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와 예감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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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의 나는 책이 아닌 클래식 음악과 담배를 취미로 삼고 있었다. 그 날은 아마도 실내악 축제 기간으로 독일에서 온 콰르텟 공연을 보러 갔었고 인터미션 시간에 흡연 공간에서 첼로 연주자를 만났다. 그 전까진 무대 위의 연주자를 어딘가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봤던 것 같은데 담배를 피우는 그는 출장 온 외국인 같았다. 물론 다시 2부 무대에서 본 그는 별세계 사람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축제와 예감>은 온다 리쿠가 전작 <꿀벌과 천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선물하는 클래식을 연주하고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꿀벌과 천둥>에서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의 참가자인 여러 천재들이 클래식 연주자의 길을 걷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담아냈다면 <축제와 예감>은 콩쿠르라는 축제가 시작하기 전부터 끝난 뒤까지 이 곳에 얽힌 여러 음악가들의 인생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론 전작 주연인 아야, 진, 마사루의 이야기(<축제와 성묘>)도 반가웠지만 책의 정중앙에 실린 <가사와 그네>가 가장 인상 깊었다. 요시가에 콩쿠르의 과제곡이었던 '봄과 수라'를 만든 작곡가 히시누마 다다아키의 이야기로 일본의 유명 시인 미야자와 겐지와 이름이 같은 제자 오사나이 겐지의 오랜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째서일까, 통 붙잡을 수가 없어요. 바로 눈앞에 있는데. 지금도 저기서 울리고 있고, 들려옵니다. 하지만 오선지에 그리려 하면 사라져버리고, 써보면 전혀 다른 게 되어 버려요." _75 <가사와 그네> 중

전작에서 직장에 다니며 콩쿠르를 준비하던 아카시처럼 오사나이 겐지도 음대 작곡과 졸업 후 가업인 홉 농장일을 하면서도 매년 스승이었던 다다아키에게 자신의 곡을 보낸다. 그는 오랜기간 다다아키에게 자신이 듣는 음악을 기보에 그대로 그리기 어려운 점을 토로해 왔지만 드디어 자신의 곡을 그대로 들을 수 있게 된 다음 날 영면에 빠진다.

"그래, 오사나이. 자기 것을 만든다는 점에서 자네나 나나 다를 바 없어. 둘 다 음악 앞에서는 대등하다. 누구나, 오직 홀로 황야를 지나는 수라인 것이다." _77 <가사와 그네> 중

(진실한 언어는 여기에 없고 수라의 눈물은 땅을 적시네)

"그런가. 이게 녀석이 보던 풍경인가."

그렇구나, 너는 여기에 있구나. 이 어딘가에서, 너의 소리를 듣고 있구나. 히시누마는 그런 생각을 했다." _84 <가사와 그네> 중

그의 장례식을 오가며 시집 '봄과 수라'와 함께 제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다다아키는 자괴감에 빠지다 겐지의 마지막 조곡 1악장 악보를 보고 콩쿠르 과제곡 '봄과 수라'를 완성한다. 혼란스럽고 미숙한 자아를 '수라'에 빗댄 미야자와 겐지의 시와 제자에게 했던 자신도 이루지 못한 경지의 충고들을 되뇌이는 다다아키의 번뇌가 교차하는 순간들이 너무 생생히 눈 앞에 그려져서 짧은 단편이지만 가장 길게 뇌리에 남았다.

전작이 천둥같은 박진감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천재들의 매력으로 700페이지를 달리게 했다면 <축제와 예감>은 콩쿠르라는 끝이 정해진 틀을 벗어나 인생과 함께 음악을 닦아가는 이야기들이어서 좋았다. 삼겹살과 김치 앞에서 인생의 악기를 만난 가나데의 이야기(<은방울꽃과 계단>)나 지도교수를 바꾸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마사루의 이야기(<하프와 팬플루트>)도 무대 아래 음악가들의 일상을 함께 한 것 같아 즐거웠다.

"흐음. 선생님은 하프 나라 사람이네요."

"오호라. 그렇게 따지자면 마사루는.... 왠지 프랑스는 목관악기 같은 이미지가 있어. 너는 특히 팬플루트가 어울릴 것 같구나."

팬플루트

불어본 적은 없지만 그 음색은 들어본 적이 있다. 독특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어딘가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가요?"

"그래, 숲에서 님프와 노닐며 팬플루트를 부는거야."

"으음."

대체 어떤 이미지란 거지?

_100~101 <하프와 팬플루트> 중

천둥과 꿀벌이 에이덴 아야와 가자마 진의 별명이듯 팬플루트는 마사루의 스승이 붙인 별명인데 음악에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가 너무 덕후마음으로 재밌다.ㅋㅋㅋ 연필 덕후는 사람을 연필에 빗대어 보고 책 덕후는 사람을 책에 빗대어 말하듯이.

책 소개처럼 다 읽기도 전에 <꿀벌과 천둥>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영화도 국내 OTT 서비스에 올라와서 좋은 날을 잡아 볼 예정이다. 책을 읽는 내내 5년 전에 느꼈던 그 벅찬 마음을 긴 시간이 지나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어서 무척 기쁜 독서의 순간이었다.

(진실한 언어는 여기에 없고 수라의 눈물은 땅을 적시네)

"그런가. 이게 녀석이 보던 풍경인가."

그렇구나, 너는 여기에 있구나. 이 어딘가에서, 너의 소리를 듣고 있구나. 히시누마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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