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새움 세계문학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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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6.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새움


어느 서생에 의해 버려진 새끼 고양이 우연한 계기로 중학교 영어 교사 구샤미의 집에 눌러앉지만 정작 구샤미는 새끼 고양이에게 마땅한 이름도 붙여주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욕구가 적고 속물들을 지독히 싫어하지만, 반대로 지적 허영이 가득하여 지식인으로서의 명예에 욕심내는 구샤미는 소심한 성격에 편협한 시선의 소유자다. 제법 학식과 교양이 풍부해 보이지만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고집으로 정작 중년이 때까지 마땅히 이룬 없는 서생인 구샤미 선생의 집은 그를 찾는 손님들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궤변만 늘어놓는 변변치 못한 미학자 메이테이, 구샤미의 제자로 가네다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박사학위 취득에 여념이 없는 간게쓰, 구샤미와 앙숙으로 마을 유지인 사업가 가네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대를 넘어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어쩐지 버려진 고양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마음을 꿰뚫는다. 그런 바라본 인간은 어느 한구석 신통치 못한 족속이다. 이놈의 지식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속세를 비웃으며 고상한 대화를 이어가지만, 고양이의 눈에는 그저 허세 남발한 농지거리에 불과하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나쓰메 소세키는 버려진 고양이 통해 인간 군상의 갖가지 비극을 프레임의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며 희극화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시대 배경인 메이지 유신시대의 일본은 급격한 서구화와 근대화로 인해 신구의 격돌이 한창이었다.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을 주장하는 보수 진영과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진보 진영 사이에 감도는 긴장은 소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의 렌즈는 진보수 진영 간의 대립을 그리지 않고, 나아가 자본주의의 실상과 폐해, 서구 문명에서 비롯된 개인주의에 대해 조심스레 비판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코미디 단편소설을 모은 소설집 정도의 느낌으로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있지만, 구샤미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 대화가 만담처럼 오가는 가운데 날카로운 풍자와 깊은 해학이 담겨 소세키의 담론을 엿보기에 좋은 소설이다. 또한 소세키의 현현인 고양이는 소설의 화자로서 인간만사를 꿰뚫는데, 고양이가 바라본 인간 군상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를 없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해 보이는 에피소드는 겹겹이 쌓여 인간사를 그리며 내러티브 전반에 걸친 소세키의 통찰은 시대를 넘어 우리를 관통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접하며 항상 아쉬운 점은 번역에 있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이미 100년이 지난 소설이니 시대와 배경에 대한 지식 없이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있고 소세키 문학의 특징 하나인 구어체의 사용은 아무래도 가독성을 떨구기 마련이다. 새롭게 읽은 새움 출판사 버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다른 부분은 제쳐두고라도 번역만큼은 박수를 보낸다. 물론 이것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말할 없겠지만 현대인들이 읽기에 아주 좋을 만큼 현대적인 번역으로 재탄생하였고, 덕분에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소설임에도 읽는 내내 끊김 없이 읽게 되어 좋았다. 물론 소세키 특유의 구어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구어체를 살리면서도 국내 60년대 문학 정도의 느낌으로 읽히니 전보다 공감과 재미를 느낄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가지 버전으로 접하며 개인적으로 가장 매끄러운 번역으로 새움 버전에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소세키 문학의 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접하려는 분들께 이번 버전은 번역 면에서 매우 좋은 소식이 아닐 없다. 아직 새움 출판사에서는 『도련님』, 『우미인초』, 『갱부』, 『마음』 소세키의 명작 출간이 예정에 없다는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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