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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 - 흑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경 해석, 소망 연습
이서 매컬리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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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 이서 매컬리, 백지윤 역, IVP.

📝이서 매컬리의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는 겉으로 보면 ‘흑인 그리스도인 신앙’ 내지는 ‘흑인신학’과 관련된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흑인신학’이라는 큰 담론보다는 한 개인의 치열한 영적 여정을 다루는 책으로 여김이 마땅해보인다.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이서 매컬리란 흑인 지성인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소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씨름한 흔적이 여실히 담겨있다.

📝저자는 크게 세 가지 범주의 선택지가 있었다. 먼저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며 흑인 차별을 조장하던 미근본주의와 대척점에 있었던 ‘진보적 학풍의 성경해석’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근본주의의 성경해석을 매우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지만 비판의 칼날은 고스란히 자신의 어머니의 신앙, 그리고 모교회의 신앙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그들에게도 여전히 ‘흑인’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의 성경해석은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었으나 이서 매컬리의 정착지가 될 수는 없었다.

📝‘백인 중심의 복음주의 신앙’ 또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이서 매컬리의 어머니 및 모교회가 갖고 있던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정서적으로 친숙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백인들의 책만 읽었고, 백인들의 논쟁에만 관심이 있었다. ‘진보적 학풍의 성경해석’에도, ‘백인 중심의 복음주의 신앙’에도 흑인이 있을 자리는 없어보였다. 따라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 신학자의 글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흑인이 쓴 글에는 흑인들의 고민이 있을테니 말이다.

📝이서 매컬리는 ‘흑인 신학자’들에게서 흑인들이 겪은 고민과 삶을 마주했다. 분명 백인들의 세계와는 달랐다. 하지만 ‘흑인 신학자’들은 기껏해야 ‘진보적 학풍의 성경해석’의 아류에 가까웠다. ‘진보적 학풍의 성경해석’의 전통 안에서 흑인들의 경험을 소화하고 해석했을 따름이었다. 그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이서 매컬리의 어머니 및 모교회가 갖고 있던 신앙과의 정서적 간극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에게 배운 것이 많음에도 그들 또한 정착지가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저자는 ‘진보적 학풍의 성경해석’이 갖고 있던 문제의식과, ‘백인 중심의 복음주의 신앙’이 갖고 있던 복음주의 신앙의 정서적 면모와. ‘흑인 신학자’들이 갖고 있었던 흑인 특유의 경험을 조우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 길은 자신의 어머니 및 모교회의 신앙을 계승하면서도 특유의 경험들을 녹여낸다. 따라서 책 제목이 바로 이를 함축한다.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 그는 나의 집에 있었던 진리를 고유한 경험을 버무려 새롭게 해석해낸다.

📝그의 종착지에서 만들어낸 결과물들은 놀랍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게 진압되었던 경험, 백인의 유산인 기독교를 버려야한다는 주장과의 논쟁, 인종분리정책에서 흑인들이 겪었던 고뇌 및 씨름 등등의 고유한 경험이 녹아있다. 그러면서도 옛날 어머니와 교회에서 배운 그 신앙 또한 생생하게 살아있다.

📚각자 다양한 이유만으로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 신앙의 정착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들의 여정 끝은 이서 매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옛날 떠나온 그 집에 있었던 진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응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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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 신약학자가 복원해 낸 메시아 예수 죽음의 비밀 북오븐 히스토리컬 픽션 1
애덤 윈 지음, 오현미 옮김 / 북오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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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복음서는 각양각색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죽으시는 장면만큼은 네 권의 복음서가 일관적으로 보도하는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아할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비열한 정치모사꾼으로 알려진 빌라도는 왜 예수님에게 무죄를 선언했을까요?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헤롯당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는 한 팀이 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입성하던 무리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으라고 외치던 무리들 사이의 온도차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온 백성에게 기대와 희망을 불어넣던 예수님이 죽었는데 왜 폭동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신약학자인 에덤 윈의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는 몰입감 넘치는 소설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이 빛나는 설득력 있는 가설을 통해 그는 다양한 층위의 욕망들을 다룹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가진 욕망, 빌라도가 가진 욕망, 폭력적 반란을 꿈꾸던 이들의 욕망,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었던 대중의 욕망, 그리고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욕망과 가룟 유다의 욕망까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 네러티브는 철저히 복음서의 신학적 의도에 기초하고 있을 것입니다. 반면 본 책에서 들려주는 네러티브는 온갖 사람들의 욕망이 부딪히고 만나는 날 것의 정치현실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서로 거래하고, 배신하고, 협상하고, 속이는 인간군상의 흔한 정치현실의 모습들. 하지만 본 책이 주장하는 서사 속에 푹 빠져들다 보면 복음서의 수난 네러티브와 본 책의 네러티브가 도리어 서로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본 책은 복음서의 역사서술에 빠져있는 퍼즐을 완성하는 실제 조각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각자 꿈을 꾸고, 서로를 이용하며, 때로는 적절히 배신하는, 분명 복음서의 수난 서사 기저에 있을법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당대에 서로 충돌했던 강렬한 열망들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제사장들은 당시에 어떤 꿈을 꿨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어떤 꿈을 꿨을까요? 혁명가들은 어떤 꿈을 꿨으며 빌라도는 어떤 꿈을 꿨을까요? 이는 예수님에게만 집중된 구원서사 기저에 있는 당대의 배경들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 또한 공감하게 만들어줍니다. 모두 그럴듯한, 일을법한 일들이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몰입감 자체가 뛰어난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당대의 역사문화적 정보를 제공하는데 과하게 에너지를 쏟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편의 잘 구성된 영화처럼 각기 다른 인간군상들의 장면들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서로의 욕망들이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또한 어떻게 만나서 창조적 변화를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과정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하게 잘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이는 근래 번역출간되고 있는 다양한 1세기 그리스도교 역사 소설들과 가지는 차별점이기도 합니다. 일주일 시리즈(<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 <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 <예루살렘 함락 후 일주일>)는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을 소개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이야기 뵈뵈>의 경우는 당대의 신학적 지평을 소개하는데 에너지를 쏟는다면, 본 책은 말 그대로 수난서사들 기저에 말하지 않는 의문적 요소를 해결하는데 '그럴듯한 서사'를 전달하는데 전력합니다. 부제가 말하듯이 말입니다. “신약학자가 복원해 낸 메시아 예수 죽음의 비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는 말은 명료하며 적실한 말인 동시에 너무나 많은 말들이 함축된 말입니다. 복음서의 수난서사 또한 신학적으로 명징한 의도가 담긴 네러티브지만 또한 당대에 있을법한 정치현실의 갈등이 함축된 서사입니다. 에덤 윈은 본 책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뒤편에 그럴듯한, 있을법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이는 십자가 수난 서사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주는 동시에 당시에 파급력을 가져왔던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죽으셨을까요? 무엇을 위하여 죽으셨을까요? 이에 대한 신학적 해답은 이미 성경에서 충분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당대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신약학자가 담대하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나간 서사에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담대한 상상력’은 도리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성경의 ‘신학적 의미’를 더욱 깊고 넓게 확대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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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뵈뵈 - 내러티브로 들려주는 바울의 그리스도교
폴라 구더 지음, 진연정.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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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뵈뵈>

시공간적 거리를 두고서 바울서신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독 바울서신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암묵적으로 알고 있을법한 이야기를 전제한 상태에서 다시 환기시키고 권면할 뿐입니다. 텍스트로 기록된 바울서신을 입체적으로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바울서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록되고 유통되었을까요? 바울서신을 읽고 해석하는 교회 공동체의 교우들은 어떤 방식으로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을까요? 더 나아가 바울서신에서 말하는 ‘복음’은 각 교우들의 삶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기능했을까요?
<이야기 뵈뵈>는 로마서에 기록된 ‘뵈뵈’에 관련된 두 절의 문장에서 담대하고도 거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대 교회 공동체의 정황을 묘사한 소설입니다. 근래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소설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벌써 세 권이나 유통된 일주일 시리즈(<고린도에서 보낸 일주일>, <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 <예루살렘 함락 후 일주일>)는 한정된 시공간에서 집약된 네러티브를 통해 당대의 문화배경을 고스란히 소개하는데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반면 <이야기 뵈뵈>는 그보다는 더 넓은 시공간 속에서, 때로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를 통해 당대 그리스도교 복음이 유통되는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를 들고 간 뵈뵈는 사실상 바울의 대변자가 됩니다. 또한 바울의 서신은 능숙한 사람에 의해서 낭독되고 낭독 중간중간에 사람들은 치열하게 토론을 벌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예배분위기와 로마교회의 예배분위기가 다르다는 뵈뵈의 인상평도 들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브리스가와 같은 여성 지도자들이 교회를 주도한다는 분위기도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저자는 뵈뵈라는 캐릭터에게 과한 상상력을 불어넣어 기구한 사연을 가진 여성이란 설정을 세웁니다. 뵈뵈라는 여성이 끝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복하고 새 사람이 되는 이야기, 더 나아가 스페인 선교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이야기 뵈뵈>의 핵심 줄거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성경과 공동체가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폴라 구더의 담대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야기 뵈뵈>는 그 자체로 재밌고 흥미진진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충분한 교육적 의도를 갖춘 소설에 가깝습니다. 실제 그는 2부에서 ‘정보전달’을 위해 다소 따분한 이야기를 집필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혹은 <어느 로마 귀족의 죽음>과 같은 역사적 상상의 소설의 사례를 참조했다고 밝힙니다. 그는 미주를 통해 그가 본문 곳곳에서 던져놨던 단서들,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졌던 설명들이 (마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처럼) 어떤 학문적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상세히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연구에 기반해서 소설 내의 설정을 창작했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고, 때로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선택을 ‘메시지’를 위해서 과감히 선택했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뵈뵈의 기구한 사연이 작위적이며 또한 갈등의 봉합과정도 개연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런 극단적 설정을 통해 뵈뵈라는 한 사람 안에서 신앙이 기능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일어났을 법한 흥미로운 사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과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공동체도 도움이 될뿐더러, 바울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이야기가 두루두루 복합적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이는 당대에 일어났을 법한 일인 동시에, 오늘날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영유하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있고,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당대에 영유하고 퍼져나갔던 그들의 ‘신념’이 각 공동체와 개인 안에 역사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폴라 구더의 <이야기 뵈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신념(예수-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통용되며 또한 역사하는지, 더 나아가 각 사람들을 회복하고 살리며 새로운 삶의 부르심에까지 기능하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제 그대로 ‘네러티브로 들려주는 바울의 그리스도교’ 정도로 이해하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평면적으로만 보이는 딱딱하게 굳어진 바울서신이 어떻게 생명력 있게 살아서 각 공동체와 개인에게 역사하는지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많은 통찰을 얻게 해줄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북스에서 책을 지원받아 독서하고 남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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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 가다
양혜원 지음 / 비아토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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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책이다.

이 책은 목사 사모이자, 번역가이자, 학자이자, 무엇보다도 ‘순례자’요 ‘제자’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양혜원의 제자가 되어가는 순례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이런 부제를 붙이고 싶어졌다. ‘한 그리스도인의 페미니즘 읽기’

저자는 종교와 페미니즘(1장), 이슬람 페미니즘(2장), 유교적 페미니즘(3장)을 차근차근 소개해나가면서 페미니즘은 끝내 모든 여성을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과, 더 나아가 페미니즘이 진단하는 사회의 원흉인 가부장제와 그 해결방안이 지구상의 모든 특정 개인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복음주의 개신교인으로 남아서 마지막 논지(4장)을 전개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선택하지 않고 ‘페미니즘’을 읽고 소비하는 ‘복음주의 개신교인’의 정체성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자는 본 책이 결국 ‘복음주의 개신교에게 허락맡은 페미니즘 소개서’ 정도로 혹은 ‘페미니즘에 대한 복음주의 개신교의 반박서’ 정도의 답정너 류의 책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본 책은 ‘이미 정해진 답’을 하기 위해 변증논리를 급조한 류의 책이 아니다.

도리어 본 책은 페미니스트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서 끝내 돌아선, ‘양혜원’이란 이름을 가진 복음주의 개신교인의 치열한 고뇌과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인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요.’라기보다는 ‘기독교인으로 성실하게 제자도를 따라나설 때에 페미니즘이 약속했던 해방을 얻을 수 있더라구요’라고 말하는 책에 가깝다.

아마도 대다수의 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은 페미니즘을 수용할 수 있을까?’ 정도의 맥락에서 본 책을 소비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그런 류의 의도를 갖고 접근하면 저자의 주장을 곡해하기 쉽고, 다양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접근방법을 바꿔보면 어떨까? ‘어떻게 그리스도인은 영적순례의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비롯한 다양한 세속학문들을 참고문헌으로 읽을 수 있을까?’ 본 책은 그리스도인 양혜원이 온전한 피조물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순례의 과정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세속학문을 배우고 또 비판하고 또 수용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진지하고 깊이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제자도’의 가치를 절대화시키면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폄하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컨데 낙태의 문제나, 동성혼의 문제나, 여성안수 등의 문제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교회의 교리와 문화를 개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도리어 각 개인이 제자도를 충실히 따르면 해소될 문제라고 덧붙인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종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견지했던 보수적인 입장의 판단을 고수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특정 문화에 대한 보수적인 판단을 철회할 때 무너지는 종교성이라면 이는 보수적인 판단을 고수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종교성을 더욱 강화시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닐까? 더 나아가 보수적인 판단을 철회하는 것이 기독교 가치에 의거한다는 자유주의 개신교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각 사안에 대한 교회가 지녀야 할 판단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논리’는 토론을 통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데 여성안수 문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들로 방어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저자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페미니즘을 공부했지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성억압에 대해 뼈저리게 체감한 사람이지만 목사 사모와 아내, 아들을 둔 엄마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교회적 문화에 있어서 보수적 문화를 고수할 때 교회가 얻는 유익이 매우 크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보수적 문화 속에서도 래디컬한 실천과 실천에 따른 해방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책은 다양한 생각과 논쟁을 유발한다. 섣불리 비판하기보다는 저자의 입장을 꼼꼼히 정독하고, 그에 따른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공부를 추구하는 이들에겐 좋은 책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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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1 : 476~1000 - 야만인,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1
움베르토 에코 기획, 김효정 외 옮김, 차용구 외 감수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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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가 아닌 에디터의 시대가 열렸다! 앞으로도 지속될 에디터 에코의 대작 시리즈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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