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3나한테는 앞장서 가라고 하고,아버지는 바닷게처럼 옆걸음을 걸어서 나를 따라 왔어요.두 사람의 발자국을 조릿대 잎으로 쓸어지우면서.이디서 어디로 가, 아빠?내가 멈춰서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려줬어요.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마술 같았어요.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P.49~50견딜 수 없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나도, 빛깔 있는 꽃잎을 갖고 싶었습니다.저 양달에 핀 장미처럼 붉은 꽃잎을요.들국화처럼 보랏빛이어도 좋아요. 물망초처럼 푸른빛이어도 좋아요. 아무도 내 꽃잎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선명한 빛깔이 있다면. 아, 빛깔만 있다면.언젠가부터 나에게 벌들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비도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었습니다.내 꿀을 배불리 먹고 간 배추흰나비가 오후 내내 배를 앓았다고 저녁바람이 전해주었거든요."어쩌지, 네 꿀에 독이 생긴 모양이야.""잘됐네요."나는 쌀쌀하게 대꾸했습니다."모두한테 그 얘길 전해주세요. 아무도 나에게 찾아오지 않도록요."쯔쯔, 저녁바람은 혀를 찼습니다."내가 굳이 소문내주지 않아도, 더이상 아무도 널 찾지 않을 거야. 네 꽃냄새가 달라진걸. 달큼하던 향기 대신 독하고 습쓸한 냄새가 나는걸."쯔쯔, 혀를 한 번 더 찬 뒤 저녁바람은 떠났습니다.떠나면서 다시 할퀴어버린 꽃잎이 쓰라려왔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습니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