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이충걸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충걸 에디터는 잡지 <GQ>의 편집장으로 잡지의 여는 글인 ‘에디터스 레터’를 써 왔다고 합니다. 장르의 구분 없이 패션, 건축, 문학, 사회, 미술, 음악, 사람 등 전 방위적인 부분을 예민하게 매만지며 때로는 냉철하게 또 때로는 따듯한 시선으로 글을 써왔다고 하네요. 이 책은 한달에 한번씩 18년 동안 빠짐없이 잡지의 첫머리를 장식하던 바로 그 '에디터스 레터'를 모아 엮은 산문집이라고 합니다. 이충걸 편집장은 때로는 문화의 예언자로서 혹은 비평가로서 해석하고 분석하고, 또 어떤 때는 선동가로서 사회 정치 예술 등을 대놓고 까기도 하며 담론으로 죽음 행복 고통 슬픔 사랑에 관해 대중들을 위무하고 위로하는 글을 썼다는데 과연 그 말처럼 책의 주제는 굉장히 광범위하고 다채로웠습니다. 문체 또한 평범하지 않아서 쉽게 읽고 넘길만한 가벼운 글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낯선 표현들과 생소하지만 깊이와 사색이 있는 문장은 그저 패션 잡지에 기고되는 겉멋에 빠진 가벼운 글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언듯 영화평론가 정성일 아저씨가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혹은 정치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충걸 편집장의 문장이 사색적이라 그런지 이 책을 설명하는 출판사의 서평조차 쉽지만은 않네요.


잡지를 읽을 때는 그 잡지의 기사와 사진만을 취하지, 그것을 쓰고 편집한 에디터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솔직히 '이충걸'이란 작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GQ>의 편집장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가끔 <GQ>잡지를 읽을 때면 이름도 모르는 편집장이 쓴 ‘에디터스 레터'라는 꼭지를 읽었고, 그 에디터의 이름이 이충걸이라는 걸 알게 된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충걸 에디터가 쓴 글을 읽을 기회는 있었지만 이충걸 에디터의 존재는 모른채 읽었던 것이죠. 이충걸 에디터의 글은 미려하고, 감각적이고, 세밀하고, 때론 날카롭고, 때론 강렬하며 응축된 힘이 느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글을 읽으면서 멋진 글솜씨에 감탄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패션 트랜드 잡지의 에디터가 쓰는 잡지 서문 정도로만 생각해서 잡지 속에서 그 글을 소비하기만 했지 더 확장시켜서 에디터가 누구인지, 그가 쓴 또 다른 특별한 글들은 없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이라는 제목처럼 특별했던 이충걸 에디터의 글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책은 8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패션 트렌드 잡지의 구성처럼 패션, 문학, 미술, 사회와 같은 직관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 [과잉 반란 피상성 남자 행인들 외양 혼자 어제]의 지극히 추상적인 구성으로 묶여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글의 [외양]보다 글에 담겨 있는 [피상적]이지 않은 늬앙스를 중요시 하는 이유인 것도 같습니다. 애초에 패션 잡지에 패션 이외의 문학, 사회, 인간관계, 미술, 음악과 같은 주제로 글을 쓰는 것부터가 [반란]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은 18년의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의 그 당시 문화와 트랜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아카이브입니다. 정확히 어떤 특정 시점의 어떤 특정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형식적인 아카이브는 아니지만, 반대로 글을 읽다보면 대략 어느 정도의 시기에 씌여진 글인지 역으로 추정이 가능해지는 글이 있습니다. 가령 '그래도 카세트를 갖고 싶어'에선 CD플레이어가 보편화된 기술의 시대에 살지만 카세트나 LP에 대한 복고풍 감흥을 이야기 한다던지,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인용하거나 '구주소와 신주소'가 언급되는 부분에선 개략적으로 언제쯤 씌여진 글이란 걸 알수 있고 대략 당시의 시대정신이 어떠했는지, 그 계절의 기분 등을 엿볼수가 있어서 꽤나 즐거웠습니다. 오래된 홍콩영화에서 벽돌만큼 큰 휴대폰을 발견하고 당시의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런 현실반영의 시대정신을 발견할 수 없는 추상적인 글들이 더 많지만 여전히 글은 지나간 시간을 담고 있을터입니다. 특히 6년전 4월, 슬픈 기억을 간직한채 지나가버린 그 봄날의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충걸이라는 에디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현란하지 않은 묵직한 글에 매료되었네요. 저자의 또 다른 책들도 나와있다고 하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표지 그림이 이충걸 에디터를 그린 그림인가 하고 사진을 찾아서 비교해 보니 좀 닮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표지 그림은 이충걸 에디터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작가 클로데트 스뢰더르스의 '보이(Boy)'라는 그림이라고 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