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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엉뚱한 제목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작가를 찾아본 거였다. 혹시 전에 읽었던 책의 저자인가 싶어서. 모리미 토미히코라... 작가의 이전 작품 중에 읽은 것은 커녕, 아는 것도 전무했다. 부지기수로 쏟아지는 일본 소설들의 영향으로 그래도 꽤 많은 이름을 들어온 것 같은데 국내에서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가 싶어 흥미가 생겼다. 더군다나 이 독특한 제목,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그저 그런 청춘연애물은 아닌 것 같은데...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에서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나 잔잔하고 담백한 서술이 좋아서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만, 종종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미스테리 계열을 제외한 일본소설은 피해왔는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최대한 간단하게 내용을 간추리자면 ’변함없는 청춘의 테마 중 하나인 짝사랑, 그것도 소심한 남자의 짝사랑 이야기’ 라고 한방에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묘한 매력은 그렇게 달랑 정리해버리기 미안하다. 기본적인 뼈대는 흔할지언정, 그것을 기반으로 다져나가는 이야기들이 색다르고 괴상한 탓이다. 소심한 짝사랑 남인 그가 좋아하는 그녀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경쾌함과 발랄함을 가진 4차원 아가씨이고, 책의 전반에 걸쳐 그와 그녀 주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아가씨 못지 않게 기묘한 캐릭터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심남 그와는 달리, 그녀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외계인 같다. 게다가 안그래도 답이 없는 짝사랑에 괴로운 그에게는 어쩌면 시련만 찾아오는지... 그녀가 청춘의 밤을 즐기고, 잃어버렸던 소중한 옛 추억을 되찾고, 대학축제를 만끽하고, 사방의 지인들 병문안으로 하루하루 바쁜 동안에 여지없이 그녀곁을 뱅뱅 맴돌며 고생만 한다.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자주 ’우연히’ 마주치는데, 돌아오는 반응이라고는 늘 천진난만한 "아, 선배 또 만났네요!" 라니... 과연 그는 그녀에게 무사히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아름다운 한쌍의 바퀴벌레로 탄생할 수 있을까?
표지 앞날개 부분을 보면, 작가의 특징이 ’매직 리얼리즘’ 기법으로 현실과 가상을 교묘하게 배열하는 독특한 세계관과 문체라고 되어있는데 과연, 이 책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와 그녀, 주변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는 전개되는 배경부터 시작해서 요소요소 지브리 애니에서나 가능할 법한 것들로 가득하다. (마시고 있는 동안 속에서부터 행복해지는, 뱃속이 꽃밭이 되어가는 기분이 드는 가짜 전기부랑이나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를 연상시키는 이백씨의 3층전차, 축지법 고타츠라니... )그리고 그것은 한없이 가볍고, 진부하기만 할 수도 있었을 청춘연애물을 독특한 색채로 차별화하는데 성공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망상인지, 애써 구별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이렇게나 유쾌하고 기빌한 이야기인데, 만끽하면서 그저 기분좋게 즐기면 족하지 않겠는가. 밤은 짧으니 아가씨는 걸어야 하고, 우리는 그 뒤를 조용히 따르며 구경할 수 밖에.
때때로 한권의 책은 예상치 못했던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이 그렇다. 생소하기만 하던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고,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주목해야겠다. 그가 펼치는 또다른 이야기들도 이렇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만큼 기발하고 사랑스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