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메멘토 II (Memento II/2900 한정)
기타 (DVD)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몇 달 전 지인으로부터 ‘해리포터 사이언스’라는 책을 한권 선물 받았다. 요즈음 국내외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소설을 영화화한 것에서 힌트를 얻어 영화 속의 장면들을 인용하면서 일반인들에게는 딱딱한 과학지식을 쉽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의 영화라도 여러모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시대에서 요구하고 있는 자연과학 지식과 인문학, 미술, 음악 등 폭넓은 주제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어 좋고 덤으로 어학공부까지 할 수 있어 마냥 ‘시간 죽이기’라고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문화 속 과학 읽기’라는 비슷한 맥락에서 흥미로운 영화 한편을 소개하면서 ‘기억상실증’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2001년도에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메멘토(Memento)’는 난해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뛰어난 역량덕분으로 오랫동안 영화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던 작품이다. ‘메멘토’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타이틀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기억’이 영화의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 얼핏 보면 단조로운 영상과 몇 명 되지 않는 출연 배우들이 반복하여 등장하며 뭔 소리를 하는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사실 복잡하지 않지만 영화가 전개되어 나가는 방식이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어 시청자들이 올바르게 사건전모를 파악하려면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다. 영화 속의 주인공 레니는 기억상실증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강간 후, 살해된 아내를 항상 그리워하며 살인범을 찾아 복수를 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집념의 사나이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전향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 환자로 오래전의 기억(remote memory)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최근에 습득한 기억(short-term memory)은 장기기억(long-term memory)으로 저장되지 못하여 다양한 증상들을 나타내게 된다. 10분 이상 지속되지 못하는 자신의 최근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레니는 필사적으로 온 몸에 문신으로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거나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를 방안의 벽에 모자이크처럼 붙여놓기도 한다. 하지만 레니가 살인범을 추적하면서 수집한 정보들 중에서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fact)은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선택되고 왜곡되어진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사실, 인간 모두에서 피할 수 없는 한계이기도하다. 영화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레니는 결국 아내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감행하고 심리적 위안을 얻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사건의 전모는 레니의 왜곡된 기억과 주변에서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기억이 뒤얽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부인의 죽음은 실제로는 자신과 관련이 있었고 그러한 고통스런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왜곡하여 다름 사람에 대한 기억과 융합 내지 전치시킴으로서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지탱하는데 중요한 역동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무의식의 힘이 살인범을 집요하게 뒤쫓는 수사관의 역할과 잘 들어맞을 수 있었고 영화 종결부에서 경찰관인 테디의 증언처럼 레니는 현재와 상관없이 계속 왜곡된  기억 속에 살면서 가상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수사관 놀이를 계속 되풀이 할 것이라는 예측은 시청자의 허를 찌르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인지능력은 ‘시간’이라는 물리적 속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시간의 순서를 조금만 왜곡하여도 정황을 올바르게 파악하는데 엄청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이 영화에서 쉽사리 체감할 수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인간의 기억능력이란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우리 모두의 심리적 필요에 의해 선택되고 각색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구성상의 재미뿐 아니라 의학적인 측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장면이나 대사가 많다. 기억상실증을 소재로 다룬 국내외의 영화가 많았지만 메멘토는 기억상실증의 원인, 증상, 유형 그리고 심지어는 감별 진단방법에 대해서도 현실감 있게 묘사한 최고의 영화이며 의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기억’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도 내포하고 있다.   
 레니의 기억상실에 대한 원인으로 영화 속에서는 아내의 강간범과 격투를 벌이는 도중 머리에 물리적 충격을 받아 시작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성병, 알코올 중독, 심인성 기억상실 등,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실제 진료 현장에서 감별진단 과정 중에 포함되는 사항들이다. 이전 보다 훨씬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매독(梅毒) 같은 중추신경계를 침범하는 성병이 기억장애를 유발할 수 있으며 AIDS도 점차 진행하면 치매로 발전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기억상실증이 뇌의 직접적인 손상으로 인한 기질적 뇌질환 때문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문제로 인한 심인성 장애인지 감별 진단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문제는 기억상실증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올바르게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보상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기억장애의 원인으로 국내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초래되는 베르니케 뇌병증이 적지 않으며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면 영구적인 뇌손상과 기억장애를 초래한다.
기억력 장애 이외의 다른 인지기능은 온전하게 유지되는 건망증훈군(amnestic syndrome)과 치매(dementia)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질환이다. 치매는 기억장애 이외에 언어능력, 추상적 사고능력, 시공간지각능력, 실행기능, 성격 등 인지기능의 여러 영역에 광범위한 장애가 초래되는 뇌의 질환이며 전 세계적으로 노년인구가 급증하면서 심각한 의학적 및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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