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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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라는 감정은 눈물이라는 신체 반응과 동반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감정들은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면 어느정도는 해소 되는 듯 하다. 그 슬픈 감정들을 넘어서서 폐부 깊숙히 끝없이 파고 들어갈듯한 참혹함을 마주하면 슬픔이라는 말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눈물 조차 나오지 않는다. 머리의 피가 다 빠져 나가는 듯 창백해지고 어지러우며 속이 울렁거려 구역질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타는 듯한 분노가 솟구친다. 그동안 영화로도 소설로도 여러번 나온 ‘위안부’ 소재의 작품들은 애써 외면해왔다. 생각만으로도 이런 감정들이 솓구쳐 힘들기 때문에. 하지만 의도치 않게 우연히 그때의 사건들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야말로 슬픔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눈물로는 해소되지 않는 아픔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 두고두고 괴롭게 한다. 그래서 겁이 났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다보니 나는 소설속 화자인 금자이자 후유코의 마음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다. 지옥속에서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금자이자 후유코처럼, 감정들이 솓구치지 않도록 평소 책을 읽을 때는 하지 않던 음악을 들으며 이건 소설일 뿐이라고 애써 눌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 본 것들은 눈을 뽑는다 한들 잊히지 않는다는 금자의 말처럼 눈에 담기는 글들에서 감정을 배제하기란 무척 힘든일이다. 울컥하다가도 심장이 뛰고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마음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마주해야만 하는 이야기에 집중해본다. 

소설은 앞서 말한 금자이자 후유코인 '나'가 화자이다. 13살 아직 어리디 어린 나이 비단공장에서 돈을 벌게해 준다는 말에 따라 나선 길은 그러나 곧바로 지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야기는 해방을 얼마 앞두지 않은 해의 낙원위안소에서의 소녀들의 참혹함을 담고 있다. 저마다 가난에 못이겨 누군가에게 속아 따라나선 곳. 낙원이라는 이름과는 반대의 지옥같은 곳. 그곳에서 15살의 나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흐르는 강물에 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뱃속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제발 죽기를 바란다고. 하루에도 수십의 일본군을 받으며 살아가는 소녀들은 그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막상 죽음이 두려워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기도 하고 벗어나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그런 변해버린 모습들을 반기는 이는 없을거라면서.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당장이라도 이 소녀들을 데려다 직접 씻겨주며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제 괜찮다고.

소설에서 ‘나’는 금자라는 이름이 있지만 누구도 금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후유코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일본군들이 지어준 여러 일본 여자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렇게 몸도 정체성도 빼앗긴 소녀들은 생존만을 생각하며 죽음보다 더한 지옥에서 살아간다. 처음 ‘나’는 아기를 가졌다는걸 알고 부치지 못할 강물 위 편지에 아기가 죽기를 바란다고 쓴다. 전쟁이 이어지고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군인을 받으면서 죽기보다 힘든 지옥에 살면서도 정작 살아 돌아오라고 빌어 달라는 군인에게 살아 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속에서 죽어가는 군인들과, 같이 지내던 소녀들의 죽음을 보면서 점점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란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고 전쟁이 이어지면서 죽음이 난무하지만 점점 자라나는 아기 때문일까. ‘나’는 점점 누구의 죽음도 싫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쟁에 이겨도 벗어나기 힘들고 지면 죽음이 앞에 놓인 상황에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아기가 딸일까봐 죽기를 바라면서도 인간에게 삶과 생존,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8월 14일은 위안부 기림의 날이라고 한다. 사실 이런 날이 있다는 건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최근 중국에서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감독은 위안부라는 말이 맞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대외적으로 사건의 중대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실제로 기사로 접한 할머니들의 증언들은 소설에서 그려진 것 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그 글들을 본걸 후회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든 알았으면 했다. 잘못을 했음에도 숨기려고만 하는 가해자들이 다시는 숨지 못하게. 마지막에 ‘나’를 비롯한 소녀들이 살아 고향에 돌아갔는지를 알 수 없어 아쉬웠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만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이제는 잊어서는 않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소설을 보면서 나 역시 어느덧 변해있었다. ‘나’가 쓴 강물 위 흐르는 편지는 어디까지 흘러 갔을까. 나를 비롯한 소녀들의 이야기가 멀리 흘러 갔으면 바래봤다. 시간이 갈수록 잊히고 있는, 지금도 잊지 못할 옛일 때문에 힘들어 하는 그 예전의 소녀들을 위해서. 나처럼 마주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던 이야기에 외면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잊지 않기 위해서도 그녀의 흐르는 편지을 받아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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