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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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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소설 주인공들은 약간 특징이 있다. 행동하기 보다는, 사소한 행동을 속으로 관찰하고 고찰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나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의 주인공이 좋은 예다.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주인공도 이런 부류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침울하고 철학적이고 한없이 진지한.


  하지만 이 작품 속 '나'에는 한트케만의 특징이 담겨 있다. 그는 로베르트 발저의 어린애같은 즐거움이나 게나치노의 수줍음 없이, 더 자폐적이고 의문에 차 있는 주인공이다. 묵묵히 고뇌하며 그 답을 찾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책은 아내 유디트가 남긴 짧은 편지에서 시작한다. 오래 싸우고 증오했지만 이렇게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난 것에 놀란 '나'는 그녀를 찾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떠난다. 그는 그렇게 (지금까지의) 인생의 반쪽을 되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분명 여행을 통해 주인공의 자아가 변화하는 성장 소설이다. 내게 독특하게 다가왔던 건 우리의 주인공 '나'가 그렇게 어리지 않다는 것(이제 서른 살이다), 이미 결혼했고 직업도 있고, 인생의 성숙기에 도달한 인물같았다는 점이다. 익숙한 성장소설의 도식을 따르기엔, (스승을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가족과 헤어지고, 대학생이 되는 둥) 인생의 초창기의 단계를 이미 다 거치고 난 인물처럼 지쳐 보인다. 이런 '나'가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라니. 그는(우리는) 누구와 긴 이별을 하게 되는걸까?

 어린아이가 아니어도 성장할 수 있을까? 변화할 수 있을까? 이혼도 결혼도 다 말쑥한 어른들의 일 같아서 성장이란 코멘트를 달기에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억누르고, 번민하고, 투덜거리는 듯이 계속 고민하는 주인공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게 그는 소설 주인공이 지닐 법한 매력이 없었다. 만약 어느 파티에서 그를 보았다면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늘진 얼굴로 진지하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첫눈에 보자마자 반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람은 첫인상만으로 판별해서는 안 되고, 소설은 끝까지 읽어봐야 하는 법. 나는 어느새 유디트와 주인공이 서로 권총을 가지고 멜랑콜리한 기싸움을 하는 장면까지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존 포드와 유디트의 마지막 문장을 눈에 담고 책을 덮는 순간, 이 작품이 내게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가슴에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불었다. 이 소설이 여느 성장 소설과 달라서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나는 처음에 주인공의 독백이 유난스러워 보였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자기 행동을 반추하고 타인을 관찰하고 분류하는 걸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노력이 주인공이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고자, 타협하지 않는 진지한 삶의 태도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그의 지난 애인 클레어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함께 여행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어떤 강요나 부담 없이 함께하는 두 인물과 있으면서 주인공은 조금씩 변화한다. 나는 트럭을 타고 미국을 가로지르며 그가 느꼈던 감정이 참 소중하고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클레어와 과거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토론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어릴 때는 이러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인공은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고 계속 과거와 자신을 비교한다. <녹색의 하인리히>는 어떤 인물인지, 자신은 누군지. 그는 넌지시 말한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어쩐지 내가 변화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주인공의 끝없는 자기 성찰이 찾아낸 이 말은 감탄스럽다. 그의 성장은, 자아의 변화는 외부의 사건 때문에 벌어지지 않는다. 그는 성장을 겪거나, 맞닥뜨리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성장은 탈피처럼,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천천히 일어나는 과정이다. 계속해서 타인과,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심하고 관찰한 결과, 그는 서른 살에 변화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묘한 감회에 젖은 것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책을 통해(<녹색의 하인리히>)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자 했으나, 그 노력은 만족스러운 대가를 얻지 못했고, 아내와는 끝없이 다퉜으며 결국 그녀는 떠났다. 

 그녀를 찾아야 하는 건, 사라진 그 여인이 자기 자아의 타자. 반쪽이기 때문이다. 애증하는 그녀 없이 그는 고독하고 홀로 선 존재일 뿐이다. 

 주인공은 클레어에게 계속 어린 아이였을 때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배불뚝이가 되고 싶어' '나는 어서 빨리 늙고 싶어') 털어놓는다. 자신이 허물을 벗고 변화하는 중이라는 것에 당황스럽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 묵묵하게. 


 그는 유럽과 미국이 어떻게 다르고, 자신과 어린 시절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침착하게 숙고한다. 나는 그가 누구의 지도나, 가르침 없이 스스로 변화한다는 게 참 좋고 자랑스럽다. 그는 자신의 변화가 신기하고 흥미롭지만 길을 잃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여행한다. 트럭을 운전하고 종종 도로변에 멈춰서서 풍경을 관찰한다. 

 그의 깨달음이 실측백나무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도 신선하다. 그는 성장을 통해 사회 속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다. 대신 나무와의 교감을 통해, 어린 시절과의 이별을 통해 고독한 한 인간으로서 세계에 존재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면의 고뇌와 끊임없는 번민을 통해. 그토록 죽일 듯 싸웠던 유디트와 재회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녀는 그를 휘두를 수 없다. 그녀의 권총은 겁을 줄 수 없다. 죽음은 그를 두렵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번민하고, 답을 찾아 책과 내면을 탐구했던 그의 노력은 예상치 못한 여행을 통해 마침내 끝을 본다. 유디트는 그를 죽이지 않고, 둘은 함께 존 포드에게 간다. 둘의 기나긴 번민의 움직임들. 주인공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서 만나는 아내의 모습은 어쩐지 환상같다. 그가 오래 매달려 있었고, 이제는 보내주기로 결심한 과거의 자아같이 느껴진다.


 주인공은 성장하고, 자아는 한층 성숙하여 좀 더 평화로워 진다. 그는 아내와 헤어질 테고 여전히 고독하지만 공허하지 않게 삶을 살아갈 테지. 책을 덮으면서 나는 주인공에게 감명을 받았다. 탈피는 조용히 혼자서 껍질을 벗겨내는 괴로움 속에 이뤄지는 것. 그의 절제된 문장과 무심해 보이는 대사들 사이에서 나는 그 통증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못마땅했지만 1부가 끝날 무렵 나는 평생 그를 잊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문단을 발견했다. 


 '나는 클레어에게 옆방으로 건너가서 아이를 좀 살펴봐야 하지 않곘느냐고 했다. “베네딕틴이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그애가 지독히 외로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우리 둘만 여기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저 건너편의 그 미성숙한 존재가 고통스러울 만큼 따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져. 지금 당장 아이를 깨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따분함을 쫓아버려야 할 것 같아. 아이가 지금 따분한 잠과 꿈속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느껴져서 하는 소리야. 아이 곁에 같이 누워 위로의 말을 해주며 아이가 그 기나긴 외로움을 잊게 만들어주고 싶어.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그 즉시 의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내용의 옛날이야기들을 들으면 곧바로 수긍할 수 있어.” 나는 클레어에게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군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가 얼마나 구원되기를 바랐는지 들려주었다. p 107-108


 위로의 말. 변화는 피할 수 없고, 괴로움은 길고 긴 밤으로 계속된다. 결국 그는 지난 날과 기나긴 이별을 이루어 내지만,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혼자 떨 영혼과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한 소망을 드러내는 이 주인공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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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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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본래 훌륭한 지적 유희의 방법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책이 이렇게나 어렵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첫 문장부터 엄청나게 지루하다.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聯句로 이루어진 이 시는 총 네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연구서다. 연구서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목적으로 하니 소설적인 재미를 얻기 힘들다. 

 게다가 독자가 책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가 (나보코프가 아닌) 킨보트라고 것과, 존 프랜시스 셰이드라는 훌륭한 시인이 그의 있으며 현재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바람직한 독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허구의 세계에 빠져들겠지만, 나는 초장부터 투덜댔다. 누가 책을 읽을 때 이렇게 정신없이 앞뒤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거야? 

나중에는 독자의 권리를 남용하면서 대부분의 주석을 무시하고 읽었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넘어가면 저절로 책의 앞뒤를 넘나들게 된다. '창백한 불꽃'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일단 책을 절반 정도 읽는 게 필요하다. 여기까지 읽어놓고 그만두면 아까운데..싶을 때부터 가닥이 잡히고 페이지가 훌훌 넘어간다.

 책이 재미없다는 건 아니다. 그저 쉽게 읽히지 않을 뿐이다. 읽기로 결심한 사람은 활자로 이루어진 게임의 참가자다. 또는 정교한 공예품을 선물로 받은 어린애일 수도 있고.


 저자는 킨보트, 주인공은 시인 셰이드이다. 그는 죽었다. 시인의 작품은 저자에게 있고 그는 이 시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가 권장하는 독해는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르게 읽는 것이지만 나는 단 한번 내 뇌 속에서 타오른 옅은 불꽃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겠다. 애초에 킨보트의 말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


 우리의 시인이 진작에 죽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머릿말에서 저자는 자신한테 가해질 비난을 세세히 적어놓음으로서 마음 놓고 그의 이야기에 귀 귀울이려던 독자에게 경계시킨다.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겠지만, 나는 내 얘기를 하려오.

 나보코프의 책의 특징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서술자를 제일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책을 읽어야 하는 우리는 일단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견고한 위계를 (우리는 그를 멈출 수도, 중간에 끼어들 수도, 반박할 수도 없다.) 정교하게 사용하는 나보코프의 능력은 얄밉지만 감탄스럽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인 킨보트와, 불행히도 이웃을 잘못 만난 탓에 박제품이 된 시인 존 셰이드, 아마 제일 정확한 진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그덕에 색인에서 가장 작은 분량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시빌 셰이드 말고도 주요 인물은 하나 더 있다. 그라두스다.


 내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입체적이고 활자를 넘나드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일만큼 아름다운 문장은 바로 그라두스를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아득히 먼 젬플라를 떠나 푸른 애팔래치아까지 나아가는 그라두스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 이 시 전편을 통해 따라갈 것이다. 그는 시의 리듬이 만드는 길을 따라 어떤 각운은 타고 지나가고, 휴지 없이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시행의 끝부분에서는 미끄러지듯 돌아가고, 행간의 휴지부에서는 함께 숨을 고르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가듯 한 행 한 행 타고 내려가다 하단에서는 풀쩍 뛰어내린다. (''') 단어 사이에 숨기도 하고, 새로운 편이 시작되는 지평선에 다시 나타나 약강격 율동으로 일정하게 행진해 다가와 길을 건너고, 여행가방을 든 채 5보격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이동하다 뛰어내려 새로운 생각의 열차를 타고, 호텔 로비로 들어가 셰이드가 단어 하나를 지우는 동안 침대 등을 끄고, 시인이 그날 밤의 작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으면 잠든다.'


 이 매혹적인 묘사가 꼭 누구를 암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작가의 펜을 따라 움직이고 정지하는 존재, 그라두스는 사심없이 책에 빠져든 독자에 대한 은유다.


 그라두스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킨보트는 그를 조롱하기를 (그의 하층 계급적 면모와 부족한 지성같은 것) 서슴치 않고, 그의 여정은 실패와 허탕으로 이루어진다. 젬블라의 폐위된 왕을 충실히 좇는 인물은 그 뿐이다. 셰이드에게 젬블라 이야기는 유흥거리 이상이 되지 못하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돈 등 다른 인물들은 모두 킨보트의 상상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라두스만이 킨보트의 상상/회상과 현실 사이 경계선을 열심히 넘나든다. 


 우리는 저자를 믿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읽고나면 이 이야기가 상상이라는게 노골적으로 밝혀진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 실제 일어날 일을 가늠하는 저자의 태도가 괘씸하지만, 그로서는 학자의 마지막 도의를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 셰이드의 걸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젬블라 이야기는 아마 모두 환상일 것이다. 그건 저자인 킨보트의 삶에서 구현해낸 것일테지만 (그에게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숨긴채 결혼한 아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진실이 아니다. 셰이드의 죽음과 그의 삶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셰이드의 시와 그의 관계도 아주 미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냉혹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책은 글자 하나하나가 반짝거린다. 우리는 이 작품이 미치광이의 궤변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건 왜일까? 나보코프의 작품 전반에 통용되는 이 언짢으면서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 그건 도덕도, 윤리도 모든 통속을 벗어나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킨보트의 젬블라는 아름답다. 넓은 들에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앉고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거린다. 이런 풍경의 묘사 앞에서, 우리는 그 말을 믿고 안 믿고 할 틈이 없다. 순식간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의 상상은 젬블라의 형태를 만들고, 약간은 퀴퀴한 냄새가 날 법한 성을 짓는다. 러시아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이 문장들이 독자를 마취시킨다. 서사의 인과 관계에 (과연 왜 여기서 젬블라가 뜬금없이 등장해야 하는가) 대한 고민은 저편으로 사라지고 폐왕의 모험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가 더 궁금하다.

 마지막까지 감질맛 나게 뜸들이는 두 가지는, 도대체 젬블라의 왕이 누구인가와 셰이드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비밀은 책을 계속 읽게 하는 동력이다. 딱히 숨기는 건 이나다. 젬블라의 왕은 저자고, 셰이드는 운 나쁜 이웃을 만남으로서 그라두스의 총에 죽는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독자는 킨보트가 젬블라의 왕이라고 생각한다. 폐위되어 간신히 도망친 채 학자로 살아가는 인물. 하지만 책의 수미상관은 냉정하다. 머릿말에서 그가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을 미리 말한 것처럼, 끝에서도 그가 자기 서술의 허점을 인정함으로서 이야기는 사실로서 힘을 잃는다. 이건 모두 허구다. 판타지고, 한 인물 머릿속의 병적인 상상이다. 이렇게 김빠지는 일이 있을수가. 내가 열심히 그의 모험을 따라다녔던 건, 그의 터널을 함께 지나고, 그의 산 속을 함께 걸었던 건 전부 물거품이란 말인가?


 감히 농락당했다는 기분보다도 허탈감이 크다. 나를 놀린 건 그렇다치고, 젬블라는? 가여운 왕비 디사와 오돈은 어떻게 되었지? 이쯤 되면 우리는 이미 저자의 허술함에 익숙해져있다. 아쉬운 건 훌륭하게, 시인 셰이드의 구절에 맞추어 흘러가던 이야기가 급작스런 끝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일련의 판타지다. 없는 나라를 만들어 내고, 스스로가 그 제국의 왕이다. 하지만 터무니없지도 않고, 밉지도 않다. 그건 왜일까? 아까 말했듯이 아름다워서? 없는 허구의 나라가 풍경이 아름다워 무엇하나. 하지만 우리는 공감한다. 킨보트의 행태가 진실을 훼손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교한 장치를 분석하고, 되짚어 보고 위대함을 발견해내려 애쓴다. 왜 그러는가. 나보코프는 분명 기만을 즐긴다. 현실을 제쳐두고 미美와 비유와 품격을 애호한다. 이 재수 없는 (나는 이 말을 안 할 수 없다. 그의 귀족적인 성품은 꽤 밥맛이다.) 작가가 있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왜일까.

 그건 예술에 복종하는 그의 거룩한 헌신 때문이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흠모하는 사람이건 그게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마음 한구석에서 알고 있다. 인생은 그보다 지루하고 실망스럽다. 언제나 햇빛이 찬란하게 나비의 날개를 비추지는 않는다. 나비의 시체는 죽은 벌레 중 하나일 뿐이다. 

 글쓴이는 젬블라의 왕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왕이 될 수는 없다. 이 유한성과 무력함.

  적어도 킨보트는, 우리의 성실한 작가는 진실했다. 그는 예술의 신하였을지 모르나 노예는 아니었다. 마지막 몇 장에서 그가 밝히는 자기 작품의 결점은 이 이야기를 현실의 법칙에 (그라두스가 판사를 찾아온 정신병자였다면 그의 말은 거짓이다. 누구도 학교에서 보트킨/킨보트 교수를 찾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말은 거짓이다.) 포섭한다. 

 예술은 거짓이다. 가슴 아프게도. 정말로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세상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서. 이런 시도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무책임한 행동일 뿐일까?


 내가 킨보트를 옹호할 수 있는 건 그가 결국에는 솔직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을 주저 없이 털어 놓는다. 사실 그라두스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일 뿐이고, 학교에서 누구도 킨보트 교수를 찾은 적이 없으며, 시빌 셰이드는 그를 남편에게 빈대붙은 미치광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털어놓았기에.(아! 전부 거짓이었군) 킨보트는 그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비난을 막을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게 사실일 터이므로) 그런 것과 자신의 이야기는 별개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우리는 터널이 문 하나 하나를 열어보듯 책을 앞뒤로 살펴보고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삶이 무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에게 예술이란 절망적으로 아름다운 환영이다. 우리는 그 풍경을 누릴 자격이 있지만, 만든 사람은 허구를 지어낸 대가를 치뤄야 한다. 신뢰를 잃은 그는 대신 무얼 얻었는가? 


 나는 그라두스가 사심없는 독자에 대한 은유라고 말했다. 그는 되돌아 보지 않는다. 세이드의 펜 끝에 매달린 그는 젬블라 왕의 존재를 의심하지도 않고 계속 따라갈 뿐이다. 결국 고달픈 여정 끝에 그는 총알의 방아쇠를 당기지만, 아아 실패해버렸다. 그는 제일 훌륭한 완결, 킨보트의 목숨을 끊는 데 실패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주머니에 담긴 원고로 '삶에 대한' 그럴 듯한 '주석'을 만들어내야 하는 임무에 처했고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작가와의 게임에 기권한 독자라면 (나는 진작에 기권했다. 성실하게 두통을 앓느니 불성실하게 속는게 좋다.) 대게 그라두스의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에게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온전한 현실도 허구도 아닌 어중간한 장소가 우리의 세계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삶이란 물리 법칙보다 더 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그는 독자를 기만하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는 나를 미쳤다고 말할 테지만 내 이야기는 이렇소. 그는 제멋대로일망정 무책임하지는 않다. 


 우리는 그의 시빌 셰이드가 될 수도, 비판적인 교수진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그의 그라두스가 되고 싶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를 의심 없이 좇다 결국 함께 몰락을 맞이하는.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걸 지어낸 믿을 수 없는 저자 킨보트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해 꾸며내야 하고, 허구의 아름다움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를. 나보코프의 주인공들은 다들 대책없이 예술을 옹호한다. 도덕과 윤리의 뒤에서. 우리가 킨보트를 우상으로 보는가? 아니다. 험버트를 우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낭만적인 미치광이들이 인간 삶의 무시할 수 없는 면모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훌륭한 그라두스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셰이드를 죽여버렸으므로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오직 다음, 더 아름답게 타오를 다음만을 기대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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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른 변장과 다른 외관으로 꾸밀지 모르지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나는 많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사가 허락한다면, 되찾은 나의 왕국으로 배를 타고 귀환해 큰 소리로 흐느끼며 회색빛 해안선과 빗물에 어슴푸레 빛나는 지붕을 반길지도 모른다. 정신병원에서 몸을 움츠리고 신음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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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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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모든 거리와 광장이 그렇게도 빨리 텅 비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다시 집으로 향하는가?

 

저녁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떄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더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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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들녘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이었는데 한 이삼 년 전쯤 서울을 오고 갈때 읽었다. 기차 창가에 앉아 봄 햇살이 책장을 노랗게 물들이는 모습에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워하며 다시 읽으니 마음에 어떤 불손한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이게 전부 두 번 읽었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제국주의를 묘사할 때 쿳시의 달궈진 인두같은 분노가 문장 곳곳에 새겨져 있다고 느꼈고, 지금도 만연한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에 가슴이 무거워지며 책을 덮었다. 이 때 나는 책을 순전히 사회적으로 읽은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쿳시의 언명을 가슴에 새기더라도 구체적인 건 전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기 마련이다. 누가 내게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어떤 내용이냐 물었더라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입니다. 라는 뻔한 말 말고는) 주제는 기억나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무슨 이야기였지? 내 기억에는 막연한 몇 단어가 남아있다.

황량하게 펼쳐진 붉은 땅, 야만인, 고문, 여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이 장면이다.

 

한밤 중에 떠나려는 마차를 붙잡고 주인공이 말한다. '나를 어떡해 할거요? 가지 마시오!'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적은 도망가고 그는 홀로 남는다. 흙먼지가 날린다.

 

내 기억 속에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드라마틱 했는데, 다시 보니 그렇게 대단한 장면이 아니었다. 졸 대령의 비중도 생각보다 적었고 마차 안에서 딱히 논쟁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마차가 떠난 뒤에도 일곱 장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내가 이 책의 주제를 이미 알고 있다면, 다시 읽어 내가 얻을 게 무엇인가?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윤리 의식이 굳건하고. 두 번째로 읽을 때, 나는 이미 아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그래 제국, 그래 야만인들, 고문, 음 나쁜 녀석들!

그 대신 사소하고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풍경이 달라진다.

 

이 책이 로맨스 소설일까?

 

헌신적인 이야기 아닌가. 권력자였던 주인공은 야만인인 그녀에게 빠져 거지 매춘부에 불과한 그녀를 학대하지 않고 어루만져 준다. 그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떠난다. 그로인해 주인공은 모든 걸 잃는다.

'그녀'는 작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독자의 의식은 그녀와 치안판사 보다는 졸 대령과 치안판사 사이의 대립이 더 인상적이다. 둘이 문명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졸 대령은 그녀를 고문하고 치안판사는 그녀를 쓰다듬는다. 이 대립은 순전히 사상적이다. 둘 다 제국에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치안판사가 군인들 앞을 막고 서 미친듯이 화를 냈던 건, 야만인의 볼을 꿰맨 잔학한 짓 때문이 아니라 마을의 어린 소녀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걸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타락, 자비, 관용, 인도주의 정신. 치안판사의 한계는 자신의 마을까지이다. 그는 문명인이 문명인이기를 바란다.

 

처음 읽을 때부터 느꼈던 알 수 없는 불편함은 주인공이 외곬수적인 도덕심과 함께 미개함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야만인은 제국에 '이웃해' 사는 집단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그들은 차마 뿌리뽑지 못한 과거의 무지와 짐승성의 잔재이다. 야만인은 인류의 진보 이전 단계의 사람들이다. 야만인이 된다는 건, 그들과 공모한다는 건 퇴보를 의미한다. 야만인이 정말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위협적이지 않으면 유목인이라 불린다.

우리는 야만인이 진정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입할 수 없다. 제국의 인식이 오해라고 변호할 수도 없다. 쿳시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안으로 폭로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하'는 의도는, 독자 역시 제국 변방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시야는 치안판사의 시각과 동일하다. 제국의 논리는 허위고, 야만인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을 고통받게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은 그의 눈에서 폭로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하는' 시도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치안판사는 도덕적이고 인도적이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그냥 동조할 수는 없다.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잔인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마지막 양심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에 마냥 고개가 끄덕여지지만은 않는 건 왜일까? 그건 '그녀'를 대하는 치안판사의 태도가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조차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가 주인공에게 위선적이라고 비판한다면 그는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반길지도 모른다. 그의 자의식은 종교적으로 윤리를 추구한다. 나이는 먹어가고 제국의 수하인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사라져 간다. 그런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고문 당하고, 엉망으로 망가진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면.

 

이 둘 사이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야만인'이고, 자신은 치안판사다. 우리가 기만이라고 생각하는 걸 주인공도 똑같이 알고있다. 그래서 그런 비난은 이미 치안판사가 자신의 행동을 곱씹으며 한 고뇌의 반복같다. 그는 그녀를 동정할 뿐이고, 이 여자의 학대에는 당신도 책임이 있으며, 언제라도 그녀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자이면서도 착한 척, 자신만은 다르다는 듯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하지 말라는 비난이 힘이 있을까? 그는 그녀를 이용하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고향 사람들에게 돌려보내주었다. 강요도 기만도 없다. 하지만 이 예의바름에도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건, 그가 그녀를 이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고, 애타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안개처럼 둘러싼 이 허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치안판사는 체제에 순응할 수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다. 마을 안에 남겨진 야만인 소녀는 그에게 계시처럼 다가온다. 그의 내면에서 야만인은 제국에게 가족과 시력을 잃은 무력한 절름발이 소녀의 모습이다.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그녀를 괴롭힌다. 그가 진심으로 궁금하고 더 알고 싶어 묻는 질문은 그녀를 괴롭게 할 뿐이다. (그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가 한 일은 아니지만 그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문이다.) 치안판사의 금욕적인 1인칭 서술 덕분에 나는 이들의 행동이 정말 어떤 모양새였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둘의 관계를 정확히 보려면 3인칭 관찰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도 모르는 무언갈 원하며 기다린다. 용서의 몸짓이나 애정같은 걸. 그녀의 감춰진 속내를 자신 앞에서 드러내는 상상. (그는 꿈 속에서 어린 여자애의 얼굴을 갈망하지만 그건 얼굴의 형상이 아니다.) 이 상냥함은 졸 대령의 고문만큼이나 잔인하다. 그녀는 손바닥에 놓인 개미와 같은 입장인데 무슨 요구를 하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를 (다른 창녀들처럼) 어머니처럼 품어줄 수 없다. 그녀는 영리하고 살아남기 위해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태도를 몸에 익혔다. 사실 그녀가 감추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리고, 잔인하게 아버지를 잃은 소녀일 뿐이다. 그녀를 또다시 오해받는다. 치안 판사도 졸 대령과 다르지 않다.

 

'야만인'이라는 제국의 관념에서 주인공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눈 앞의 여자를 사람으로만 볼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주장할 기회가 생겼지만, 마음은 그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공모성은 이

그녀가 알 수 없는 존재인 건 야만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제대로 묻지 않기 때문이다. 알려들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그녀는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암시한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그녀의 속내도 알 수 없다.

 

자신의 침대 옆의 야만인에게,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는 장막을 걷어낼 생각이 없다. 그 반투명한 막 사이로 보이는 건 왜곡된 상일 뿐이다.

 

 

 

"저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다만 이제 내가 최대한 먼 곳까지 널 데리고 왔으니 내 마음을 아주 분명히 할게. 나는 네가 나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스스로 선택해서 말이야."

 

"왜요?"

 

그녀는 그 말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는 걸, 처음부터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 (.)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싫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야만인은 그를 떠난다. 그녀가 돌아간다고 말했더라면 그는 그제서야 그녀를 진정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야만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문명인이 되기로 선택했으니까. 하지만 치안판사는 그녀를 설득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녀를 얻으려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친절함, (그녀를 고향까지 데려다주려는 시도 등) 헌신이 충분한 설명이 됐을 거라는 듯이.

 

어두운 조명 아래 그녀를 놓아두고선 정확히 볼 수가 없다고 탄식하는 건 비열한 짓이다. 하지만 치안판사가 식민주의자들 특유의 위선을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건 그도 자신이 뭔가 어리석게 굴고 있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고뇌하기 때문이다.

 

나는 치안판사가 그녀를 원하면서도 주저하기만 할 뿐 진정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이 간극을 한 사람의 비겁함 탓으로 돌리수는 없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공모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호 이해의 가능성도 폐쇄시킨다. 나는 단지, 그가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제국의 폭력을 눈으로 보고 체화하며 자란 사람이 야만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다.

이 사랑의 불가능성, 치안판사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깨끗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집단의 폭력 앞에 개인은 언제나 무력한 것일까? 다시 읽으니 이 둘의 이별도 다른 낭만적인 소설만큼이나 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의 폭력은 언제나 있었고, 야만인을 멸시하는 오만함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면 우리의 늙은 치안 판사는 왜 이제와 모든 걸 바꾸려 드는가. 더 이상은 안된다고,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다른 것보다 사랑에 공로를 주고싶다. 그것이 연정은 아니었을지라도, 어떤 한 사람이 가슴에 깊이 박혀서 예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차마 인정할 수 없을 뿐 그녀는 그의 연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둘의 이별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오해만을 가지고 돌아선 것 같아 아쉽다.

 

그녀가 그를 사랑했을까? 그가 그녀를 사랑했을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대답이 아니다. 나는 시작도 못했다고 대답하고 싶다. 둘 사이에 고통과 신음으로 울부짖는 피의 강이 흐른다. 그가 그녀의 곁에 있기 전에 대면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는 선한 의지는 이 피냄새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자신의 손에서 나는 것만 같아서. 이 답답한 완고함으로 인해 그녀는 결국 그의 손을 떠난다.

 

"아깝구나" 나는 생각한다. "저애는 할 일 없는 긴긴 저녁시간에 자기네 말을 내게 가르쳐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젠 너무 늦었구나."

 

왜 그는 망설였을까? 그들을 막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입을 막고 치안판사가 그녀를 끌어당겨 제 것으로 감히 만들 수 없게 하는 건 무엇일까.욕망을 가로막고 상대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 이데올로기의 미시적 효과는 이렇게 작동한다. 진실한 상호 관계를 바라는 순간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건 모두 단지 이 소설에서 없는 낭만성을 끌어내려는 내 실없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망있는 제국의 하수인이었던 그가 모든 위험을 무시하고 행동하게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녀'가 우리에게 이름도 없이, 그저 낙오되었다 돌아간 야만인의 하나로 기억된다면 얼마나 아쉬운가. 한 사람은, 아무리 추하고 상처입었을지라도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야만인은 없다. 제국이 없는 것처럼. 그 변방에서 사람들은 살을 에이는 허위와 싸워야 한다.

 

-

 

"저는 가끔 여기, 아래층에 왔어요.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서로 얘기했어요. 그애는 때때로 계속 울기만 했어요. 당신이 그애를 너무나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알고 있었나요?"

 

(...)

 

"야만인들이 말을 타고 올 떄," 나는 말한다. "그애도 같이 올지 모르지."

나는 그녀가 말을 타고 기병들의 선두에서 안장에 꼿꼿이 앉아 눈을 빛내며, 자신이 한때 살았던 이 낯선 곳의 지형을 동지들에게 설명해주며 성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때는 모든 게 새로운 지점에서 시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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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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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얼마나 열정과 자유를 옹호하건, 나이 먹을수록 삶은 평탄할수록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나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해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주장하는 건 아닌지, 사람들은 신념이 있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행동이 먼저고 다른 건 전부 그럴듯하게 지어낸 변명이 아닐까하는 의심.

내 회한에 찬 백골을 이끌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는 대신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펼쳤다.

제목이 '거지소녀'. 책의 크기는 살짝 크고, 무게도 들고 다니기에는 좀 무겁다. 하지만 사막보다야 싸게 먹힌다.

가난한 계층에서 태어나, 운 좋게 부유한 집안의 자제에게 사랑을 얻고 그와 결혼한 로즈. 하지만 그 뒤로 그녀의 인생은 불륜과 이혼, 가난한 예술 노동자의 생활로 이어진다. 로즈의 인생 곡선을 그린다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생겼을 것이다.

열 편의 단편은 각각 로즈 인생의 한 시점을 그려낸다. 아버지에게 건방지다고 얻어맞는 장면에서 시작해 고향 술집에 앉아 동창과 시시콜콜한 옛날 일을 떠드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 나는 읽으면서 중간중간 그만 멈출까하는 고민을 몇 번 했다. 먼로는 너무 잔인하다. 그녀는 비정한 현자같다. 소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제임스 미치너의 말처럼)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라면 먼로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타고 남은 잿더미를 관찰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왜 그랬을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내가 무슨 일을 한 걸까?

'거지 소녀'는 줄곧 과거시제가 쓰인다. 단지 시간대의 차이가 있을 뿐 로즈는 작품 내내 자기 인생을 회상한다. 단편은 로즈의 인생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녀가 한 선택의 모음이기도 하다. 선택과 그 결과의 나열. 플로의 앞에서 건방지기로 한 선택은 장엄한 매질을 불러오고, 결혼은 이혼을, 반복되는 불륜은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만을 남기고 끝난다. 이미 모든 게 다 지나가고 난 뒤에 하는 회상에서 꿈과 환상은 그 빛을 잃는다.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건 철없음이고 꿈은 허영심의 발로다. 그리고 환상은, 환상이 할 일은 그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차차 깨닫게 하는 것이다.

사실 시점을 조금만 달리 해보면 로즈는 대단한 여성이다. 시대가 강요하는 의무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이루어낸 인물이다. 그녀는 젊은 여자들의 인터뷰 대상이 됨직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를 부러워할 것이다. 로즈는 가난하게도 살아보았고, 부유층의 화려한 삶을 누려도 보았고 윤리 기준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는 예술가의 칭위도 얻었다. 그녀는 분명 실패보다는 성공한 사람의 일원이다. 하지만 지난 날을 관조하는 그녀의 시선은 냉정하고 용서가 없다. 그녀는 자기 삶이 자랑할 만한 게 못 된다는 걸 안다.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길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덜렁거리는 맨가슴이 아니라, 자신이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실패였다.’ p 364.

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자유를 선택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인가? 잃는 건 완전한 가족과 고정적인 수입, 안락함과 평정 같은 것만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자부심은 반토막나고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로즈처럼 누구의 지지도 없이 자기 삶을 살기로 결정할 경우, 빈곤한 마을에서 자란 여자아이는 고향을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그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낄수록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고향이 그녀에게 가르친 건 겸손하게 불평하지 말고 자기 주제를 잊지 말라는 교훈이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p 352.


다른 예술가들과 로즈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그녀만이 가난한 계층 출신인 게 아니라 그녀만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 여전히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다시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 줄 거라고.

물론 그건 환상이다. 삶은 누구에게도 호의적이지 않고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려는 사람에게는 더 냉정하다


 자아를 찾아 문 밖을 나가는 사람에게 눈부신 빛, 인생에 맞선다는 결의같은 게 있을지 몰라도 그 역시 순간의 햇빛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밤이 되고 나면 그 사람이라고 후회스런 감정이 없겠는가. 평범하게 산 사람들의 후회는 차고 넘치는 데 제멋대로 산 사람들의 진영은 꽤 조용하다. 

 왜 일까?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한 사람은(특히 여성은) 어쩐지 삶에 대해 불평한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근면하고 순응한 사람들의 고단함에 감히 숟가락을 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염치없이 이기적으로 산다는 수치심 같은 게 속에 응어리지는 걸 막을 수 없다. 

 '거지소녀'가 여기에 주목해서 다행이다. 그녀는 자신이 꿈꾼 게 허영, 거짓, 기만처럼 느껴진다고 나는 부끄럽고 실패했다고 생각한다고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삶의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로즈의 세심함은 차갑지만 냉정하지 않다. 겨울밤 유리창에 달아오른 뺨을 갖다 대는 것 같은 위로가 있다. 이 책을 읽어 다행인 건 내가 환상을 품고 있던 삶이 그 빛을 잃은 것이고 애통한 것도 그 것이다. 나는 뜻하지 않게 너무 알아버린 것처럼 허탈하고 동시에 홀가분하다. 책이 내게 위로를 주기를 원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성숙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면면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고 그래야 바보같은 선택을 피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로즈의 이야기를 실패와 실망으로 점철된 우울한 넋두리로 읽는 독자들도 많은 듯하지만, 표면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아픈 경험을 통해 주류에서 벗어날 용기를 낸 로즈는 궁극적으로는 만족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탈출의 꿈만 꾸지 않고 직접 가봤으므로, 부딪치고 살아봤으므로, 궁금한 것은 끝까지 들여다봤으므로, 그 모든 수치와 비아냥을 견뎌냈으므로, 외롭고 보잘것없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삶이므로.' p 382


 옮긴이의 말을 읽고 어쩐지 나는 더 우울해졌다. 나는 이 이야기가 실패와 실망으로 점철된 우울한 넋두리라 좋다. 게다가 이게 왜 넋두리인가? 이건 아무런 유산 없이 자신을 만들어가고자 한 여성이 겪은 위대한 싸움의 회고록이다. 소설 밖의 세상에서 위대함이란 이렇게 별볼일 없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라는 단어로 이 책에 없는 온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망설여진다. 로즈는 자기 삶을 어떤 왜곡도 없이 진실하게 보고자 한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고, 보잘 것 없지도 않다. 이런 애매한 중간에 선 사람들은 주류에 머무르건 벗어나 패배감은 피할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어떤 삶이 너무 찬란하게 보일 때 그 빛은 꺼트려 줄 필요가 있다. 환한 빛은 시야를 흐리게 하고 환상을 만들어내니까. 그 환상이 얼마나 아름답건 소설은 예술이 아니라 진실에 종속한다.


 세심히 책을 읽은 독자라면 사실 로즈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서 애수가 없을까. 궁극적인 것보다도 사소한 것들이 나를 잡고 흔들 때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버틸 힘이 된다. 나는 고독, 독립, 열정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 이타심, 희생, 신의 같은 것보다 귀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두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로즈에게 그건 욕심이었지만. 


 삶이란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애인을 기다리며 터미널에 앉아 있어도 그는 오지 않는 것처럼, 감히 기대해서는 안 되는 법.


 덕분에 나는 전혀 다른 환상을 갖게 되었다. 한 십 년쯤 뒤에 풍파에 지친 모습으로 우연히 들어선 술집에서 생각지도 않던 동창을 만나는 것. 내게도 학창시절 랠프 길레스피같은 녀석이 있었다. 세상의 법칙이 내게 호의를 베푼다면, 우리는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나 주고 받을 수 있겠지. 술 한 잔으로 나누는 위안과 우정! 이런 몽상에 빠져 있자니 갑자기 로즈가 부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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