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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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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모든 거리와 광장이 그렇게도 빨리 텅 비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다시 집으로 향하는가?
저녁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떄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더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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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들녘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이었는데 한 이삼 년 전쯤 서울을 오고 갈때 읽었다. 기차 창가에 앉아 봄 햇살이 책장을 노랗게 물들이는 모습에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워하며 다시 읽으니 마음에 어떤 불손한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이게 전부 두 번 읽었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제국주의를 묘사할 때 쿳시의 달궈진 인두같은 분노가 문장 곳곳에 새겨져 있다고 느꼈고, 지금도 만연한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에 가슴이 무거워지며 책을 덮었다. 이 때 나는 책을 순전히 사회적으로 읽은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쿳시의 언명을 가슴에 새기더라도 구체적인 건 전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기 마련이다. 누가 내게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어떤 내용이냐 물었더라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입니다. 라는 뻔한 말 말고는) 주제는 기억나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무슨 이야기였지? 내 기억에는 막연한 몇 단어가 남아있다.
황량하게 펼쳐진 붉은 땅, 야만인, 고문, 여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이 장면이다.
한밤 중에 떠나려는 마차를 붙잡고 주인공이 말한다. '나를 어떡해 할거요? 가지 마시오!'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적은 도망가고 그는 홀로 남는다. 흙먼지가 날린다.
내 기억 속에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드라마틱 했는데, 다시 보니 그렇게 대단한 장면이 아니었다. 졸 대령의 비중도 생각보다 적었고 마차 안에서 딱히 논쟁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마차가 떠난 뒤에도 일곱 장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내가 이 책의 주제를 이미 알고 있다면, 다시 읽어 내가 얻을 게 무엇인가?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윤리 의식이 굳건하고. 두 번째로 읽을 때, 나는 이미 아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그래 제국, 그래 야만인들, 고문, 음 나쁜 녀석들!
그 대신 사소하고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풍경이 달라진다.
이 책이 로맨스 소설일까?
헌신적인 이야기 아닌가. 권력자였던 주인공은 야만인인 그녀에게 빠져 거지 매춘부에 불과한 그녀를 학대하지 않고 어루만져 준다. 그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떠난다. 그로인해 주인공은 모든 걸 잃는다.
'그녀'는 작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독자의 의식은 그녀와 치안판사 보다는 졸 대령과 치안판사 사이의 대립이 더 인상적이다. 둘이 문명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졸 대령은 그녀를 고문하고 치안판사는 그녀를 쓰다듬는다. 이 대립은 순전히 사상적이다. 둘 다 제국에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치안판사가 군인들 앞을 막고 서 미친듯이 화를 냈던 건, 야만인의 볼을 꿰맨 잔학한 짓 때문이 아니라 마을의 어린 소녀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걸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타락, 자비, 관용, 인도주의 정신. 치안판사의 한계는 자신의 마을까지이다. 그는 문명인이 문명인이기를 바란다.
처음 읽을 때부터 느꼈던 알 수 없는 불편함은 주인공이 외곬수적인 도덕심과 함께 미개함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야만인은 제국에 '이웃해' 사는 집단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그들은 차마 뿌리뽑지 못한 과거의 무지와 짐승성의 잔재이다. 야만인은 인류의 진보 이전 단계의 사람들이다. 야만인이 된다는 건, 그들과 공모한다는 건 퇴보를 의미한다. 야만인이 정말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위협적이지 않으면 유목인이라 불린다.
우리는 야만인이 진정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입할 수 없다. 제국의 인식이 오해라고 변호할 수도 없다. 쿳시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안으로 폭로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하'는 의도는, 독자 역시 제국 변방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시야는 치안판사의 시각과 동일하다. 제국의 논리는 허위고, 야만인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을 고통받게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은 그의 눈에서 폭로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모성을 부각하는' 시도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치안판사는 도덕적이고 인도적이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그냥 동조할 수는 없다.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잔인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마지막 양심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에 마냥 고개가 끄덕여지지만은 않는 건 왜일까? 그건 '그녀'를 대하는 치안판사의 태도가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조차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가 주인공에게 위선적이라고 비판한다면 그는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다. 아니 반길지도 모른다. 그의 자의식은 종교적으로 윤리를 추구한다. 나이는 먹어가고 제국의 수하인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사라져 간다. 그런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고문 당하고, 엉망으로 망가진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면.
이 둘 사이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야만인'이고, 자신은 치안판사다. 우리가 기만이라고 생각하는 걸 주인공도 똑같이 알고있다. 그래서 그런 비난은 이미 치안판사가 자신의 행동을 곱씹으며 한 고뇌의 반복같다. 그는 그녀를 동정할 뿐이고, 이 여자의 학대에는 당신도 책임이 있으며, 언제라도 그녀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자이면서도 착한 척, 자신만은 다르다는 듯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하지 말라는 비난이 힘이 있을까? 그는 그녀를 이용하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고향 사람들에게 돌려보내주었다. 강요도 기만도 없다. 하지만 이 예의바름에도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건, 그가 그녀를 이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고, 애타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안개처럼 둘러싼 이 허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치안판사는 체제에 순응할 수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다. 마을 안에 남겨진 야만인 소녀는 그에게 계시처럼 다가온다. 그의 내면에서 야만인은 제국에게 가족과 시력을 잃은 무력한 절름발이 소녀의 모습이다.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그녀를 괴롭힌다. 그가 진심으로 궁금하고 더 알고 싶어 묻는 질문은 그녀를 괴롭게 할 뿐이다. (그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가 한 일은 아니지만 그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문이다.) 치안판사의 금욕적인 1인칭 서술 덕분에 나는 이들의 행동이 정말 어떤 모양새였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둘의 관계를 정확히 보려면 3인칭 관찰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도 모르는 무언갈 원하며 기다린다. 용서의 몸짓이나 애정같은 걸. 그녀의 감춰진 속내를 자신 앞에서 드러내는 상상. (그는 꿈 속에서 어린 여자애의 얼굴을 갈망하지만 그건 얼굴의 형상이 아니다.) 이 상냥함은 졸 대령의 고문만큼이나 잔인하다. 그녀는 손바닥에 놓인 개미와 같은 입장인데 무슨 요구를 하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녀는 그를 (다른 창녀들처럼) 어머니처럼 품어줄 수 없다. 그녀는 영리하고 살아남기 위해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태도를 몸에 익혔다. 사실 그녀가 감추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리고, 잔인하게 아버지를 잃은 소녀일 뿐이다. 그녀를 또다시 오해받는다. 치안 판사도 졸 대령과 다르지 않다.
'야만인'이라는 제국의 관념에서 주인공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눈 앞의 여자를 사람으로만 볼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주장할 기회가 생겼지만, 마음은 그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공모성은 이
그녀가 알 수 없는 존재인 건 야만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제대로 묻지 않기 때문이다. 알려들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그녀는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암시한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그녀의 속내도 알 수 없다.
자신의 침대 옆의 야만인에게,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는 장막을 걷어낼 생각이 없다. 그 반투명한 막 사이로 보이는 건 왜곡된 상일 뿐이다.
"저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다만 이제 내가 최대한 먼 곳까지 널 데리고 왔으니 내 마음을 아주 분명히 할게. 나는 네가 나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스스로 선택해서 말이야."
"왜요?"
그녀는 그 말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는 걸, 처음부터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 (.)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싫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야만인은 그를 떠난다. 그녀가 돌아간다고 말했더라면 그는 그제서야 그녀를 진정 사랑할 수 있었으리라. 야만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문명인이 되기로 선택했으니까. 하지만 치안판사는 그녀를 설득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녀를 얻으려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친절함, (그녀를 고향까지 데려다주려는 시도 등) 헌신이 충분한 설명이 됐을 거라는 듯이.
어두운 조명 아래 그녀를 놓아두고선 정확히 볼 수가 없다고 탄식하는 건 비열한 짓이다. 하지만 치안판사가 식민주의자들 특유의 위선을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건 그도 자신이 뭔가 어리석게 굴고 있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고뇌하기 때문이다.
나는 치안판사가 그녀를 원하면서도 주저하기만 할 뿐 진정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이 간극을 한 사람의 비겁함 탓으로 돌리수는 없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공모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호 이해의 가능성도 폐쇄시킨다. 나는 단지, 그가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제국의 폭력을 눈으로 보고 체화하며 자란 사람이 야만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다.
이 사랑의 불가능성, 치안판사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깨끗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집단의 폭력 앞에 개인은 언제나 무력한 것일까? 다시 읽으니 이 둘의 이별도 다른 낭만적인 소설만큼이나 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의 폭력은 언제나 있었고, 야만인을 멸시하는 오만함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면 우리의 늙은 치안 판사는 왜 이제와 모든 걸 바꾸려 드는가. 더 이상은 안된다고,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다른 것보다 사랑에 공로를 주고싶다. 그것이 연정은 아니었을지라도, 어떤 한 사람이 가슴에 깊이 박혀서 예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차마 인정할 수 없을 뿐 그녀는 그의 연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둘의 이별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오해만을 가지고 돌아선 것 같아 아쉽다.
그녀가 그를 사랑했을까? 그가 그녀를 사랑했을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대답이 아니다. 나는 시작도 못했다고 대답하고 싶다. 둘 사이에 고통과 신음으로 울부짖는 피의 강이 흐른다. 그가 그녀의 곁에 있기 전에 대면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는 선한 의지는 이 피냄새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자신의 손에서 나는 것만 같아서. 이 답답한 완고함으로 인해 그녀는 결국 그의 손을 떠난다.
"아깝구나" 나는 생각한다. "저애는 할 일 없는 긴긴 저녁시간에 자기네 말을 내게 가르쳐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젠 너무 늦었구나."
왜 그는 망설였을까? 그들을 막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입을 막고 치안판사가 그녀를 끌어당겨 제 것으로 감히 만들 수 없게 하는 건 무엇일까.욕망을 가로막고 상대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 이데올로기의 미시적 효과는 이렇게 작동한다. 진실한 상호 관계를 바라는 순간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건 모두 단지 이 소설에서 없는 낭만성을 끌어내려는 내 실없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망있는 제국의 하수인이었던 그가 모든 위험을 무시하고 행동하게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녀'가 우리에게 이름도 없이, 그저 낙오되었다 돌아간 야만인의 하나로 기억된다면 얼마나 아쉬운가. 한 사람은, 아무리 추하고 상처입었을지라도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야만인은 없다. 제국이 없는 것처럼. 그 변방에서 사람들은 살을 에이는 허위와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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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여기, 아래층에 왔어요.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서로 얘기했어요. 그애는 때때로 계속 울기만 했어요. 당신이 그애를 너무나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알고 있었나요?"
(...)
"야만인들이 말을 타고 올 떄," 나는 말한다. "그애도 같이 올지 모르지."
나는 그녀가 말을 타고 기병들의 선두에서 안장에 꼿꼿이 앉아 눈을 빛내며, 자신이 한때 살았던 이 낯선 곳의 지형을 동지들에게 설명해주며 성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때는 모든 게 새로운 지점에서 시작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