대통령과 오래 전 얘기한 것이다"는 대꾸로 결코 달래질 것 같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정말 세균맨의 장담처럼 백신 수급이 계약대로 그리고 백신 접종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 말고는 답이 없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내가 저자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건 소리만 요란한 개혁도 아니요, 질 나쁜 포퓰리스트도 아니요, 일자리와 부동산을 축으로한 "다음 세대를 고민하는 정치"라고 생각해서다. 일자리에서 공공부문 어쩌고로 숫자를 채우는 것이나 부동산 시장에서 욕망을 통제하려는 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수상록>이 양서 그 자체로 평가받기엔 아무래도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대선 나가려고 낸 책"으로 읽힐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진심을, 편집자가 전심으로 엮은 이 책이 조용하지만 계속 읽혔으면 한다. 1시간 만에 우리사회 주요 리더의 목소리를 단숨에 읽는다? 유튜브를 1.75배속으로 재생해도 쉽지 않을 일을 이 책은 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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