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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짝퉁 라이프 - 2008 제3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고예나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소인배인 나에게 안 좋은 인상을 잔뜩 심어주는 표지의 책이다.
'마이 짝퉁 라이프'라는 제목이 너무 저렴한 티가 나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저급형정도일 거라고도 생각했었다. 특히 형광주황색 바탕의 표지때문에 더욱 더.
2008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진 젊은 신인, 그것도 여류작가의
처녀작은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마이짝퉁라이프의 짝퉁은 우리가 생각하는 루이비통, 프라다 따위의 짝퉁이 아니다.
소설 속의 ‘나’는 세상 모든 것에 흥미가 없고(흥미를 잃었다는 표현도 좀 애매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래전에 소멸되어버린 무중력 상태의 삶을 사는 여대생이다. 방학동안 오후 시간을 이용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게 주된 일상이고 그 외의 시간엔 친구 B나 R, 그리고 모호한 관계의 Y를 만난다.
작가 후기를 보면 소설 속 인물인 B와 R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모델로 한 것임을 알려준다. 그 말 인즉 이야기 속의 ‘나’는 작가 본인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는데,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 속 화자가 진짜 나라고 느끼는 동화상태에 빠져 있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나이와 ‘정상’적이지 못한 화자의 가족사가 나의 배경과 비슷한 점도 한 몫을 했다.
친구인 B는 자유연애주의자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인간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 아니 싫어하는 사람을 골라 구질구질하지 않고 뒤 탈 없도록 원 나이트를 하고 주위의 남자들과 쉽게 목을 섞을 수 있는 그런 사람.
폭발하는 식욕을 참지 못하고 늘 예뻐지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의 장점은 보지 못하고 늘 자신의 단점만을 먼저 발견하는 가엾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쏠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R 역시 어떤 면에 있어서는 B와 마찬가지로 ‘나’와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인물로 존재한다. 그녀는 언제나 사랑을 하고 오래 사랑하고 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고 있다. 단 한번 휘청거릴 정도로 무너질 듯 사랑을 하고 그 뒤론 건드릴 수 없는 짝사랑을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두고 마음의 빗장을 쳐둔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R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는 미묘하고도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곤 하는데 늘 사랑이 비켜가고 엇갈리기만 하는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라는 실체가 없는 감정에 대해 점점 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슬프도록 냉정하게.
Y는 친구와 연인, 그 경계를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존재 같다. 오랫동안 꾸준히 한결같이 나를 아껴주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주는 사람. 한편으로는 무한히 고마운 마음이 들지만 그 마음의 그늘에서는 상처를 줄까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커져 나는 Y에게 손을 내밀 수도 밀어내 버릴 수도 없다.
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몇 개의 가지를 통해 B와 R, Y 그리고 각자의 가족과 인생의 이야기가 비춰진다. 나의 독백을 듣는 동안은 완전히 나에게 동화 되었다가 B의 한마디 한마디를 듣는 순간 그때의 독자는 B가 되어버린다. Y와의 흔하지만 쉽지 않은 관계를 이야기 할 땐 나도 그리고 Y의 마음 까지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연락 없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며 벌벌 떨고 있는 R까지도.
책 속에서도 나오고 이미 세상에 널리고 널린 말이 되어버렸지만 정말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전혀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써 위로 받고 대신 고민해주는 화자인 내가 있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고예나의 이야기는 술술 쉽게 읽힌다. 젊은 감성으로 겉멋만 들어 어렵게 쓰려고도 하지 않았고 쉬운 표현이지만 딱딱 들어맞도록 문장이 짜여 있다. 읽으면서 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심플하게 정리되어 곳곳에 숨어있는 유머를 보고 가볍게 웃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의 매력 중에 하나이다.
***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혀 적지 않았다.
진실을 위로하는 가짜들의 이야기.
직접 책을 통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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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이런 말을 건네는 상상을 했다. 집에서 너는 한 칸만 쓰도록 해라. 그러면 주저 없이 화장실을 선택 할 것이다. ···· 당연히 아버지는 나에게 저런 질문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옛날부터 화장실을 쓸 때마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왔다. 다른 사람들 역시 아무도 물어보지 않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아생전 절대 물어보지 않을 질문에 대한 답을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꾸깃꾸깃 보관하는 사람들. ···’ -p11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그렇다. 엇갈리는 사람은 엇갈리기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만 하고, 아픈 사람은 아프기만 한다. 재화만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배급받지 못한 나는 내 사랑을 앗아 간 것처럼 사랑하고 있는 자들을 시기한다.
나도 한때는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안 하는 것만 못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그토록 쏟아 부었던 에너지는 지금쯤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지구 어디에선가 내 사랑은 무중력 상태로 떠 있으리라.' -p103
‘···나로 인해 누군가가 슬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슬퍼지면 그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것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같이 엄청난 양으로.
···나는 왜 제대로 사랑하는 것을 주저할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감정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왠지 옛날과 똑같은 절차를 밟을 것 같다. 나는 그때 이후로 두 번 다시 사랑이란 감정을 키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 p118
‘나는 당신을 만나면서 사랑이란 단어보다 더 우위에 설 수 있는 단어를 짓고 싶었다. 당신은 내게 하늘이 내려 준 천생의 짝이었다.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퍼 주었다. 하지만 주술에 걸린 내 사랑은 그 양이 줄어들지 않았다. 당신이 사랑을 아낄수록 내 사랑은 점점 불어만 갔다.’ -p120
‘···그러나 R의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을 도려내 본 적 있는 사람들은 동질감이 금방 교차된다.’ -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