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보급판 문고본)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가족이 아닌 한창 나이의 남자 둘, 여자 둘이 (나중에 남자 하나가 추가되지만) 한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일텐데, 이들의 생활은 그렇지 않다.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애정이나 깊은 친분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고, 각자의 편의를 위해 살게된 것인만큼 적당히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각자 편한대로, 무던하게 살아간다. 그들 사이에는 갈등도, 다툼도 없고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평온하다. 그 공간에 맞는 각자의 모습을 훌륭히 연기하면서 그들 각각은 현재의 생활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심하게 살아간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알아도 모르는 것이다. 모두에게 자신들의 평온한 일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변화를 감당할 생각따위는 없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를 외한 최선의 방법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런 무리수를 두어야 할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심지어 가족이라고 해도 단지 그런 이유로 깊은 유대를 맺을 이유는 없다.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더군다나 서로 원하지도 않는데. 정신적, 정서적 유대가 깊을수록 좋은 점도 많겠지만 그만큼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니까. 가족이라면, 어쩔 수 없이 혈연지간이라는 이유로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정도의 유대를 맺을 수 밖에 없겠지만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를 제외한 이들에게 불편을 초래하거나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적당한 가면을 쓰고 연기하며 살아간다 한들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진정한 나의 모습이라는 건, 어차피 자신조차 알기 힘든 것. 이곳저곳에서의 내 가면이 모두 합쳐져야 내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을 다 합친다해도 내가 아닐 수도 있는... 당연한 얘기. 가면이라고 해도 그로 인한 불이익이 없다면, 참모습 (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도 없지만)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경쾌하고 가벼운 소설일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다. 아니, 가벼운 게 맞는 걸까? 얼마든지 음침하고 칙칙하게 그릴 수도 있는 내용이니. 그런 면에서는 무거운 내용도 부담스럽지 않게 그릴 수 있는. 일본 소설의 장기가 이 책에서도 훌륭히 발휘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 특유의 가벼움이 소설과 잘 어울리고, 여운을 진하게 남긴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화되겠지만. 등장인물 각각의 시각에서 전개되는 각 장을 통해 하나로 구성되는 이야기는, 자신과 타인의 시각을 통해 그려져 독자들이 그들을 파악하기 좀 더 쉽게 만들어준다. 그로 인해 앞장과 뒷장에서의 이미지는 다른 양상을 띠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내가 함께 다뤄짐으로써 소설 속의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재미도 쏠쏠하고, 효과적으로 캐릭터를 인지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으로 볼 때 적절한 구성이다. 첫 장편소설에서 이런 기술을 구가하다니, 요시다 슈이치는 괜히 상복 많은 작가가 아니다. 

 파크라이프와 함께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소설이기에, 미뤄두었다가 읽게 되었는데 확실히 최근작보다 좋다. 초기작이 더 좋은 작가라니, 현역작가로서는 굉장한 불명예 아닌가. 불행하게도 어찌된 셈인지 이런 작가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은데, 독자로서는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뿐이다. 초기작에서 돋보이는 그의 재기발랄함을 다시 만나볼 수 있길 바란다. 대중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그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자신의 장기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글을 쓰는 편이 작가 자신에게도 득이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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