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최후의 14일
요아힘 페스트 지음, 안인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2004년 가을, 독일에서 이 책과 히틀러의 여비서 중 하나였던 이의 자서전을 근간으로 '몰락 (Der Untergang, 이 책의 원제. 히틀러 최후의 14일은 국내에서 붙인 제목)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영화는 거센 논란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그 해 자국 영화중에서 최고의 흥행을 거두었다. 영화 자체의 퀄리티와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 히틀러의 최후의 날들을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모은 화제와 논란이 흥행에 불을 붙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영화가 일으킨 논란 중에서 단연 부각된 것은 히틀러 미화 문제였다.

 하지만 영화와 책을 모두 본 입장에서는, 그 논란이 흥행을 위한 고도의 마케팅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원저자가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 요아힘 페스트라는 것부터 그런 의혹에서 자유로운 충분한 요인이 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반나치 성향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히틀러 유겐트조차 가입하지 않았다- 영화와 책 모두, 히틀러 역시 평범한 면모를 가진 인간이라는 모습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그와 조력자들의 비인간성과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그리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예술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좋아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 그가 저지른 끔찍한 악행과 도무지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인간 히틀러의 면모가 분명하다. 몰락(Der Untergang)이 그리는 히틀러 역시 그런 인간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한때 전 유럽을 호령했던 제 3제국의 총통인 그가 제어할 수 없는 분노와 공포로 무너져 극도의 수전증에 시달리고, 존재하지 않는 군대에 적과 맞서기를 명령하면서 극적인 상황 전복의 헛된 꿈을 버리지 않는 모습, 그의 충복이자 친구였던 슈페어의 명령거부와 작별 인사에 그저 눈물짓는 모습에서 신경질적이고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악마적인 그 역시도 결국은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몰락(Der Untergang)의 장점은 결코 치우치거나 적절 수위를 넘어서지 않는 객관성. 히틀러와 그에 동조와 충성으로 임한 나치 위정자들을 향해서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사악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철저하고 교묘하게 획책된 선전으로 국민들을 선동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했으면서, 패전의 피할 수 없는 그림자가 엄습하자 가차 없이 그 원인을 국민들에게 돌리는 적나라한 작태의 위정자들을 보여주며 그들의 비열함을 고발한다. "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아. 그들이 자초한 일이야! 우린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그들은 우리에게 위임했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라는... 악명 높은 괴벨스의 소름끼치는 발언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다.

 전쟁의 비참함과 잔인성, 무자비함, 철저한 파괴와 몰락,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속의 사람들……. 전쟁의 상처에 있어서 승전국과 패전국이라는 구분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승전했든, 패전했든 남은 사람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아프다. 가해자의 입장이었던 독일인들 역시 끔찍한 전쟁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그들이 고도의 술책에 놀아났을 뿐이라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동조와 지지, 뒤틀린 욕구와 책임방기가 히틀러와 일당들이 이런 비극을 일으키게 한 자양분이 되었음은 자명하니까. 히틀러가 더없이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것,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무자비한 희생자들처럼 또 다른 희생자임이 분명한 독일인들에게 내포된 비열한 잔인함. 추악한 역사를 상기하고 경계해야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작금의 우리에게)


 비록 궁극적으로 원하던 바는 이루지 못했지만,  승자가 되지 못한다면 철저한 파괴를 통한 몰락에의 강렬한 의지로 역사에 길이 남고자 한 히틀러와 일당들의 목적은 달성됐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인류가 여전히 존재하고 기록된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들의 악업은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으니, 그는 만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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