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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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의 몰락과 러시아 혁명 후 정권과 사회 체제의 변혁이 한창인 러시아 모스크바. 몰락한 왕조 시대의 귀족 백작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숙청되어야할 계급에 속해 심판받지만 혁명을 지지하는 시를 썼다는 점을 고려하려 감옥에 수감시키거나 시베리아행 열차에 태워지지 않고 자신이 머물던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 종신 연금형이라는 다행스러운(?) 선고를 받게된다. 국가적,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분명 읽지 않았을 소설이었다. 어렴풋이 배웠던 그 시대의 사건이나 배경의 지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고 관심을 두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겠지만 한 남자가 호텔에 종신 연금에 처해진다는 이야기는 분명 무척 내 흥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이 남자는 왜 호텔에 영원히 갇혀 지내야 했을까. 그 안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며 그 남자의 심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등등을 상상하게 했다. 우리에게는 미국 전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추천하는 11권의 작품 중에 하나로 알려진 이 소설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했지만 정작 작가는 미국 출신이다. 출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러시아 출신이 아닌 사람이 이토록 타국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깊이있게 써내려갔다는게 우선 놀라웠다. 시대적 배경이 낯설지만 구시대의 백작 신사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흥미로울 것 같다.

연금형에 처해지면서 로스토프 백작은 자신이 묵던 스위트룸에서 허름한 단칸방인 호텔 꼭대기 구석 다락방으로 쫓겨가게 되는 신세가 된다. 가지고 있던 소지품도 나라의 재산으로 몇몇은 빼앗기고 몇가지만 가진 채 좁은 다락방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나라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그러지 않았다. 방은 바뀌었지만 늘 식사를 하던 레스토랑에 가고 늘 이발을 하던 이발소에도 다닌다. 그러면서도 신사의 품위는 지키려 한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하루 빨리 적응하는 방법. 백작은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아주 훌륭히 그것을 해낸다. 작가는 그런 백작을 소설속에서 맨체스터의 나방으로 빗대었다. 날개의 색이 흰색이던 나방은 산업이 발달하는 영국의 환경에 따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검은 날개로 바뀌어 진화한다는 것. 극한의 상황에서도 절망 대신 선택한 삶은 사람을 그 환경에 맞게 변화시키고 살도록 하는 것 같다.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가 말했다. -460 p 중

 

미국의 한 청년은 몇 해 전 벨기에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현장에 있다가 심하게 다쳤다. 전신에 화상을 입는 심한 부상을 입은 청년은 알고보니 이전에 파리와 보스턴에서 일어났던 폭탄테러 현장에도 있었으며 그 테러로 인해서 부상을 당했었다고 한다. 이 청년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테러 현장에 우연이지만 몇번이나 있었고 죽을 수도 있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부상만 당한체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불운의 사나이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마다 살아남은 행운의 사나이일까? 난 둘 모두에 해당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우연이지만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친 위험한 테러현장에 몇번이고 있었던 것은 불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던 현장에서 몇번이고 살아남은 행운아 라고도 할 수 있지 안을까. 한번 겪고 나면 밖에 돌아다니는게 무서울 법도 하지만 그러지 않고 지금은 건강을 회복해 해군사관학교에 재학중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 청년은 멋진 해군장교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로스토프 백작의 경우는 불운한 것일까 행운아인 것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어디선가 본 미국청년의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로스토프 백작 역시 둘 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평생을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어 한때는 자신을 버리려 했던 절망감도 느꼈지만 호텔에 있으므로 해서 겪었던 많은 일들과 만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연금형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행운인 것이다. 어린 소녀 니나를 만나고 니나로 인해 평생을 사랑한 딸 소피야를 만났고 사랑하는 연인 안나를 만났으며 늘 식사를 책임졌던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일하면서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러시아의 역사적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메트로폴 호텔은 그로 하여금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주는 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했다. 친구 미시카의 말대로 최고하고 할 수는 없지만 연금이라는 불운을 자신에게 행운으로 바꾸어 놓은 백작의 인내와 노력은 지금도 자신의 환경을 탓하며 불운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선택이 주변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소중해지는지 보여주는 듯 하다.

 

“내겐 너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음악원 경연 대회가 열렸던 밤이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최고의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안나와 네가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가 아니야. 그것은 바로 그날 저녁, 경연을 몇 시간 앞두고 네가 경연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609p 중

 

백작의 상황은 어쩌면 절망만이 있을 것 같은 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호텔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스크바의 신사는 그러지 않았다. 호텔에 한정된 삶이었지만 로스코프 백작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큰 세상을 만들었다.

세계적으로도 큰 영토인 러시아에 비하면 작은 호텔이라는 한정된 배경이지만 혼돈기의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깊은 서사를 느낄 수 있었다는데에 놀라운 소설이었다. 거기에 구시대의 표본인 백작이라는 신분의 남자가 호텔 연금형이라는 설정과 생각지 못한 반전이 소설로서의 흥미로움도 놓치지 않아 만만치 않은 두께의 긴 호흡의 소설임에도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지금 자신의 환경이 못마땅하고 답답하다면 여기, 구시대의 모스크바의 신사에게서 용기와 위로를 받아봐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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