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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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이란 가설은 언제나 재밌다. 시간이란 한정과 제약을 무시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기 때문에. 어쩌면 저마다 겪는 선택이란 고충 앞에서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행운이고 또는 후회이자 악몽일지 모른다. 만약이란 상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심 가득한 욕망에서 생성되는 인간의 가장 큰 한계이자 인간만이 지닌 무기다. 이로 인해 우린 매일 반성하며, 더욱 강해지고, 나날이 악랄해진다. 만약은 복기이자 투영이고 (어쩌면 또 다른 어제의) 반복이 아닐까. 그 물음이 가장 도드러지고 적나라게 되는 건 대체역사물이라는 유쾌한 사고 실험에서다.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유배되지 않았다면, 2차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내츄럴 본 기깔난 상상력의 필립 K. 딕이 이런 이야기를 놓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 [높은 성의 사내]는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을 그 가상의 물음을 가지고 필립 K. 딕이 자신만의 스타일과 비전으로 완성해낸 대답이다.
 
4명의 인물들(칠던/다고미/프랭크/줄리아나)과 하나의 소설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를 통해 자유자재로 역사를 재조합하고 투영시킨 필립 K. 딕의 이야기는 그 물음에 비해 사실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하다. 주역의 비논리성과 서양인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이 결합돼 만들어내는 편견과 작위성은 거슬리고, 큰 줄기가 잡히지 않는 난잡스럽기까지한 흐름은 피상적이고 어수선한 감이 있다. 레지스탕스의 치열한 다툼이 그려졌다거나 반이데올로기적인 철학이 확고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라 강렬한 맛도 없다. 그럼에도 계속 읽은 뒤 스산하게 잔상이 남아 뒷덜미를 잡고 있는 건 그 묘한 패배적인 분위기와 담담한 어조의 세밀한 관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약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내던져진 인물들의 갈등과 의심은 정체성에 작은 울림을 주게 되고, 이로 인해 행동하는 인물들의 작은 내적인 변화가 조금은 희망적일지 모른다는 변화를 암시하며 짙은 여운을 남기기에 더 오래 간직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높은 성의 사내]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안에 숨쉬는 미시적인 인물들의 삶을 통해 거시적인 화두를 던져내는 필립 K. 딕의 놀라운 내공이 묻어나는 작품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감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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