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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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방대한 작품을 읽고 모든 문장이 단 세 사람의 독백으로만 구성된 것이라는걸 깨닫게 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부는 일롱카, 2부는 페터, 그리고 제3부는 유디트가 작품의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독백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산도르 마라이 만큼 대화체를 즐겨 쓰면서도 잘 표현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세 사람은 삼각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이다. 페터는 유디트에게 연정을 품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일롱카와 결혼한다. 이때 페터의 감정은 다스려지지 못하고-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다만 가슴 깊숙이 감금당하게 된다. 후일 이 감정은 창살을 뚫고 나오게 되어 페터는 일롱카를 버리고 유디트와 결혼한다. 그리고 이 둘도 이내 헤어진다.

 

이 얘기를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책 뒷표지에서는 소설가 김형경이 결혼생활 이면에 있는 계급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써놨더라만 내가 느낀 것은 열정이 지나간 후의 허무, 그리고 기억의 오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산도르 마라이가 열정이라는 테마를 다루는 솜씨는 그의 <열정>이란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기억에 대한 오류라는 것은 홍상수의 영화 <! 수정>과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이게 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얘기라서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나 장이모우의 <영웅>을 생각해도 재미있다.

 

결혼생활을 슬기롭게 해나가기 위한 지침이 절대 아니니 결혼예비자나 권태를 느끼는 기혼자들의 주의를 요한다.

 

 

 

책 속에서...

 

 

 

제1부, 일롱카 - 열정적 사랑

 

 

 

시민계급은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지만, 귀족은 이미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존재를 입증받거든. 시민계급은 언제나 뭔가를 획득하거나 수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 (p.18)

 

천재가 아닌 범인, 갑부가 아닌 중산층, 어중간한 이들의 딜레마

 

"나는 예술가요. 다만 나한테는 대상이 없을 뿐이오. 시민계층에서는 이런 경우가 자주 있소. 이것은 한 가문의 종말을 뜻하오." (p.19)

 

여기서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가 떠오른다. 그들은 보란듯이 몰락해버린다.

 

비밀, 그래, 행여나 내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을까 싶어서 샅샅이 읽었지. 그러나 결국 답을 찾지는 못했어. 그런 비밀들에게는 원래 답이 없기 마련이거든. 오로지 우리의 삶만이 답변을 한단다. 그것도 이따금 아주 기습적으로. (p.21)

 

삶만이 기습적으로 답한다. 그 비밀을 다른 곳에서 찾아 헤메고 있었으니...

 

내 인생은 오직 아이를 위한 것이었고, 나한테는 오직 아이 밖에 없었어. 원래 그렇게 많은 애정을 쏟아서는 안 되는 법이야. 그 누구한테도.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애정을 쏟아부으면 안 돼. 사랑은 모두 사납게 날뛰는 이기심의 표현이야. (p.37)

 

결국 자신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의미일까?

 

"당신은 지금 나한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소. 그렇게는 할 수 없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소."

나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어.

"죽지 말아요. 당신이 죽는 것보다는 낯선 사람으로라도 살아 있는 편이 더 나아요." (p.39)

 

원치 않지만 헤어지는 마당에 둘 중에 선택하라면 뭘 선택할까? 그가 죽는 것, 아니면 낯선 사람으로라도 살아 있는 것.

 

남편은 자신이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어.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당장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언젠가 반드시 책임을 졌어. 앞날의 계획이나 가능성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드는 사람들도 있지. 저녁식사 동안 별일 아닌 듯이 말하고는 금세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남편은 철저하고 단호했어. 마치 자신이 한 말에 묶여 사는 사람처럼 한번 입 밖에 뱉은 말은 절대 떨쳐버리지 못했어. (p.40)

 

저런 성향은 좀 본받고 싶다. 상당히 찔리는 문장이다.

 

남편은 곧잘 관심을 갖고 나와 대화를 나눴어. 안경을 벗어 든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충고도 하고 때로는 농담도 했지. 아니면 함께 연극을 보러 가거나. 남편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약간 조롱하듯이 회의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의 말을 들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완전히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p.41)

 

나는 완전히 승복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닌데도 웃을 때의 입매로 인해 저런 오해를 받을 때가 많다.

 

남편이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털스웨터나 모자의 포장을 푸는 일도 있었어. 그 사람은 아이 방에 있는 탁자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고는 죄진 사람처럼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곤 했었지. (p.45)

 

마치 그 사람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한참 만에 남편이 말을 했어.

"나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어.

"당신도 사람인 걸요. 당신에게도 반드시 사랑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여자들이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점이오."

남편은 마치 별들을 향해 말하는 것 같았어.

"사랑이 필요 없고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오." (p.64)

 

남자의 말에 동의한다.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남자는 자신의 영혼만으로도 살 수 있소. 나머지는 모두 덤이고 부산물일 뿐이오. 그리고 자식은 특별한 기적이오. 이 기적 앞에서는 협상할 각오가 되어 있소. 우리 협상을 합시다. 우리 이대로 함께 삽시다. 하지만 나를 조금 덜 사랑하고, 그 대신 아이를 더 사랑하시오." (p.65)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자신의 영혼만으로도 살 수 있다.

 

"당신을 이렇듯 사랑하는 것이 큰 죄란 말인가요?"

남편은 웃었어.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어. 남편의 목소리는 냉소적이거나 오만하기보다는 처량하게 들렸어.

"죄보다 더 나쁘오. 그건 잘못이오." (p.67)

 

잘못은 죄보다 나쁘다

 

그 몇 주일 동안 나와 그 사람 사이에서, 아니면 그 사람과 세계 사이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 그 사람 안에서 뭔가가 부러져버렸어. 위험한 큰 사건들이 그렇듯, 물론 그 일도 말없는 가운데 일어났어. 말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소리를 지르면 원래 견디기가 더 쉬운 법이야. (p.71)

 

말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보다 더 견디기 힘든 말없는 상황... 선뜻 떠오르지 않는걸 보니 다행히 아직 경험하지 못한 듯하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너한테 위로가 된다면 말하마. 내 결혼은 더 잘못된 것이었단다. 나는 네 시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어."

시어머니는 거의 무심하게 조용히 말씀하셨어. 말의 진실한 의미를 깨달아서 더 이상 두려운 게 없고 관습보다 진실을 높이 평가하는 노인들만이 그런 어조로 말할 수 있을 거야. (p.80)

 

보통 나이 드신 양반들한테는 어떤 초연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선입견인데 실제로 겪게 되는 어르신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더 잘 화내고 잘 삐지고... 어쩌면 저런 선입견이 그들에게 초연함을 강요하는 술책은 아닐까.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는 아찔한 순간들이었어. 자신이 얼마나 많은 힘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에 비겁하고 무능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야. 그것은 삶이 변화하는 순간들로, 죽음이나 종교적인 각성처럼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단다. (p.86)

 

저 순간이 언제 올지 정말 궁금해.

 

나는 사람을 죽이거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힘, 그런 엄청난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느꼈어. 어쩌면 남자들만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러한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인식하지 않나 싶어. 우리 여자들은 그런 힘에 부딪히면 놀라 주춤하고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아. (p.87)

 

그런 힘을 만나고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면 영웅이 되거나 악마가 된다. 모든 남자들이 이런 인식을 경험하진 않는다. 모든 남자가 진짜 남자는 아닌 까닭이다. 또한 여성이 이런 인식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녀가 여성이 아닌 까닭이기도 하고.

 

한 남자가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면, 그 남자와 계획, 의도 사이에는 전 세계가 놓여 있어. 맞아, 나는 어떤 면에서 그런 상황이나 그런 정신 상태에 처해 있었어. 우리의 세계는 곧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p.89)

 

그런 순간에 인간은 알 수 없는 마력의 지배를 받거든. 몽유병자들, 지팡이를 들고 수맥이나 광맥을 찾아나서는 사람들, 시골 마을의 신들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길을 떠난단다. 그러면 이웃사람들뿐 아니라 관공서 직원들까지도 미신을 존중하여 길을 비켜주기 마련이야. 그들의 눈빛 속에 웃어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어려 있고, 이마에는 징표가 새겨져 있으며, 그들의 과업은 직선적이면서도 위험하기 때문이지.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기까지는 절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아. (p.90)

 

뭔가에 미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만큼은 행복한 일일거야.

 

남편은 그 입상-피에타-앞에서 말했어.

"이 거룩한 무관심, 완벽한 외로움, 고통과 기쁨에 대한 무감각, 이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완전무결함이오." (p.95)

 

인간이 저렇게 될 수 있는 경우는 딱 두 가지. 욕망의 최고점에 이른 후이거나 죽은 후이거나...

 

"... 자매님의 남편도 겸손을 모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거만한 사람 둘이서 서로 많은 고통을 주고받고 있어요. 그러나 자매님 안에는 죄에 가까운 욕심이 숨어 있습니다. 자매님은 한 인간에게서 영혼을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언제나 상대방의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데, 그것은 죄입니다." (p.101)

 

사랑에 빠지되 영혼을 빼앗지 말라... 불가능한 얘기지 않나.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영혼을 빼앗기고 빼앗았다가 돌려주고 돌려받는 게 아닌가.

 

남편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소중했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했고 보존하려 했지. 남자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불러. 우리 여자들한테는 그런 장엄한 말들이 필요하지 않아. 남자들이 어려운 개념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그저 침묵하는 것으로 충분해.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알고 남자들은 개념을 아는데, 이 두 가지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아. (p.107)

 

여자는 본질을 알고 남자는 개념을 안다. 모든 트러블이 그것에서 비롯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모두들 서로 절친한 사이인 듯 상대방이 넌지시 암시하는 말을 정확하게 꿰뚫는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서로 무엇에 대해 훤히 알았냐고? 글쎄, 사교계라는 독특한 세계를 이루는 섬세하고, 타락하고, 흥분시키고, 교만하고, 절망적이고, 차가운 공범 관계가 아니었을까? (p.118)

 

격에 맞지 않게 느껴지는 사교클럽에 갈 때마다 느끼는 분위기이다.

 

"그 친구는 견디어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인은 그 인간이 최근 몇 년 동안에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버텼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가 추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들인 힘으로 높은 산도 옮길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어요. 때로는 그 친구에게 감탄하기도 했지요. 그 친구는 인간으로서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을 감행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지요. 그것은 마치 말과 원칙의 힘을 빌려서 다이너마이트에게 폭발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p.139)

 

추억을 떨쳐버린다는 것,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에 핑계로도 자주 쓰인다.

 

"부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현실이 훨씬 더 단순하고, 평범하고, 진부하면서도 동시에 기괴하고 위험한 것에 놀라실 겁니다." (p.141)

 

맞아, 현실은 접해보면 대개 저래.

 

정말 비극적인 상황에서 불현듯 고통과 절망을 넘어 이상하게 냉정하고 무심해질 때가 있어. 그래, 거의 즐거워지는 거야, 너도 그런 기분 아니?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냉장고 문을 깜박 잊고 닫지 않았는데 손님 접대에 쓰려고 준비한 고기를 혹시 개가 먹어치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별안간 떠오르는 것 같은...... 다들 무덤가에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침착하게 냉장고 문제에 골몰하는 거지. 우리 안에는 그런 면도 존재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그렇게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강변 사이에서 살고 있어. (p.146)

 

저런 상황에 직면하면 나는 내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보편적인 현상이라고는...

 

보잘것없는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좀 넘치는 것, 시선을 끄는 것, 반짝이는 것도 필요한 법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 현혹시키는 것 없이는 살 수 없어. 불타는 저녁노을이나 숲을 비추는 아침의 서광이 그려진 6필러짜리 그림엽서 같은 게 필요해. 원래 그래. 가난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p.162)

 

명품의 생존법칙이지.

 

삶에는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아. 일들이 일어날 뿐, 그게 전부야.

 

뭔가의 사태에 대한 '무슨무슨 긴급 대책' 들과 그로 인한 결과를 들여다보면 저 말이 진짜 실감난다. 대체 뭘 해결한단 말인가.

 

"사랑에 빠진 영혼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요?"

나는 어린 소녀처럼 물었어.

"영혼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라자르가 호의적으로 말했어.

"감정들은 영혼 안에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감정들은 다른 경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강물이 범람하여 주변 지역을 덮치듯이 영혼을 휩쓸어버리죠."

"지성적이고 현명한 인간은 그런 범람을 견뎌낼 수 있나요?"

나는 물었어.

"글쎄요."

라자르의 말투에 활기가 넘쳤어.

"그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저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보곤 했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오성이 감정들을 만들어내거나 억제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어할 수는 있지요.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감정들을 철창 안에 가둘 수는 있어요." (p.204)

 

결국 욕망의 분출, 감정의 격랑은 잠재울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가두어둘 수 있을 뿐... 그로 인해 사람은 병든다.

 

"부인은 제가 얼마나 법을 두려워하는 고리타분한 인간인지 잘 모르실 겁니다. 어쩌면 이제 우리 작가들만이 진정으로 법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시민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험을 즐기는, 그래요, 혁명적인 존재이죠. 모든 위대한 혁명적인 움직임이 결코 영락한 시민의 주도 아래서 일어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은 반란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가 없어요. 우리는 수호자입니다. 뭔가를 이룩하거나 파괴하는 것보다 수호하는 편이 훨씬 더 힘들지요. 저는 책과 인간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율법에 반항하는 사람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모두들 성급하게 옛것을 파괴하고 새것을 세우려 하는 세상에서, 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글로 써지지 않은 인간의 합의를 수호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합의의 진실한 의미는 이 세상의 숭고한 질서와 조화에 있습니다. 저는 밀렵꾼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산지기이지요. 참으로 위험한 상황, 새로운 세상입니다!" (p.209)

 

산도르 마라이가 자신을 라자르에 투영하여 그의 입으로 자신의 이상향을 말하게끔 하고 있다.

 

저는 원래 감정에 탐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감정, 우정이라는 감정은 사랑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복잡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감정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이고, 그리고 실제로 헌신적입니다. 여인들은 그걸 모릅니다. (p.211)

 

우정이 사랑보다 더 섬세하고 복잡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동성 간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정글 속에서 리아네(열대우림에 사는 덩굴식물-옮긴이)가 반경 수백 미티 안의 나무들로부터 영양분과 수분을 모조리 앗아가듯이,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변으로부터 원시적인 힘으로 빨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율법이고 특성이지요. 그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습니다. 사악한 존재와는 싸울 수가 있는 법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들이나 삶에 앙심을 품게 하는 것을 그들의 영혼 안에서 용해시키고 그들과 화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더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들과는 다른, 리아네 같은 부류가 있어요. 리아네 같은 사람들은 악惡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적인 냉혹한 갈증으로 주변의 것을 끌어당겨서 모든 힘을 빨아들이지요. 그러한 사람들은 야만적이며 자연의 힘 그 자체입니다. 남자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내뿜는 힘은 페터보다 더 저항력 있는 영혼도 파괴하지요.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걸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마치 사막의 열풍이나 골짜기의 급류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던가요? (p.214)

 

악녀에 대한 옹호 그러나 후에 보게 된 그녀의 진술로는 그녀가 천박하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는다. 귀족의 입장에서는 이런 천박함이 무서운 자연의 힘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삶과 이성, 시간보다 강한 정열이 때로는 존재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정열은 모든 것을 불태우지 않나요? 아마…… 그러려면 더 강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글거릴 뿐만 아니라 분출해야 해요. 저는 스트롬볼리(지중해의 이탈리아령 애올리아 섬에 위치한 활화산-옮긴이) 발치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싶지는 않아요…” (p.217)

 

정열은 순간적인 것이다. 그것이 계속되면 사람은 살 수 없다.

 

인간은 말이야, 사건이나 상황이 결정을 내린 후에야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어. 단 한순간이라도 먼저 결정을 내리게 되면 자의적이고, 무의미하고, 비인간적이며, 어쩌면 비도덕적일 수 도 있어. 삶은 뜻밖의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거든. 그러면 모든 게 너무 단순하고 자명해. (p.222)

 

인간의 의지를 통한 결정이란 건 없을지도 몰라. 사건이나 상황이 결정하고 난 것을 따를 뿐이지.

 

진정한 복수, 유일한 완벽한 복수는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그 사람이 이제는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랄 일도 없는 거지. 옛날에 남자들은 그러한 순간에 경애하는 부인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연인에게 보냈어. 이 두 낱말에 모든 게 담겨 있어. 당신은 이제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소. 이런 뜻이 담겨 있어서 영리한 여자들은 울음을 터뜨렸지. 아니 그런 편지를 보낼 필요조차 없어. 현명한 남자들은 그러한 순간에 커다란 선물, 장미꽃다발, 종신 연금을 보내지. 왜 그렇지 않겠니? 이제는 마음이 아리지 않는데. (p.231)

 

박찬욱 감독이 이런 복수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다른 영화가 나왔을 수도

 

 

 

2, 페터 용기 없는 사랑

 

다만 사실事實, 현실만이 확실하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을 그야말로 가망 없이 문학적으로 설명한다네. 이보게, 이제 나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아. 한때는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글을 많이 읽은 적도 있었어. 나는 조악한 문학이 거짓 감정을 늘어놓아 뭇 사람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까 염려되네. 수상쩍은 책들 속에 씌어 있는 허무맹랑한 교훈 때문에 쓸데없이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 자기 연민, 감상적인 거짓, 이유 없이 복잡하게 얽힌 갈등은 대부분 깊은 생각 없이 잘못 쓰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몽매한 문학이 낳은 결과일세. 신문의 문화면에는 허황된 소설이 인쇄되고, 2면에는 그 소설이 낳은 결과, 목수에게 버림받고서 염산을 마신 어느 여자 재봉사의 비극이나, 유명한 연극배우가 밀회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수면제를 삼킨 추밀 고문관 부인의 불행에 대한 기사가 실리네. (p.242)

 

사건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학을 비판하는 김원우의 문학관이라면 다른 얘기가 나올 수도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 두 발을 박고 서서 현실적인 원망을 투영한 것이라면

 

나는 사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경멸하지 않네. 나한테는 그럴 권리가 없어. 하지만 나도 남은 인생을 위해서 일종의 정열, 진실에 헌신하고 있네. 더 이상은 문학이나 여인들에게 속고 살 수만은 없어. 물론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더 견딜 수 없는 일일세. (p.242)

 

나는 부자들이 사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료함에 시달린다고 내심 확신하네. 그러나 돈 없이 시민이라는 신분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속하는 질서, 시민적인 규칙과 원칙을 마치 십자군 기사들처럼 고루한 영웅정신으로 수호하네. 소시민은 격식을 따진다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뭔가를 증명해야 하는 탓에 그럴 수밖에 없어. (p.255)

 

뼛속 깊이 귀족인 사람은 극소수이다. 빈곤을 겪은 사람은 다시 빠져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헌신적인 사랑. 그래, 그런 말을 하기는 쉽네. 나는 그릇된 요구를 내세우는 사랑이 염산과 자동차와 폐암을 합친 것보다 더 살인적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어. 사람들은 시랑이라는 이름하에 살인 광선에 맞먹는 힘으로 서로를 죽이네. 결코 만족할 줄 모르고 자신, 오로지 자신만이 모든 애정을 받아야 하는 줄 아네. 상대방의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받길 원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의 진을 빨아먹고 대지와 어린 생명의 힘과 수분, 향기를 앗아가는 커다란 식물처럼 탐욕스럽게 주변의 생명력을 앗아가려 하네. 사랑은 엄청난 이기심일세. (p.292)

 

사랑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격전지이다. 사랑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선 살아가기가 곤란하다.

 

삶의 중대한 일들을 경리 직원처럼 이리 빼고 저리 더할 수는 없네. 중요한 것은 가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아니라, 운명이나 상황, 기질, 호르몬이 명령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일세.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일어나지 않나 싶네. 사람이 나약해서라기보다는 원래 그렇다네. 이것만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전부 이론일 뿐일세. (p.296)

 

유전자의 음모인가. 정열의 요구를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러나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노예로 삼아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커다란 힘, 성애性愛는 그런 움직임들을 모아 숭고한 현상을 만들어낸다네. 그 순간에 나는 그런 생각도 했어. 그리고 물론 내가 그 육신을 갈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갈구가 경멸받아 마땅한 상스러운 짓이라는 생각도 했네. 나는 그녀를 갈구했어. 이건 진실일세. 또한 그 순간 조야하게 보인 그녀의 육신만이 아니라 그 육신 뒤의 운명과 감정, 비밀을 갈구한 것도 진실이었네. (p.322)

 

자신의 안녕에 대한 염려 없이 이렇게 몸을 내던지는 열정으로 보건대 욕망이란 확실히 파괴본능이다.

 

욕망과 자극의 긴장에 이어 비판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경우는 현실에서 별로 없어.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기분이 저하되는 경우가 대부분일세. 물론 욕망이나 충족, 모든 것에 무관심한 사람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한심한 사람들도 있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삶에 만족한 사람들일지도 모르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의 만족을 바라지 않아. (p.323)

 

비판적인 소강상태가 없다면 욕망의 폭주를 이 연약한 몸이 어찌 견딜까.

 

내 바로 옆,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그녀가 있었어. 그리고 실제로 내가 한 번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는 뿌리쳤네. 애교를 부리거나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상대방의 말실수를 넌지시 바로잡듯이 자연스럽게 거부했어. 그때서야 나는 그 여인이 남다르게 고매하다는 것을 깨달았네. (p.332)

 

그의 철학을 경청한 것도 아니고 단지 거절 하나로 그가 고매해졌다. 거절의 힘은 이렇게 놀라운가.

 

여인들. 자네, 남자들이 이 낱말을 얼마나 자신감 없이 조심스럽게 말하는지 아는가? 마치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서 영원히 반란을 시도하는 종족, 정복은 당했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반항하는 종족에 대해 말하는 듯하네. (p.354)

 

여인들. 언제나 두려움과 경외와 경멸의 대상이었지.

 

그렇다면 눈을 감는 최후의 순간에는 과연 이해하는가? 서로에게서 뭘 원했던가? 짝을 짓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도움을 받아 종족 보존을 위해 세상을 새롭게 다지길 요구하는 커다란 법칙, 사랑의 입김을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커다란 맹목적인 법칙에 단순히 복종했을 뿐일세. 그게 전부인가? 더없이 불쌍한 존재, 우리들은 과연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바랐던가?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서로에게서 무엇을 받았는가? 이 얼마나 비밀스럽고 두려운 계산인가? 그리고 한 남자가 한 여인에게 마음을 쏟는 경우에 과연 사람 자체가 문제되는 것일까? 그보다는 갈망, 이따금 잠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갈망이 문제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삶을 둘러싼 이 교묘한 흥분이 남자를 창조하고서 혼자 있는 모습을 안쓰럽게 여겨 여자를 붙여준 자연의 목적일 수는 없네. (p.35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가

 

어디를 가든 이 교묘한 자극, 향수, 각양각색의 헝겊조각과 값비싼 모피, 반쯤 벌거벗은 육신, 살색 스타킹 천지일세. 이런 모든 것은 실제로 효용가치를 위한 게 아닐세.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옷을 입지 않고 실크 스타킹을 신는 것은 다리를 내보이려 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여름에는 오로지 요염하게 자극적이라는 이유 하나로 물가에서 허리에 천을 두른다네. 화장품, 붉은 발톱, 푸른 눈꺼풀, 황금빛 머리, 여자들이 덕지덕지 몸에 칠하고 바르는 그 많은 것들은 전부 건강에 좋지 않네. (p.357)

 

과다노출에 대한 논쟁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지.

 

그런데도 이 체제 안에서 여인들이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자신을 팔려고 하는 것은 사실일세. 내 말은 모든 여인들이 자신을 상품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닐세. 그러나 예외가 커다란 규칙을 반박한다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네. 그렇다고 여인들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네. 여인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일세. 그러나 자신보다 더 아름답고 값싸고 매력적인 여자들이 많이 있으며 자신이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고 조잡하게 교태를 부리며 뽐내는 여인을 보는 것은 정말 슬프네. (p.359)

 

예외가 커다란 규칙을 반박하지는 못한다.

 

나는 많은 것을 읽었네. 하지만 읽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로 스스로 책에 뭔가를 줄 수 있을 때만 얻는 것도 있다네. 내 말은 일대일의 대결에서 상처를 입고 입히고, 싸우고, 설득하고, 설득당할 각오로 책에 접근해야 한다는 뜻일세. 그런 경우에만 배운 것을 통해 풍요로워지고 삶이나 일에서 얻는 게 있다네. (p.370)

 

많이 읽는 건 중요하지 않다.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이제 차가운 담배 연기가 카페 안을 맴도는군. 나는 이맘때가 제일 좋네. , 보게나. 밤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지 않은가. 외로움을 쫓는 현명한 사람들, 아니면 전등 불빛 아래서 낯선 이들 틈에 섞여 앉아 집에 가지 않아도 외로움을 즐길 수만 있다면 나머지야 아무래도 좋은, 자포자기한 사람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게 되면 집으로 가는 게 쉽지 않다네. 나하고 무관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이 있을 때가 가장 마음 편하이. (p.384)

 

요즘 집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 밤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틈에 오도카니 앉아있고 싶어지지.

 

그러다 그 변덕의 근원이 내가 밝힐 수 없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 근원은 바로 가난이었어. 유디트는 지난 기억과 싸웠네. 때로는 가슴 뭉클할 정도로 격렬하게 말일세. 그러나 가난이 그녀와 세상 사이에 쌓아 올린 둑이 무너지면서 그 영혼은 홍수에 휩싸였네. 유디트는 내가 자진하여 제공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더 빛나는 것을 원한 게 아니라 무조건 다른 것을 원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p.406)

 

빈곤의 폐해

 

인생의 모든 것은 어쨌든 형식을 갖추어야 하네. 반란도 마찬가지지. 결국에는 모든 것이 삶의 진부함에 이르기 마련이네. (p.411)

 

그러니 내 추억이나 사건이 특별한 그 어떤 것 이라곤 생각하지 말자. 그것이 형식을 갖추면 사랑, 실연, 외도 같은 진부한 것으로 환산된다.

 

자연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게 아니냐고? 자연에게는 이런 인간적인 환상이 필요 없네. 자연은 다만 창조하고 파괴할 뿐일세. 그게 자연의 임무이지. 자연은 계획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냉혹하고, 그 계획이 인간을 넘어서기 때문에 무심하네. 자연은 인간에게 정열을 선사하고는, 그 정열이 절대적일 것을 요구하네. (p.432)

 

정열은 잔치가 아닐세. 끊임없이 세상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이 진지한 힘은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들에게서 대답을 기대하지 않네.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려 하지 않고, 그들의 상대적인 감정에도 크게 개의치 않아. 그 힘은 전부를 주고 전부를 요구하네. 무조건적인 정열을 원한다네. 정열의 가장 깊은 흐름은 바로 삶과 죽음일세. 정열을 알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으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여기에 이른다네. (p.432)

 

정열은 위험하다. 전부를 주고 전부를 요구하기 때문에. 즉 자신을 지키지 않을 만큼의 맹목적인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친밀하고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감았던 눈을 뜨면 언제나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네. 거기 반쯤 어둠에 잠긴 방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조롱의 미소를 짓고 있는 숙명적인 친밀한 얼굴이 보였어. (p.447)

 

섹스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을 진작부터 바라보고 있던 상대를 발견하는 일이 이래서 끔찍하다고 하는 건가보다.

 

 

 

3, 유디트 파괴적인 사랑

 

사람들은 죽음을 무척 두려워하기 마련이야. 죽음 후에 또 다른 삶과 응징이 기다린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가 약속하는 모든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 예술가라는 사람은 두려워하는 게 없었어. 그 사람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만큼 잔인할 리 없다고 말했어. (p.514)

 

이 생명 영원하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부유하다는 것은 건강이나 질병처럼 어떤 상태가 아닌가 싶어. 부유한 사람이 있고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 부유한 사람은 희한하게도 늘 부유하고,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돈방석에 올라앉아도 진정한 부자가 되지 못해. 성인들이나 혁명가들이 스스로 남다른 존재라고 믿듯이, 먼저 자신이 진정으로 부유하도록 믿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는 안 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부자가 될 수 없어. (p.516)

 

뼛속 깊이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만이 존재한다.

 

나는 그 남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어. 그게 사실인데도, 그 사람이 이제는 밉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어. 말하자면 적을 증오하듯이 그렇게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어.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화를 내는 것이 부질없어지는 순간이 있어. 그건 정말로 슬픈 순간이야. (p.611)

 

무관심은 덧없고 허무하므로 무서운 징벌이다.

 

그 사람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들만이 아니라 개념들까지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어. 무가 하나의 개념이라면, 그 사람은 바로 무에 관심이 있었어. 무를 손에 들고서 이리저리 돌려보았어. (p.616)

 

내가 그 책을 이해했냐고? 전체적으로 대충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지.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아주 단순한 말로 씌어 있었거든. 그 사람은 빵과 포도주, 사람들이 먹는 것, 산책하는 방식, 산책하는 동안 생각할 것에 대해 썼어.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야 할지 잘 몰라서 헤매는 사람들을 위한 교과서 같았다고 할까. 그렇지만 소박한 척 가장한 교활한 책이기도 했어. 선생님 같은 어조 뒤에 뻔뻔한 무관심이 비죽이 웃는 게 느껴졌거든. , 책의 집필, 책을 손에 들고 이해하려 애쓰면서 심각해지거나 몽상에 젖거나 감동하는 독자, 그 모든 것을 심술궂은 소년이 뒤에서, 방구석에서, 책의 페이지들 사이에서 지켜보며 고소한 듯 비죽이 웃는 것만 같았어.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 한 줄 한 줄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전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는 통 모르겠더라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분명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거든. 도대체 문학도 독자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책을 썼는지 알 수가 없었어. (p.616)

 

곰곰이 생각해보면 위에서 묘사하는 책은 몽테뉴의 <에세>를 얘기하는 것 같다. 산도르 마라이가 자신을 투영한 라자르를 통해 자신이 진실로 집필하고 싶었던 책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은 포르티시모(아주 세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옮긴이)를 알리는 지휘자처럼 한 팔을 높이 쳐들었어.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은 남아 있을지라도 문화는 끝장입니다. 훗날 어디에선가 속을 채운 올리브를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문화를 의식 속에 담고 있었던 인간의 부류는 사라지고 있어요. 장차 그것에 대한 지식은 남아 있겠지만 문화에 대한 지식과 문화는 같은 게 아닙니다. 문화는 경험, 즉 햇빛 같은 지속적인 체험이지요. 지식은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복고다 뭐다 해서 아무리 과거의 향수를 자극한다 해도 그때의 문화를 향유하기는 어렵다.

 

한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어.

소시민의 예술 분야는 범죄입니다.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진실을 불러내는 듯 숱이 없는 머리를 쓰다듬었어. 그러고는 그 미심쩍은 진실을 해부하고 다시 짜맞추면서 설명을 하려고 했지. 그 사람은 소시민의 삶에서 범죄는, 예술가의 삶에서 영감이나 창조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어. 그렇지만 예술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거야. 예술가는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말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악보로 옮겨서 삶을 여러 곱절로 늘이려 한다는 것이었어. (p.654)

 

소시민의 예술 분야는 범죄 재미있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러시아의 어느 작가가 살인에 대한 책을 썼다면서, 그 러시아 사람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단언했어.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작가였기 때문에 직접 살인을 범하지 않고 살인에 대한 글을 썼다는 거야. (p.655)

 

도스토옙스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아름다움은 모욕이 되고, 재능은 도전이 되고, 지조는 암살을 뜻하게 될 겁니다. 이제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수십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슬그머니 기어오고 있어요. 여기 저기서. 재능이 없는 자들, 조야한 자들, 지조 없는 자들. 그들은 아름다운 것에 황산을 끼얹고, 역청과 유황과 험담으로 재능을 박해하고, 지조 있는 사람들에게 단도를 들이밀 겁니다. 그들은 벌써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조심하십시오. (p.662)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세상으로 이전하는 순간에서의 갈등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 있는 동안에만 지배할 수 있어. 우리가 남자들에게 달콤한 빵과 채찍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여서 남자들이 울부짖으며 편지를 쓰고 협박을 하는 동안에만, 우리는 마음 편안하게 동네를 산책할 수 있어. 우리에게 아직 힘이 있기 때문이지. (p.663)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다 본능이 더 막강한 탓에 지성은 참으로 별 볼일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오성보다 충동의 힘이 더 세거든. 게다가 충동이 기술공학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면 지성을 우습게 알아. 그러면 충동과 기술공학은 한데 어우러져서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해. (p.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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