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평전 - 현대 중국의 건설자
에즈라 보걸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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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척단구의 작은거인,오뚜기 등으로 불렸던 덩샤오핑은 G2라 불리는 현대중국의 초석을 놓은 장본인이다.이데올로기에 치중했던 마오쩌둥에 비해 훨씬 더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춘인물이었으며,개인숭배와 같은 우상화작업도 멀리하였다.

중국공산당 초기멤버중에는 프랑스 유학파들이 많은데 이들은 마오쩌둥보다 시야가 더 넓었다.

덩샤오핑은 3번의 정치적위기가 있었으나 마오쩌둥은 그를 끝까지 내몰지는 않았다.항일전쟁시기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확고히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고 최초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했을때 공산당지도자들은 사회주의식 건설모델에 따라 중국을 만들어 가고자 하였다.자본주의를 적으로 생각하고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시함에 따라 "대약진운동"의 대실패와 급진좌경이데올로기로 점철된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정책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그럼에도 1인독재체제의 마오쩌둥하에서는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고 덩샤오핑은 수정자본주의자로 비판받아 문화대혁명시기에 지방으로 하방되어 공장노동자로 3년이란 시간을 보내야 했고,큰아들은 홍위병에게 시달리다 못해 창문으로 뛰어내려 척추를 다쳐 하반신마비의 장애자가 되어야 하는 큰 고통을 겪었다.

덩샤오핑은 나중에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에서 공이 7할 과가 3할이라고 하였으나,내생각엔 6:4로 낮추고 싶다.

덩샤오핑의 유명한 "흑묘백묘론"은 이데올로기보다 실사구시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이데올로기에 찌들어있던 마오쩌둥시대의 유산을 과감히 던지고 선진문물을 적극받아들여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이 들어 실질적인 인민의 삶을 향상시키고 현대화된 중국으로 변모시켰다.

덩샤오핑은 준비된 지도자였다.항일전쟁시기와 국공내전시기에는 사단 정치위원으로 뛰어난 군사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신중국건설이후에는 서남국을 맡아 토지개혁과 사회주의정책을 잘 정착시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그이후에도 지도력을 인정받아 2인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수정자본주의자로 몰려 여러차례 고초를 겪었다.덩샤오핑은 군사와 정치를 모두 겸비한 인물이었다.

50대후반부터 한쪽귀의 청력을 잃어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절제된 생활과 뚜렷한 판단력으로 사무를 바르게 처리했으며 아흔두살까지나 살았다,마오쩌둥처럼 영묘를 만들지 않았고 유해는 화장후 바다에 뿌려졌다.

험난한 시기에는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나았을지 모르나,신중국 건설이후에는 덩샤오핑같은 지도자들이 중국을 다스렸다면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같은 극단적인 좌경모험주의는 없을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외모로만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이 사람,덩샤오핑에게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것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잡는다면 좋은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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