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마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뭐 이따위 책이 다 있어" 하고 집어들었던 책을 몇장 읽어보고 바로 사가지고 나왔다.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산문들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쓴 글이다. 전체적으로 감정이 자유분방하게 분출되는데 머리로 짜낸 억지가 없다.

 

몇십 년 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쇼크를 줄 수 있는 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이 매력적이다.

 

 

책 속에서...

 

 

쾌락이란 그것을 얻은 자에게는 하나의 재산이다. 사람은 누구와도 함께 잘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그때 장애물이 되는 것은 이미 행방불명된 하느님이나 '정상(正常)적인 것'에 대한 타성적 습관이 아니라 단지 질투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에 우리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 질투만 없어진다면 성에 관한 온갖 터부는 일시에 무너져버릴 것이다. (p.19)

 

대개 성의 터부가 문명에서 온다고 보는데 그는 좀더 근원적인 감정에 그 혐의를 두고 있다.

 

월급을 양복이나 아파트, 식사 등에 일정하게 배분한다면 우리도 금방 '거북이' 무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지 말고 자기 존재 중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한 점(一點)을 골라 그곳에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양복파나 미식가, 스포츠광과 같은 젊은이들을 한심한 놈으로 여기겠지만, 사실 이렇게 경험을 축적해 나가는 것은 지극히 사상적인 행위이다. (p.23)

 

노동으로 평생 얼마나 벌 수 있는지를 알기는 커녕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게다가 그 알량한 돈을 몽땅 모아봐야 아파트 한 채도 간당간당한 현실을 온전히 견디자면 일상 속의 모험이 필요하다는 얘기.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의 '남부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백인이 흑인의 성적 능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글은 유명해진 지 이미 오래다. (p.27)

 

그런 것이었나.

 

작은 사내가 거구의 사내를 내동댕이치는 드라마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이기기 위해서는 큰 선수보다 더 '불행'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최대의 무기는 바로 '불행'이다. 이것은 '어떻게든지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을 창출하는 힘이다. (p.144)

 

이른바 '헝그리정신'이라 하는 것. 즉 라면만 먹고 뛰는 힘!

 

나는 뭐든지 잘 버린다. 소년시절에는 부모를 버렸고, 홀로 기차에 올라탐으로써 고향을 버렸고, 동거하는 여자를 버렸다.

여행이란 '풍경을 버리는 행위'가 아닌가 싶다. (p.181)

 

"버려!"  "안 버려!" 하는 개그 코너도 있지만, 아무튼 버리는 행위는 결코 미덕이라 할 수 없겠으나 그걸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에게서는 뭔가 다른 냄새가 난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 같은...

 

... 나는 소위 가족중심주의의 샐러리맨 같은 인간들을 싫어하며 지금까지도 이렇다할 '가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가 "선택하는 사내의 행선지는 떠도는 구름이 흘러가는 곳"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도 그럭저럭 내 생활에 만족한다. 도박이 때로 삶의 보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좀더 짧은 시간 안에 알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p.202)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서도 내가 도박을 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도박이 아닌 게임을 통해 깨달은 추억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런 운이 따르지 않고 상실감을 못 견딘다.

 

가난한 세일즈맨인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가정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보폭에서 느껴지는 일상생활의 굴욕을 따돌리려는 것이다. (p.206)

 

그래서 사람들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행동은 거칠어지는가.

 

무엇이든 중립에 서는 행복론에서 다른 것은 모두 버리고 한 가지만 택하는 행복론으로 이동하기를 원할 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도박꾼의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자신을 초월하는 '속도의 사상'이기도 하다. (p.208)

 

이렇게 사회 통념적인 정답과 다른 의견을 만나면 당황하게 된다. 그건 나름의 신념은 고사하고라도 이렇다할 입장마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황하지 않으려면 생각해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영화배우인 타이론 파워(Tyrone Power)나 에롤 플린(Errol Flynn)은 낮잠을 잘 때마다 걸프렌드를 한 명씩 잃어야 했지만, 우리는 낮잠을 아무리 오래 자도 걸프렌드를 잃을 염려가 없다. 마이너스보다는 제로가 득이다. 지극히 단순한 계산이 아닌가. (p.214)

 

맞다. 너무 단순해서 틀린 것으로 간주되곤 하지.

 

... 자네에게 프로스페르의 격언 하나를 들려주겠다.

"고양이와 여자는 부르면 도망가고, 모른 척하면 다가온다." (p.218)

 

명제다, 명제.

 

부모와 자식 간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원래 부모란 자식을 소유하려는 에고이즘을 행복으로 여기며 이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꽉 막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들의 사상은 이른바 '자장가 사상'으로, 깨어나려는 아이를 가정의 화목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잠재우려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p.228)

 

맞는 말이지만 나는 김규항 선생의 방식에서 이미 대안을 발견했다.

 

뢰벤탈(Leo Lowenthal)의 『편견의 연구』에 따르면, 편견을 갖고 있는 동안은 개인의 내부에 잠재적 경향이 존재하며 이것이 때로는 외적 자극으로 작용해 사회적 폐쇄성으로부터 구제해준다고 한다. (p.232)

 

몇 가지 편견은 가질만한 일인건가. 편견을 아예 갖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신주쿠 아사히초의 일용직 노무자가 일주일간 매 끼니를 우유 한 병으로 때우고 기차역 벤치에서 잠자며 모은 돈으로 대형극장에서 베를린 오페라를 감상한다. 알반 베르크(Alban Berg,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의 「보체크(Wozzeck)」를 보면서 콩만 먹는 사내의 비극에 감동하고 그와 동시에 극장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일용직 노무자가 어떤 한 가지를 계기로 자기변혁을 꾀할 수만 있다면 그 모험은 성공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변신(즉, 인간성의 회복)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투성행위와도 같은 '일점XX주의'가 효과적인 듯싶다. (p.237)

 

이 사람이 살아있다면 이런 질문을 했을텐데. "만일 그 노무자에게 빌어먹을 가족이 있어 우유 한 병으로 때우고 가족을 위한 빵을 근근이 사야할 형편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성적 판단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본질이 존재를 앞선다'는 말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말하기 좋아하는 해설자들이 제멋대로 이유를 갖다붙이게 만드는 것보다는 자신이 미리 좀더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유서의 진실 여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p.249)

 

고 정몽헌 회장과 고 이은주의 자살을 보며 했던 생각. 자살의 원인이 한 가지라는, 또는 어떤 결정적 이유가 있으리라는 무조건적인 단정. 말하자면 산 사람의 논리.

 

어쨌든 죽는 동기나 이유는 대부분 꾸며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적이며 허구적이다. (p.251)

 

죽으려 마음먹은 사람의 감정의 폭주에서 한 번,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서 또 한 번.

 

노이로제에 걸려 목을 맨 것은 병사이며, 생활고와 가난을 비관해 가스를 틀어놓고 죽은 것은 '정치적 타살'이다. 도미나가 이치로의 「고물 신부」라는 만화를 보면, 신부가 가스 자살을 결심하지만 가스 요금을 내지 않아 가스가 끊긴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방귀 가스로 자살하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다. 이조차 그 원인이 실연이라면 타살이나 병사라 할 수 있다.

무언가 부족해서 죽는 것은 자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 '부족한 무언가'가 채워지면 죽음의 필연성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p.256)

 

좀 억지스럽지만 아무튼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다른 가치의 대체로도 피할 수 없는 부조리한 죽음을 자살로 하자, 이런 얘기다.

 

[자살로 취급할 수 없는 부류]

1. 조루, 성기 단소(短小)로 고민하는 사내

2. 대학 입시에 실패한 사내

3.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듣고 아무런 느낌도 없는 사내

4. 치질로 고민하는 사내

5. 별다른 이유 없이 사는 것이 싫어진 사내

6. 파친코에 미쳐 주위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사내

7. "의미란 무엇이며 무의미란 무엇인가? 체계화된 사상은 의식의 사유화에 불과하며 1920년 이후 이데올로기는 늘 역사적인 체제의 보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목적에 맞게 무의미를 추구하고 자신의 부르주아 사상에 한계를 느끼며......" 라는 식의 질문에 사로잡힌 사내

8. 숫총각, 숫처녀

9. 저소득 노동자

10. 상어지느러미 수프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내

11.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내

12. 다카쿠라 겐의 영화를 보고 부러워하는 사내

13. 공금횡령, 도산, 생활고 등에 시달리는 사내

14. 무좀에 시달리는 사내 (p.260)

 

물론 이 목록에 이의를 제기할만큼 팍팍한 사람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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