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HOW TO READ 사르트르 How To Read 시리즈
로버트 베르나스코니 지음, 변광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왜 태어났니?

  사르트르는 자유의 철학자라 불려도 손색없는 사람입니다. 평생 보부아르랑 연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고 하지요. 그의 사진을 보면 어딘가 기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의 눈이 사시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정면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는 시선! 그는 사시의 철학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철학자의 삶을 그의 철학에 그대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재밌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출생을 비평하며, 자신을 죽은 자의 아들보다는 오히려 기적의 아이라 부르는 쪽이 더 알맞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없는 유년 시절을 그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나는 초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존무, 1028~1029) 이런 유년 체험이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까요? 그러나 그의 자유는 저주받은 자유’(존무, 1029)였습니다. 그의 외갓집 생활은 그를 외톨이’, ‘이방인으로 만들었습니다(“아비 없는 아이로서의 나는 오만함과 비참함으로 가득했다.”(존무, 1033)).

  이런 체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해명하기 힘들겠지요. 다만, 그는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두지 않았답니다. 양녀만 들였다고 해요. 추측이지만, 그 스스로가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지요. ‘아버지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 했는지도.

왜 사니?

  소설 구토에서 로캉탱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동안 매달려 왔던 롤르봉 후작의 전기를 쓰는 일이 귀찮아졌기 때문이지요. 그는 심각합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생각할까? 나는 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왜냐하면...!”(구토, 149)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봐도 자유는 늘 불안을 동반합니다. 뭔가 하던 일을 딱 멈출 때, 어딘가 속해 있던 집단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불안합니다. 자유와 불안은 짝패인 것이지요. 이런 자유를 텅 빈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유는 존재를 갖지 않았다. 자유는 존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존무, 1030)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다시 할 일을 찾거나 다시 어딘가로 속하려 합니다. 존재와 자유를 일치시키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이지요. 이 연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이 연기는 또 다른 말장난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연기는 자유를 끝없이 연기시킨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mauvaise foi’인 것이지요. “그의 자유는 연기를 위한 자유이며, 그의 연기도 그에게 존재를 부여하지 못했다.”(존무, 1034)

  방황하며 열심히 일기를 쓰던 로캉탱은 드디어 결심합니다. “나는 노력해 볼 수 없을까... (중략) ... 그것은 책이어야 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다. (...) 예컨대 어떤 이야기, 일어날 수 없는 어떤 모험적 순간 같은 것. 그것은 강철처럼 아름답고 단단해야 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나는 떠난다. 몽롱하다. 결정할 용기가 없다. (...)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이어야 한다.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걸 쓴 사람은 앙투안 로캉탱이야. 카페에서 죽치던 머리칼이 붉은 놈이었지라고. (...) 그리고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도, 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그것이 내 뒤에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 아마도 어느 날, 이렇게 등을 오그리고 기차 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우울한 시간을 선명하게 떠올리면서 어쩌면 가슴이 더욱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야하고 말할 때가 오겠지. 그리고 나는 과거의 나를, 오직 과거 속의 나만을 인정하게 되겠지.”(구토, 251~252)

  우리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인정하게 될까요...

 

왜 죽지도 않고 또 왔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크게 유행했던 실존주의의 사조는, 1960년을 전후해 나타난 구조주의의 위세에 밀려 점점 세인들에게 잊혀집니다. 실존주의의 실존이 위협받게 된 것이지요. 변광배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 세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소쉬르의 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의 영향으로 이 세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그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면, 사르트르는 이렇게 해서 인간의 위대성을 믿으면서 인간에 대해 거대담론을 펼치는 20세기의 마지막 철학자였던 것이다.”(변광, 98)

  지난 세기의 마지막 철학자라는 표현이 서글프네요. 그러나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다루고 있는 타자의 문제는 라캉, 레비나스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그 이후에 나온 타자론을 그 아류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대요. 그렇다면 우리는 라캉을, 레비나스를, 그리고 그 뒤의 수많은 철학자들을 낳은아버지를 잊어야 할까요? 우리의 공부는 호로자식들을 생산하는 공부여도 좋을까요? 글쎄요. 아무래도 사르트르의 아버지 없는 사회 건설은 실패한 것 같군요.

  자, 이제는 하우투유즈사르트르를 고민합시다.

 

 

참고

로버트 베르나스코니, 변광배 옮김, How to read 사르트르, 웅진지식하우스, 2008.

사르트르, 이희영 옮김, 구토/, 동서문화사, 2011(2).

사르트르,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2).

변광배, 존재와 무 -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살림, 20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지음 / 책만드는집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아니 적어도 싫어하기는 힘든 시인 윤동주(1917.12.30~1945.2.16). 나 또한 그를 좋아한다. 이 감정은 내 개인사하고도 맞물려 피어오르는 것이라 쉽게 퇴색되지 않는 것이다. 그중 하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정병욱의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 정병욱은 시인이 독서를 폭넓고 깊게 하면서도, 좀처럼 읽는 책에 줄은 치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일종의 결벽성이 있었던 것이다. 시인을 닮고 싶은 마음에 나도 그 뒤로 한참 동안 읽는 책에 줄을 긋지 않았다.

  또 하나. 1 때 담임선생님이 그 글에 실린 윤동주 사진과 묘하게 비슷했다. 핏기 없지만 눈만은 형형했다. 그래서 좋아했다. 우연히도 담임선생님 과목이 또 국어였다. 자연스럽게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시험을 보는데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을 쓰라는 것. 나는 자신 있게 썼지만 실수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라고 쓸 것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라고 쓴 것이다. 선생님은 시험이 끝난 후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왜 그랬니? 그냥 한글로 쓰지. 나는 부끄러웠다. 다른 애들과 좀 달라 보이고 싶었다고, 그래서 선생님 눈에 들고 싶었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답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맞은 걸로 해줄게. 나가봐.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 등 그의 시집에는 명편들이 많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서시>이다. 이 시야말로 윤동주의 삶과 시 세계의 序詩이기 때문이다. 서시란 무엇인가. 시작이요 끝이다. 시인이 세운 최초의 뜻이자 독자에게 처음 건네는 인사말이며 결국엔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종착역이다. 그야말로 一以貫之인 것이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조금이나마 그 뜻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화자의 눈은 하늘을 향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고 있다. 깨끗한 하늘에 비해 내 마음에는 얼마나 얼룩이 많은지. 잎새에 이는 작은 바람에도 나는 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의 시선은 이제 땅에 내려와 앉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고, 죽을 때는 가장 낮아진다. 평생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조차, 죽음은 땅에서 맞는다(페루가 아니라). 시인은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시인은 오늘밤에도 괴로울 것이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므로.

  평생, 그래봐야 30년도 채 안 되는 삶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을 시인 앞에서 나는 부끄럽다. 이 시 앞에서 언제나 숙연해지는 이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4-12-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저는 서시를 개작해 떡볶이 집에
(한창 유행과 단골이던)시화전을 떡..하니 걸어 놔 버린 일도 있는 걸요.
그 말도 안되는 치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이십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감히 할짓이냔 말이죠..어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어야 할것이 한점 남은 떡볶이 육수에도 괴로워 했음을..로 개작 따위나 할 시가 아님을...암튼...딴엔 책 꽤나 읽어대는 문학소녀씩이나 되서 왜 그랬는지...지금도 생각함 얼굴이 벌게집니다..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양억관 역, 문학동네, 2010.11)를 읽기 시작했다. 1995년 일어난 '옴진리교 사린 사건'을 취재한 내용이다. 수십 명의 피해자와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한 것을 거의 그대로 실으려고 노력했단다. 머리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심히 신경 썼는지 엿볼 수 있다. 인터뷰 대상자를 공모가 아니라 직접 찾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 인터뷰이에게 몇 번씩 취지와 의도를 설명하고, 원고를 보내 정정 및 삭제할 기회를 준 것, 피해자들의 개인사에 더 귀를 기울인 것 등. 촉박한 시간과 선정성 등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매스컴 소속 기자라면 엄두를 내기 힘들었을 과업을, 소설가 하루키가 해냈다. 그가 대단한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일상은 깨지고 관계는 어그러졌다. 몸이 아픈 것은 차치하고라도, 트라우마 때문에 그들의 삶은 엉망진창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 중 다수가 가해자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뭐랄까, 자연재해에 당한 사람의 체념 같은 거랄까. 개개인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불가항력의 재난 앞에서 느낄 법한 무력감 내지는 허탈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과는 다른 반응이다. 그건, 사건의 양상과 본질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피해 당사자와 2차 피해자(유가족)의 위상 차이 때문일까. 어려운 문제다.

  세월호 문제도 이런 식으로 다루면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싶다. 생존자를 중심으로, 유가족들의 변화한 삶과 고통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작업이 될 것이다. 긴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터. 하루키의 인터뷰도 1년 내내 진행됐다고 하니,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상만 밝혀진다면야 기한이 얼마가 걸리든 무슨 상관인가. 해야 할 일이다. 나도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가 진행하고 있는 '잊지 않겠습니다' 기획은 훌륭하다. 박재동 화백이 희생된 학생들의 얼굴을 그리고 짤막한 사연을 덧붙이는 식이다. 이렇게라도 '학생들'이 아니라 각자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교롭게도 다시 기자 이야기이다. 최근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참고: http://blog.naver.com/rhkdqkr0414/220158336492)은,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슬픈 단면이기도 하다. '기레기'라는 신조어 역시 단순히 기자라는 특정 직업군을 향한 냉소와 야유가 아니다. 제대로 된 언론과 지식인을 갖지 못한 '불행한 우리' 스스로에게 짓는 씁쓸한 조소다.

 

  어쩌다 보니 기자를 여럿 알게 되었다. 개중엔 원래 친했던 친구가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경우도 있고, 이미 기자가 된 상태에서 친해진 경우도 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 그들은 생각보다 멍청하다. 과연 이 친구들에게 권력과 자본의 감시, 사회의 자정 작용 같은 엄청난 책무를 맡겨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이다. 내 주관적인 판단이라 위험하다고, 혹은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인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전의 정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는 경계하자. 내가 모든 기자들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내게는 그들의 지성 수준을 평가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만나는 기자 친구들(많아 봐야 경력 3~4년 차다)이 "차라리 입사 준비할 때가 더 똑똑했다"고 한목소리로 불평할 때는 이런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사실이다. 술 퍼마실 시간은 있으면서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술 마시는 게 정말 취재의 일환인가? 그렇게 친해진 취재원들이 하는 말 몇 마디 주 워섬기는 게 기자인가? 기자가 하는 기록이란 그저 받아쓰기에 불과한가? 당신들은 당신 스스로를 고작 그 정도에만 국한시킬 것인가?

 

  '한심한 기자들'(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기자가 없을 거라 믿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자신은 이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지나가시기를. 그리고 정말 아니시기를.) 속에서도 빛나는 기자들은 있다. 그들은 먼저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사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성역을 따로 두지 않고, 금기를 출입처로 삼아 쓰는 기사는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그런 기자야말로 진짜 기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인정하는 내용일 듯싶다.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다. 기자들이여, 책을 써라. 응? 책을 쓰라니? '무식한 기자들'(역시나 당신들과는 무관한 별칭이기를)을 '계몽'시키려면 책을 읽으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짜고짜 기자한테 책을 쓰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기자는 작가도 아닌데.

 

  꽤 오래전부터 어렴풋이나마 갖고 있던 이 생각은 최근 들어 확신이 되었다.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있는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다. 이 책은 서평의 형식으로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기자가 담론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다. 기사는 시의성을 띠어야 하지만 그 말은 곧 휘발성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혹자는 기사를 '시간이 낳는 쓰레기'라고 칭하기도 했다.)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나온 지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담론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특히 1부에서 다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3부에서 다룬 정치·사회 문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안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책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내가 애초에 이 책을 헌책방에서 집어든 이유,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란 바로 이 시대에 지식인(그리고 기자)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이 책(무엇보다 저자)에 기대 해보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에필로그_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에서 지식권력의 긍정적이고 변혁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권력을 실천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역량을 넘어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니, 지식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용기를 지렛대로 삼아 비로소 성립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존의 부도덕한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비상한 용기를 냈던 지식인의 전형으로 언론인 리영희를 드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리영희의 삶은 지식과 지식인의 관계를 다른 어떤 사람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343~344쪽)

 

  에필로그를 지식인의 존재 이유를 묻는 장으로 결정했을 때, 그리고 그 장을 강준만이 쓴 리영희에 관한 책(<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개마고원, 2004.)에 관한 서평 형식으로 꾸몄을 때 저자는 다분히 자신의 의도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투영했을 것이다. 그 의도란 지식권력을 갖고 실천하는 지식인은 언론인, 즉 기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가 "'리영희라는 창문을 통한 현대사 읽기'가 이 책의 표면에 흐르는 주제라면, '리영희라는 인물을 통한 강준만 읽기'가 이 책의 이면에 담긴 주제다."(345쪽)라고 말한 것처럼 <지식의 발견> 역시 여러 담론을 통한 '고명섭 읽기'를 위해 쓰인 책이다. 리영희 선생이 그 많은 저서로 언론인에서 언론학자가 되었듯, 강준만이 왕성한 '출판저널리즘' 활동으로 언론학자에서 언론인이 되었듯(345쪽의 저자 표현을 변용함), 고명섭 기자는 기자가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역시 저술활동이다. 

 

  주로 문화부 출 판 담당 기자를 지냈던 저자와, 긴박한 사건·사고 기사를 주로 쓰는 정경사(정치·경제·사회) 기자들을 같은 처지로 볼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정경사 기자들이 매번 인문학 서적을 읽고 담론의 흐름을 꿰뚫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겨레 고나무 기자의 <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북콤마, 2013. 제목 진짜 잘 지었다. 물론 이 제목은 <미생-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를 비튼 것일 터이다.)이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저격수'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고 기자는 신문지면을 통해서도 전두환 일가의 비리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이 책은 그 끈질김의 산물이다. 때로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건 전두환이라는 문제적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증거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건기자도 이렇게 전문성을 띨 수 있다.

 

  이야기가 또 길어지고 말았다. 이제 이 글을 맺자. 기자에 대한 사회적인 실망이 크다는 건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다. 아무리 '지사적 기자'는 사라지고 '직업인 기자'만 남았다고는 해도, 여전히 기자가 사회에 해줘야 하는 몫은 크다. 기자가 자신의 역할에 자긍심을 갖고 전문성을 갖춰 나가야 한다. 기자가 제대로 기자일 수 있는 환경도 사회가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다. 기자가 언제까지나 지식인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쓰레기가 아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 10년 전에 읽은 <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해냄, 개정판 2005.)는 이제 정확한 내용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받았던 충격은 여전히 선명하다. 도시 사람 전체가 하루 아침에 눈이 멀어버린다는 설정은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이 소설 전에는 미처 상상도 못했지만) 끔찍한 것이었다. 그 설정만으로도 소설 속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버렸으니까. 그런 상황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리 없어서 내심 안도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국가 전체가 장님이었음이 밝혀졌다. 마치 신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날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우리들은 자신의 눈을 뽑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이디푸스처럼? 우리는 그럴 용기도 없는 어른들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을 택한 비겁한 어른들이었다.


  이 사건 전에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비겁함. 여기서 사건이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하다. 사건은 사고와 명백히 다르다. 신형철의 말을 들어보자.


  "사고는 '사실'과 관계하는, '처리'와 '복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건은 '진실'과 관계하는 '대면'과 '응답'의 대상이다. 사건이 정말 사건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산출한다. 진실이 정말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 진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때 해야 할 일은 그 진실과 대면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다."('책을 엮으며',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229쪽.)


  세월호는 침몰했다. 그것은 사고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뇌 없는 정치인의 말처럼,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공명하는 것처럼, 교통사고 같은 일이 결코 아니다. 이런 시도 혹은 반응은 공적인 사건을 사적인 사고로 축소·왜곡하려는 저열한 물타기이다.


  다시 한 번, 다시 또 한 번이라도 짚고 넘어가자.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56쪽.)


  처음에는 함께 울고 걱정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이른바 '세월호 피로감' 때문에. 이 표현의 힘은 놀랍게도 강력해서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었다. 이제 좀 그만해라, 지겹지도 않냐,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냐, 민생민생민생... 유가족들이 당장 죽어가는데 자기부터 살고 보잔다. 

 

  과연 이들은 나쁜 사람일까? 천만에. 좋은 사람이다. 남의 일에도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 충분한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 다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좋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슬픈 일이 일어났는데 슬퍼하는 일을 누가 못하겠는가. 눈물은, 누구나 흘릴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은영의 말처럼,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진짜 과제. 자정의 그림자처럼 영원히 남은 숙제.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정부가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이려고 할 때, 그런 말들은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죽이려 든다."(신형철, 230.)

 

  슬픔에 대한 공부를 한다는 것, 그것은 눈을 뜨고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눈물이 계속 눈앞을 가리게 할 것이 아니라, 눈물에 깨끗이 씻긴 눈으로 진실을 주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박민규, 65)



* 이 책은 계간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와 가을호에 실린 관련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다음은 신형철이 '책을 엮으며' 한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한 슬픔은 합당한 이유 없이 눈물을 그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제 이 책은 세상으로 나아간다."(231)


  이 책의 순항을 기원한다. 그리고 진실의 생환도.


** 가장 흡족한 글은 역시 박민규의 글이다. 그 특유의 행갈이가 사람 마음을 이렇게 갈아 놓을 줄이야.


*** 사건 발생 205일 만에 세월호3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단다. 잘된 일이다, 일단은. 더디더라도 확실히 '해나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