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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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부터 80년대, 2000년대 그리고 2020년대까지 꾸준히 만들어진 유명한 TV시리즈가 있다. ‘로드 셀링’이란 걸출한 각본가이자 제작자가 진두지휘한 [환상특급]이 바로 그것인데, SF부터 호러, 판타지, 시대극, 스릴러와 드라마 그리고 만화와 동화까지도 아우르는 미친 포용력과 상상력으로 다양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선보였다. 이후 [제3의 눈]이나 [어메이징 스토리], [기묘한 이야기]나 우리나라의 [테마게임],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켄 리우의 단편집들은 바로 그 미드의 전설이었던 [환상특급]을 떠올리게 만든다. [종이 동물원]과 한국에서만 선보였던 두 권의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에 이어 이번 신작 [은랑전]은 바로 켄 리우만의 환상특급 4번째 시즌인 셈이다. 분량도 아주 딱 맞게 13편의 단편이 빼곡히 실려있다.


장대한 미래로 나아가면서도 오롯이 모녀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는 ‘일곱번째 생일'부터, 외계 문명의 수수께끼 만큼이나 어려운 딸과의 소통을 다룬 가슴 찡한 모험담 ‘메시지’, 제2차 세계대전 속 비밀임무를 맡은 일본계 미국인의 가슴 아픈 사연을 원폭문제와 기가막히게 매칭해놓은 ‘맥스웰의 악마’, 필립 K. 딕의 단편을 떠오르게 만드는 외계인 이야기 ‘환생’, 허우 샤오센이 영화로도 만들었던 유명한 전기소설 [섭은랑전]을 모티브로 삼은 표제작 ‘은랑전’, 현재 가장 핫한 이슈 중에 하나인 디지털 복원과 인터넷 트롤링에 대해 생각할 거릴 던져주는 ‘추모와 기도’, 가상현실과 블록체인 기술을 다루는 동시에 사회 문제를 건드는 ‘비잔티움 엠퍼시움’, 삼국지 도원결의를 색다르게 재해석해낸 ‘회색 토끼, 진홍 암말, 칠흑 표범’ 등 장르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널뛰며 인류와 문명에 대해 거대한 담론부터 소박한 가족애까지 다루는 이 이야기들은 활자로 경험하는 이 시대의 [환상특급] 같다.


딱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켄 리우의 콘텍스트는 중국에서 태어나 이후 미국으로 이민 가서 자라고, 영문학과를 나와 프로그래머와 일하다 변호사로 근무한 그의 독특한 출생과 이력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동양과 서양에 대한 이해가 깊고, 그 총돌에 대해 몸소 체험했으며, 문과적인 사고와 이과 기반의 업무에 능통했으니 자연스럽게 온갖 혼종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교배되고 발휘된 게 아닐까.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의 소재들과 현재 최신 유행의 기술들 그리고 고전들을 가져와 켄 리우만의 필터를 거친 단편들은 날카롭고 냉철하지만, 그 속에 가진 따스한 휴머니즘이 가득한 시각으로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의 인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래서 일차적인 공포나 놀람, 감동과 즐거움을 안기는 것에 넘어 묵직한 여운과 사유, 고찰할 거리를 안겨주는 사고실험의 좋은 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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