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모형의 밤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무려 몇 달간 처키가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렸던 쓰라린 경험이 있기에 표지를 본 순간,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인형이다, 인형... 비록,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남들은 기겁하는 어지간한 호러물을 봐도 혼자 쿡쿡 웃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본색을 드러내기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지가 아무리 귀여운 척 해봤자 사악하게 보였던 처키의 영향인지, 인형은 내 아킬레스건이니까. 안 그래도 겨울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와중에 옵션으로 악몽까지 더해질 것인가, 약간 고민했으나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수련(?)에 힘입어 용감하게 책을 펼쳤다. 다행스럽게도 우려와 달리, 인형은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표지의 음산함……. 지금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표지를 보았을 때만 해도 평소 북스피어가 추구하는 표지와는 좀 다른 스타일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뭐든 수박 겉핥기식으로는 알 수 없는 법.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왜 이런 표지가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성격을 꽤나 잘 나타낸다 싶고. 

 나카지마 라모는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작가다. 책 표지날개나 뒤쪽의 해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이한 풍모의 괴짜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특징은 그의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잘 녹아있다. 독특한 색이 강하게 느껴지는 책을 만날 때면 두 가지 생각이 들곤 한다. 작가(혹은 작가의 조수)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충실히 조사했을 지가 느껴져서 그 노력과 노고에 감탄스러운 경우가 있고, 그런 독특함이 집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디부터 작가가 가진 본연의 것임이 느껴져서 그 소재의 다른 책이 나온다고 해도 이정도의 분위기는 (이) 작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싶은 경우가 있는데, 라모의 이 책은 명백하게 후자 쪽이다.

 책은 목저택에 대한 짧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12개의 단편이 담겨있다. 각각의 단편들을 결말로만 얘기하자면, 짐작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서 예상보다 더 나아가 잠시 멍하게 만드는 것,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나아가는 것, 썩소를 머금게 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작가의 조예가 남다르다는 오컬트적인 이야기가 있고, 현실에서도 있을 법하지만 상상하기는 싫은 종류의 이야기,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듯 싶지만 뚜렷한 결말을 짓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기묘한 분위기와 매끄러운 문장으로 탄탄한 이야기들로 재현한 것을 보면, 꽤나 오래전부터 일본 문학의 붐을 타고 있는 국내에 작가의 소개가 늦어진 것이 조금 예상외로 느껴진다. 12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나 길지 않은 분량의 글 인에도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는 면에서, 이 책은 '호러'단편집이라고만 불리기에는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문학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볍게 주절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소위 순문학의 단편소설에 요구되는 미덕을 이 단편집의 글들 역시 부족함 없이 갖추고 있다 생각했다면... 주제 넘는 이야기가 될까.

 개인적으로 가장 끌린 글은 존 레논의 미발표곡이 있다는 설정의 Eight arms to hold you. 결말은 예상대로였지만, (소설 속의) 그런 곡이 실재한다면 과연 어떤 곡일까 (상상하기 어려움에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밖에는 사안과 싸늘해진 코, 무릎까지 3개의 글이 가장 인상적이랄까. 다카코의 위주머니도 꽤 마음에 든 글이지만, 내용과는 무관하게 참기 힘든 요소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남다른 도덕적 기준 때문이라고 해도,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나 이해가 너무도 부족한 다카코같은 성격은 참아주기 어렵다. 다카코의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감에도 이런 생각이 드니, 이건 뭐...) 어정쩡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책장을 들추어 본 다음,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외면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단지 첫눈에 호감을 주기는 영 힘들어 보이는 표지나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생소한) 작가의 이름 때문에 끌리는 마음을 누르지는 않길 바란다. 지난 2004년 유명을 달리한 작가인지라, 신작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이제까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고, 어느 정도의 반응을 기대해도 좋을만한?) 앞으로의 출간 예정작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책으로 작가에 흥미를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소식이다. 단, 단편이 마음에 든 작가의 장편 혹은 장편이 마음에 든 작가의 단편에 대한 만족도는 꽤나 미묘한 문제라서 어떻게 기대치를 잡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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