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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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 초반부부터 묘사되는 검은 안경은 마지막 장을 덮고난 지금에도 제국주의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었나 싶은 야릇한 의문이 든다. 그것은 순백의 눈이 내리는 배경과 시각적으로도 극적으로 부딪히는데, ‘유리는 검은색이어서 밖에서 보면 불투명하지만, 그는 그걸 통해 볼 수 있다.’ 라든지, ‘신비로움을 과장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검은 안경을 벗지 않는 한 언제나 이곳을 검게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저 희디 흰 순백의 눈조차도 말이다. , 하얀 것도 하얗게 볼 생각 없이 애초부터 무조건 검게만 보기 위한 것일 테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야만이라는 작은 암시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는 어느 쪽에 서있는가. 핍박을 모르고서 제국주의의 안락함을 누리고 살아온 나는 평화가 좋다고 말한다. ‘설령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비싼 대가가 어떤 것인 줄도 모르는 채 그 평화를 몸소 실천해보이기로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로 인해.

 

그러나 문명의 혜택을 누려온 나였건만, 나의 성욕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고 묘사하는 나의 성욕은 동물에 빗댄 대로 야만의 습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야만인들과 나, 이 사이에 둔 채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하지만, 문명을 누리고 자신과 쾌락을 누린 그녀가 나를 선택함으로써 문명의 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 왜냐고 묻는 그녀에게 당황하고 만다. 아마도 는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야만인들이 들고일어나 우리에게 본때를 보여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나 역시도 결국에는 도시에서의 편한 삶과 이국적인 음식에 대한 기억이 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일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비렁뱅이 부족을 떠맡고 싶지는 않다고 했던 문명 제국의 우월한 기저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보낸 대가로 내가 얻어낸 것은 적과 내통했다는 낙인이다. 나뭇조각에 대해 졸과 나눈 대화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이번에는 다음 것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봅시다. , 글자 하나만이 달랑 쓰여 있구먼. 야만인들의 말로 전쟁이라는 말이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다른 의미들도 있소.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렇게 위아래를 뒤집어 읽으면 정의라는 말이 되기도 하오. 어느 것을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어요. 그게 야만인들이 교활한 이유요.’

 

그렇다. 진정한 의미에서 야만을 품은 건 그들이다.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며 그들 앞으로 나서지만 그들의 눈에 비쳐지는 는 이미 야만인이며 이방인일 뿐이다. 회초리를 잡으려 아우성인 군중들. 야만성의 진정한 민낯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클라이막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는 겨우 그들에게서 풀려나지만 만델에게 던진 질문 역시도 이 책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통틀어 가장 통렬하게 꼬집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들어보시오! 나를 오해하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오. 그 차원은 넘어선 지 오래됐소. 나도 법에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주시오. 나는 법이 집행되는 절차를 알고 있소. 때로는 법을 집행하는 게 애매한 경우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나는 단지 이해하고 싶은 것뿐이오. 난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소. 날마다 어떻게 숨을 쉬고 먹고 사는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상상이 안 되오. 그 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하지. 만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내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 질식할 것 같은데……

 

오래 전, 아마도 심리학 수업에서였던 것 같은데,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전기 고문 의자에 죄인이 앉아 있다. 고문관으로 임명된 사람들에게 전기 고문 의자의 전자 세기를 조절하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약한 세기의 전류가 가하는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도 힘들어했다. (죄인으로 설정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으로 실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한계점 그 이상이 될 경우 전기 고문 의자에 앉은 죄인은 죽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었는데, 그들은 차츰 전류의 세기를 높여나갔다. 죄인들의 고통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이들은 차츰 죄인들의 고통에 둔감해졌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나중에는 사망에 이르는 그 세기의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렀다. 만델도, 회초리를 잡으려 서로 앞 다투어 나서는 사람들도 모두 저들과 다르지 않다. 저 의자에 앉기 전에는 애초부터 중립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는 비로소 저 의자에 앉고 나서야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다사나난했던 한 해를 살았지만, 품속의 갓난아이만큼이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곳 사람들 중에서 회고록을 쓰는 데 가장 부적합한 사람이다. 분노와 슬픔으로 울부짖는 대장장이가 그 일에 더 적합할 것이다.”

 

정면에서 꿰찌르는 쿳시의 글은 내게는 감정적인 소모가 무척이나 컸다. 3인칭이 아닌 1인칭 인 탓에 비행법을 가르쳐준다는 미명 아래 쏟아지는 고문을 느끼는 장면들은 특히나 힘들었다. 쿳시는 그 상황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가차 없는 잔혹성을 보면서 가지게 되는 얼얼한 감정들은 근래 읽었던 여타의 책들에서 느낄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실체 없는 모든 일들에조차도 야만인들 때문이라며 비난을 돌리고 책임을 돌리는 그들을 보면서 관동 지진 대학살 같은 일들을 떠올린 것이 나뿐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아니라는 대답이 무슨 소용있을까. 겨우내 입을 열어도 하나의 대답만을 들을 작정으로 야만을 가하는데.

검은 안경을 벗은 졸 대령에게 치안판사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되새겨본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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