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덴고에게는 인생 최초의 기억이다. 그 십 초 남짓한 정경이 의식의 벽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 앞도 없고 그 뒤도 없다. 거대한 홍수에 휩쓸린 도시의 첨탑처럼 그 기억은 홀로 덩그러니 탁한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31쪽
수학이 장려한 가공의 건물이었던 데 비해 디킨스로 대표되는 이야기의 세계는 덴고에게는 깊은 마법의 숲 같은 것이었다. 수학이 끊임없이 천상으로 뻗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숲은 소리 없이 그의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그 어둡고 튼튼한 뿌리는 땅속 깊이 뻗어나갔다. 그곳에는 지도도 없고 번호가 붙은 문도 없었다. -378쪽
그런 의문이 점점 커져가면서 덴고는 수학의 세계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의 숲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끌어들였다. 물론 소설을 읽는 행위 또한 일종의 도피였다. 책장을 덮으면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소설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수학의 세계에서 돌아왔을 때만큼 삼엄한 좌절감을 맛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덴고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째서일까. 그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윽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야기의 숲에서는 제아무리 사물간의 관련성이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어도 명쾌한 해답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그것이 수학과의 차이다. -379쪽
이야기의 역할을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문제를 다른 형태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동의 질이나 방향성을 통해, 해답의 방식을 이야기 형식으로 암시해준다. 덴고는 그 암시를 손에 들고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그 암시는 이해할 수 없는 주문(呪文)이 적힌 종이쪽지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모순을 지니고 있어서 곧바로 실제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언젠가 나는 이 주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그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덥혀준다. -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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