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부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스크롤했다. 친구들의 이름이 잇달아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사람들 각각의 이름이 기호처럼 느껴졌다. 내 전화번호부는 나와 관계가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전혀 관계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겠지."
당연한 거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인간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 정도면 그나마 낫다. 지금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뭐든 손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로채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누군가가 얻고 있는 그 순간에 누군가는 잃는다.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그런 세상의 룰을 자주 들려주었다.

신기한 일이다. 지금 내 휴대전화에 들어 있는 수많은 번호 중에 외우는 번호는 하나도 없다. 친한 친구 번호도, 상사 번호도, 하물며 부모 번호조차 못 외운다. 휴대전화에 나의 인연과 기억을 모조리 맡겨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전화가 생겨 곧바로 연결되는 편리함을 손에 넣었지만, 그에 반해 상대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시간은 잃어갔다. 전화가 우리에게 추억을 쌓아갈 시간을 앗아가고 증발시켜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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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숱한 악행을 저지른 그의 음악이 소름 끼칠 만큼 진한 감동을 안겨준가는 딜레마에 있다.

쳇 베이커의 삶을 관통한 세 가지 코드는 음악과 마약, 그리고 사랑이었다. 이 중에서 그가 가장 성공적(?)으로 체현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마약이었다. 심지어 말년의 그에게는 음악마저 마약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땠을까. 그에게 사랑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아니, 그래 보였다. 그 때문일까. 문득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그가 아닌 그의 여인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랑의 셈법에 따라 책의 내용을 다시 짚어 봤다. 그랬더니, 이런 얘기가 됐다.

한 사내가 있었다. 천재적인 음악의 감각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뜨거운 환호를 보냈고, 그는 스타가 됐다. 많은 여인들이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마약이 그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지지러진 눈빛 속에서도 그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여인들은 더 강한 집착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다. 어느새 그는,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제멋대로 살다가, 역시 제멋대로 죽었다. 알고 보니 그가 사랑한 건 음악과 마약뿐이었다. 여인들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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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21세기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뉴욕을 동경하는 것은 자신의 현 생활상의 원류를 찾고 싶어 하는, 일종의 회귀본능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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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로마법 수업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천 년의 학교
한동일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내 삶과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는 공부는 금방 잊히며, 결국 아무 데도 써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과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는 공부는 금방 잊히며, 결국 아무 데도 써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조직과 사회생활의 압력 속애서 함부로 짓이겨지고 뭉뚱그려지고 구석으로 밀렸던 개개인의 자아와 인간적 소망을 복원하는 긴 여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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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해 버릇하지 않아서인지 푸념도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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