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아시아 건축기행의 특징]
서재 소장가치 : 상
독서 난이도 : 중하 / 읽기 쉬움
분량 : 300페이지 내외 적당한 두께
- 여행기행문으로 교양적 느낌의 비교적 읽기 편한 적절한 분량의 도서
- 적절한 양의 충분한 사진자료 첨부로 시각성 부각 및 가독성 가미
- 아시아 건축으로 하여금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
- 종교와 건축과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감상과 지식의 배양
- 아시아 건축을 통한 우리 건축의 의미에 대한 고찰 및 반성의 계기 제공
- 아시아 건축의 특징을 통해 그들의 생활상과 가치관에 대한 깊은 이해
- 해당지역에 대한 배경 설명 + 건축물에 대한 특징 소개 + 작가의 사유(메세지)
[아시아 건축기행 서평]
1. 아시아로 떠나다, 어느 건축사학자의 묵직한 동기
“그래서 한국건축이 뭔데요? / 8p
한국 건축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 책의 서두를 알리는 짧고도 강렬한 문장이다. 이는 당연한 듯 동시에 우리에게 생소한 사유일 수도 있다. 글쎄, 그러고 보니 나도 잘 모르겠다. 한국사람이에도 한국 건축이라고 확연히 말할 수 있는 그것을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지를. 당연히 작가는 보다 크게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이 책은 한국 건축이 무엇인지를 헤쳐 나가는 책은 아니다. 건축사학자라는 독특한 여력을 갖고 있는 작가는 한국 건축 자체를 돌아보려 하기 보다는 보다 넓은 아시아적 영역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한다.
시야를 아시아권으로 넓히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도대체 아시아건축이란 무엇인가?’
부끄럽게도 한국에서 아시아건축에 대해 가르치는 대학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의 교육은 유럽중심주의에 경도되어 왔다. / 8~9p
건축이라 한다면 다들 서양의 건축, 서양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화려하고도 압도적인 스케일의 건축양식과 분위기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건축들을 일반적인 건축, 건축의 이상과 보편이라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 머무르게 된다. 탈서양적 건축, 동양적 건축이라 하면 주로 불교사찰이나 전통 한옥 등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이 건축들이 동양적 건축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인데, 분명 커다랗고 근본적인 동양, 아시아적인 뭔가가 존재할 것인데 우리는 왜 그러한 동양에 대한 사유를 크게 할 수 없는 걸까. 이에 대한 의문은 위의 문장처럼 작가가 품고 있는 근본 문제의식에 해당된다. 유럽중심주의에 경도된 우리들이 기존의 서양 중심적 건축을 벗어나서 한국을 포함하고 있는 아시아의 건축과 그러한 아시아적 건축을 통해 어떤 사유와 어떤 부분들을 관찰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직접적 탐구를 위해 작가는 아시아로 직접 떠나게 되는 것이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종교(宗敎), 아시아 건축을 설명할 귀중한 토대
아시아 건축을 설명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인 것 같다. 문화(Culture)를 정의하는 방법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오랜 과거의 문화의 표출방식은 종교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서양의 건축에 있어서도 역사적으로 중세에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성스러움을 표방한 웅장하고 높게 솟은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졌지만 르네상스(부흥)의 도래로 인식의 중심이 인간중심적으로 크게 변화하면서 그에 맞게 바로크, 로코코, 고전주의 등등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
동양의 경우에도 작가는 아시아 건축을 바라보기 위한 핵심 요소로 ‘종교’에 주목한다. 첫 번째, 자이나교다. 자이나교는 인도의 좁은 지역세 소수 신자들만의 독특한 종교로 인식되는데 작가는 대표적으로 ‘빈디야기리’라는 거대한 돌산을 예로 든다.
사원은 바위산의 정상부에 소재한다. 아찔한 경사계단을 맨발로 디디며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행을 통해야만 만날 수 있다. 중간에 관문 같은 쉼터가 없었다면 등정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신자라면 이 정도 고행쯤이야 당연한 과정이었으리라. 극단적 고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방식은
자이나교의 핵심교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31p
과거 인도의 그들은 자이나교 교리를 통하여 해탈에 이르기 위한 생각과 인식들을 가시적으로 표출하고 정립시키기 위해 뙤약볕에 달궈진 614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고 그것의 교리를 지키는 자이나교인으로서 긍지와 사명을 다하기 위한 방식으로 건축이 이루어졌다.
둘째로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이다. 앙코르 와트도 역시 인도에서 기원한 ‘힌두교’라는 종교를 통해 건축이라는 가시적 형태로 옮긴 대표적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앙코르 와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앙코르 와트는 9세기 이후의 이 지역에서 시도해온 다양한 건축양식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콩 사원에서부터 시도된 힌두교적 세계관, 즉 만다라의 정확한 개념이 적용되었다. 사방의
바다를 상징하는 해자는 폭리 무려 200미터에 이른다. 해자를 뺀 사원의 외곽은 성벽으로 둘러
있는데 가로 815미터, 세로 1,000미터에 달하니 사원이 아니라 도시의 규모로 보아야 한다. / 155p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는 지금까지도 불가사의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장엄한 건축, 과연 인간의 힘, 인간의 사유를 통해 이룩해낸 건축의 형태라고 하기에 실로 표현할 수 없을 놀라운 규모로 만들어진 앙코르 와트의 외관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종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추측해본다면 해당 종교에 대한 종교적 실천과 사유가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차지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시아 건축을 설명할 또 다른 사례로서 미얀마의 ‘슈웨다곤 중앙탑’을 들 수 있다.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로 연상되곤 한다고 한다. 어지간한 사원의 불상들 중에 금으로 입혀지지 않은 것을 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도 불교, 불교적 세계관이 전제하여 다음과 같은 압도적인 모습을 취한 건축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중앙탑은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불탑의 위용으로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연출한다. 크기를 가늠
하기 어려운 원형의 기단부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탑돌이 길을 만들고, 탑신부는 종 모양으로
우아한 곡선을 이루다가, 상륜부에서 마치 안테나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마치 하늘세계와 교신
하는 모습이다. 거대한 규모를 우아하게 조형하는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형식으로는 미얀마 불탑의
전형적인 형상이나, 태양에 반사되는 황금빛은 비교할 데가 없다. 가히 불교문명사에서 가장
빛나는 불탑이라 할 수 있다. / 186 ? 187p
이렇듯, 자이나교, 힌두교, 불교 등을 통해 아시아의 건축을 말한다고 하는 것을 종교와 분리해서 생각하기엔 큰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두 눈으로 바라봄으로서 종교적 실천을 큰 염원에 두고 살며 유지해왔던 당대 아시아인들의 사상과 건축을 이야기한다. 즉, 종교 없이 아시아 건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아시아 건축을 설명하고자하는데 서론을 장식하기도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양의 종교적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규모의 건축이 결코 어디에 뒤지지 않을 만큼 그들만의 고유한 정신과 행동양식에 따라 정교하고 압도적인, 때론 감탄에 그치지 못할 수준의 건축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3. 좋은 건축에 대한 아시아적 사유, 유토피아를 향해
화려하고 웅장함이 강조된 건축은 좋은 건축일까. 아님 사치를 부리지 않고 아담함과 절제를 지킨 것이 좋은 건축일까. 사람에 따라 건축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방되는 것이지만 이상적 형태를 지닌 좋은 건축을 이야기함에도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적으로 ‘마이소르 마하라자’라는 인도의 어느 건축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인도-사라센’ 양식에 유럽풍이 가미된 초호화판 건축으로 지어진 왕궁으로 1987년 영국인 건축가 어윈이 설계한 것이다. 사방은 화려한 장식의 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있고, 내부는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밤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궁전을 소재로 한 디즈니랜드의 만화적 연출로 화려하고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인도사회는 극단적인 계급차별과 경제적 양극화가 크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문화적 관습으로서 남아있는 카스트제와 그에 따른 극과 극이 공존하고 있는 인도이나, 실제로 잘 사는 사람들 보단 여러 방면으로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만일 사치와 호화로움만이 강조된 건축과 공간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건축에 대해서 분명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도의 ‘마하라자 왕궁’을 통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사유한다.
이른바 시민의 공복들이 일하는 관청이 그리도 거창하고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그 관청의
준공식에서 흔히 듣는 정치인들의 인사를 반추해본다. 얼마나 많은 예산을 따냈고 얼마나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는지를 설파하는 자찬 속에는 공공사업을 자신의 치적으로 돌리려는 봉건군주의
인식이 투영된다. 그 관청에서 민원인들을 위해 어떤 서비스를 할지 예산낭비를 줄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그 거창한 건축물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공공사업의 목적과 과정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물어야 할 때이다. / 57p
그렇다면 좋은 건축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좋은 건축’이라는 태제를 두고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시아 건축에서 지향하는 좋은 건축이라고 함은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가 더 적합할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유토피아(Utopia)’로 나아가기 위한 모든 정신적 움직임, 그것이 가시적으로 표출된 것으로서의 건축을 그들에게 좋은 건축으로 표현한다.
좋은 건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연코 그것은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시대와 장소,
사회에 따라 이상향도 다르다. 좋은 건축이란 궁극적으로 그 시대와 장소, 사회가 꿈꾸는 이상향의
모습을 실현한 것이다. 그것은 건축적 장치를 넘어 인간과 사회, 장소를 둘러싼 환경이며 그것과
어우러지는 연출이어야 한다. ...(중략)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를 궁구하기에 앞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할 때 유토피아에 가까워 지는 법이다. /252p
아시아 건축은 외부공간의 관계에서 탁월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유럽건축과 대조된다.(248p)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이라는 도시에는 어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한 카페가 있다. 외관상으론 허름하고 세련되지도 개성미가 넘치지도, 스펙터클이 동원되지도 않은 건축이지만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카페 안은 의자도, 탁자도 없으며 지저분한 매트 만 놓여있다. 그럼에도 손님의 대부분은 서양인들이며 오히려 누워 자거나,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거나, 멍하기 앙을 바라본다. 그렇다. 특별히 볼 것도 없고 이용할 것도 즐길 것도 마땅히 없지만 그곳에서의 사람들은 그 공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 어떻게 보면 휴식일 것이고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지만 이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탈구속의 상태이다.
탈구속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사유하고 그저 자유로이 숨을 쉬고 나 외의 타자라는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무동(無動)의 상태, 그로 인한 평화이다. 그렇다고 탈구속의 상태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그곳에서 지향하는 이상향이 연출될 수 있도록 하는 건축, 유토피아를 향하는 건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라오스의 위의 건축을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좋은 건축에 대한 사유를 새로이 발견하고 느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아시아 건축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발견이자 관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를 궁구하기에 앞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할 때 유토피아에 가까워지는 법이다. / 252p
4. 그렇게 아시아 건축,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
그래서 아시아 건축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질문에 아시아 건축을 그렇다고 딱 하나로 엄밀히 정의내릴 순 없는 일이겠지만 작가가 직접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점들을 통해 이야기 한다면 크게 ‘종교’와 ‘유토피아’라는 두 토대를 가지고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는 절제미를 갖춘 건축들이 있지만 반대로 거침없는 화려함과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렇다 한들 이 고유한 두 토대를 두고 서양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건축을 서양에 의거한 기준과 가치관을 두고 건축의 질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일이다. 동양에서도, 다시 말해 아시아 건축을 통해서도 건축의 의미, 건축행위에 대한 사유를 보다 질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와 담론들을 생산할 수 있는 독창적 정신과 움직임,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구축된 아시아적인 건축미학을 느껴볼 여지가 충분하고 이는 어디에 뒤지지 않는다고 외칠 수 있는 하나의 힘이 실린 변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호인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아시아 건축기행』이 아닐까 한다.
한편 작가는 이 통해 오늘날의 한국건축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는 지, 나아가 한국 사람들이 다른 아시아 및 아시아 건축들을 통해 어떤 부분을 비교하고 있는지 그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건축양식도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교조적이다. 사찰은 우리네 전통건축이라 주장하겠지만,
교회나 성당은 옛날 건축양식에 머물고 있다. 서구에서도 골동품 취급을 받는 고딕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국에서는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다. 중국적 예제를 고수하려 했던 조선시대의 서원이나
향교건축과 다를 바가 없다. / 199 ?200p
너무 바쁘게 살아온 탓일까. ‘빨리빨리’라는 말이 세계백과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한국인의 시계는
유난히 빠르다. 일하는 것, 먹는 것, 노는 것이 모두 빠르다. 집을 짓는 것도 빠르지만, 지은 집을
허무는 것은 더 빠르다. 쉬는 것은 더 전투적이다. 뭔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인식하는
한국인의 다이내미즘이다. ...(중략) 이곳에서는 아무도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다. 라오스 사람은
시계를 찬 사람도 드물지만 심지어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버스가 언제 떠날지는 운전사
마음이고, 음식이 언제 나올지는 주방장 마음이다. 이 강변에 누운 사람들은 분명 시간을 잊지
귀해 온 사람들 같다. 시간에 속박되지 않은 나라에 와서 공연히 한국인들만 복장이 터지는
걸까. / 233p
위의 사유는 분명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따끔한 관찰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한국의 사유, 한국의 건축이 나쁘다, 잘못됐다고 해석하는 것은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방향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유들로 하여금 우리는 보다 한국적인 게 무엇이며 나아가 한국 건축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보다 한 걸음 나아가는 사유의 확장을 기대해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서도 작가는 한국 건축에 대해서도 나름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만큼, 건축에 대한 사유와 깊은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크고 번쩍인다고 해서 예술적, 종교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석탑은 중국,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창적 예술품임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 / 74p
시작은 한국건축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서 시작했지만 끝은 아시아를 횡단하면서 그 지역의 역사와 건축을 들여다보는 사유의 시간여행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건축을 보는 눈을 보다 공시적 차원에서 확장시켜주는 흥미로운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동양의 건축물들과, 우리 한국 건축에 대해서도 다시금 기억 속으로 나마 되감기를 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는 동시에 내용상으로도 어렵지도 않고 꼼꼼한 작가의 배경지식과 건축에 대한 설명, 그리고 건축에 대한 솔직담백한 사유역시 흥미롭게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끝으로 이 책을 통해 건축에 대한 사유를 보다 새로이 뽑아내어 동양의 이미지를 새롭게 발굴하여 그 숨결을 재발견하고 재고찰 함에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며 강영환 작가,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축에 대한 메시지와 사유를 독자들로 하여금 같이 공유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사유의 장이 적극적으로 마련될 수 있는 환경이 적절히 조성될 수 있기를 작가의 글을 대신해 마무리를 짓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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