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말들
천경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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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아니지만 조금은 낯이 부끄럽게도 난 어떤 형태의 예술이건 난해하거나 어려운 것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려운 주제임에도 그것을 나같은 사람이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지만 그것들을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의 묵직한 무게감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냥 봐도 난해한데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다면 그건 최악인 것. 미술 작품 보는걸 좋아하지만 딱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것도 그렇다고 꾸준히 전시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작품을 보거나 그 작품이나 작가의 히스토리를 보는 것만은 좋아하는 편이다. 나에게 미술이란 흥미는 있으나 어려운 분야이고 알고 싶은 분야이다. 사진도 마찬가지. 천경우라는 작가는 그래서 처음 듣고 접하는 낯선 작가이다. 더더구나 작가가 하는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를 하는 전시형태를 직접 본 적 조차 없다. 그런 작가의 작업노트라니 일단 궁금했고 흥미로웠지만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난해하거나 복잡한 것들 중에서도 그 작품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작품들이 좋을때가 있다. 그게 소설이건 영화건 시이건 미술작품이건 말이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 힘든 나만의 느낌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 물론 여기에 실린 25개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에게는 그저 낯설었을뿐 작품에 대한 설명과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읽는다면 누구든 어렵다 느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읽고도 어려운 작품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낯설지만 어쩐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 좋다 라는 느낌이랄까.

이 책이 실린 작품 중 가장 인상깊었고 참여까지 하고 싶었던 건 ‘고통의 무게(The Weight of Pain)’ 였다. 빨간 보자기 속에 자신이 느끼는 고통만큼 돌을 담아보라는 거였는데 고통을 어떻게 한낱 돌맹이로 젤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나라면 얼마만큼의 돌을 넣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나라면 아무것도 싸지 않을 것 같았다). 단순한 행위임에도 그 순간 사람들은 한없이 진지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서로 마주 앉아 서로의 어깨에 손을 한동안 얹어 놓는다거나 인도의 도시락 배달부에게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도시락으로 배달해주고, 땅속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파이프에 자신만의 메세지를 새겨 넣는 등 많은 참여형 퍼포먼스 작품들이 하나하나 내 마음에 그렇게 자리잡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아 좋다’ 라는 느낌이 서서히 마음에서 퍼저나갔다.

소소한 기억의 장소들은 흩어지고 미디어 속 세계에서 떠도는 타인의 삶, 가상의 공간을 배회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점점 늘어간다. 동일한 시대,장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각자의 내면과 시간 속으로 우리는 매일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는 대로 스스로가 속한 공간 고유의 그림을 담고 살아간다.

본문 85p 중

나에게 전시회란 완성된 결과물을 선보이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물음이 비로소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울림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 전시가 이루어지는가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가와도 같은 일이며 그것은 크고 작은 역사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본문 121p 중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낯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과도 같다. 내게 그 첫 번째 누군가는 작업의 대상이 되거나 작업에 참여하여 공동 주체가 되는 사람들이다.

본문 124p 중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프로젝트들을 실현해 오는 과정 중 늘 결정적인 단계는 불안하고 작은 모험을 위한 첫 편지를 띄우는 일이었다. 스스로 자초한, 혼자서는 실현 불가능한 어려운 작업의 조건들은 항상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숨겨진 좁은 통로를 찾는 노력을 요구한다.

본문 165p 중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업은 어떤 프로젝트라도 결코 작가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다. 이는 평정심과 겸손함을 조금 더 갖게 해주지만 불안감 또한 감수해야 한다는, 변하지 않는 작업의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위태로움은 어느덧 내가 사랑하는, 새로운 발견을 위한 설렘과 흥분의 여건이 되어 있었다.

본문 202p 중

공공장소에서의 퍼포먼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예측 불허의 위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개방성과 익명성이 주는 공공장소의 자유로움은 때론 한없는 소외의 섬으로의 안착이 되기도 한다.

본문 209p 중

한번은 자세히 보니 한 참가자가 자신의 손을 상대의 어깨 위로부터 1센티미터쯤 공중에 벌을 서듯 살짝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대의 손의 무게를 감지하지 못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편히 상대의 어깨에 온전히 의지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힘이 빠져 내려놓을 때에야 비로소 상대도 편히 내려놓는다. 어떤 이들의 맞잡은 두 손은 오랜 관계의 확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적당한 짐은 적당한 가벼움이라는 우리가 일상에서 배운 진리는 이상하게도 정작 제때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퍼포먼스는 산세바스티안을 시작으로 베를린, 브레멘, 프라하를 거쳐 서울, 코펜하겐까지 다리가 놓이듯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어느 도시를 가도 특별한 차이는 없었다. 특별한 작은 충돌의 경험들만이 쌓였고 모두가 고유했다. 의지함burden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의지됨support이 있었다.

본문 258p 중

나에게 전시는 완성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장소의 새 기억을 만드는 과정이다. 만남이 쌓여가는 동안 이 사진들은 나이가 들고 사진의 주인들과도 조금씩 이별을 하고 있다. 그리고 「Thousands」의 여정은 계속된다.

본문 316p 중

설치가 끝나면 항상 도로는 원상 복구되었고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작품이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묻곤 했는데, 나는 시민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아래로 에너지 원료뿐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도 우리 곁에 함께 흐르고 있다는 상상을 하길 기대하였다. 때로는 우리가 자리를 내줄 미래와의 대화같이도 느껴졌다.

본문 344p 중

직접 작품을 보지 못했지만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기쁨과 작품들의 의미를 느끼고 보면서 정작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작품이나 작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작품 활동을 하는가 하는 궁극적인 물음이었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니 답을 알 수는 없으나 책을 다 읽고 북마크 해둔 마음에 남는 문구들을 읽다보니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소통」. 꽤 긴 시간 머나먼 거리의 다른 나라에서 수 백 수 만의 사람들과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하나 하나의 디테일한 작품 설치를 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수고로움에는 낯선 나라와 공간,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나 자신은 물론 타인들에 대한 이해까지도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대로 직접 느끼는 물리적인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소통을 위한 작가의 작품들은 단순히 어렵다는 말로 치부할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참여를 통해 직접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물리적 소통 없이는 느낄 수 없다. 같이 있어도 손바닥만한 액정속에 갇힌 지금의 사람들을 위해 그 수고로움이 계속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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